Respeto
밀롱가에 들어선다. 밀롱가에서 당신은 무엇을 가장 먼저 느끼는가. 론다에 깔려 우리를 기다리는 무드 있는 탱고 음악, 강렬한 열기를 내뿜는 땅게로스의 춤, 살아 있는 론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탱고의 향기—여러 가지가 공간을 물들이지만, 사실 가장 먼저 스치는 것은 예의, 곧 태도다. 밀롱가에서는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밤, 누군가의 낭만이 바닥 위에 겹쳐진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마음, 어쩌면 우리의 삶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을지 모르는 이 중요한 요소가 우리에게 탱고를 느끼게 한다.
마음이 빈 탱고는 공허하다. 밀롱가에 땅게로스의 정열과 애정이 없다면 그 밀롱가는 조금씩 시들어 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탱고의 문화가 그렇다. 탱고에서 중요한 건 진실한 태도, 그리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예의다. 탱고는 한 나라의 정신적·예술적 유산이자, 이민과 가난과 그리움이 겹겹이 접힌 사람들의 호흡이다. 그런데 때때로 스크린 밖으로 나온 탱고는 헐리우드의 조명 아래에서 과장된 곡선과 ‘뜨거움’만 남은 이미지로 팔린다. 그 순간 탱고는 문화를 잃고 상품이 된다. 그럴때마다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respeto—존중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탱고를 즐기는 땅게로스들은 어떠한가. 스스로에게 묻자. 당신에게 탱고는 무엇인가.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인가. 단지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방편인가. 혹은 외로운 밤을 메울 대체품인가. 탱고를 그렇게 소모하고 말 것인가. 문화를 존중한다는 건 무엇보다 이해하려는 자세다. 상대의 외모를 평가하며 눈살을 찌푸리거나, 미숙한 춤에 인상을 쓰기보다 조금 더 느려야 한다.
동작의 의미를 되새기고, 음악의 계보를 더듬고, 가사의 질감을 음미하고, 라플라타의 바람 속에서 쓰인 단어들을 제 발음으로 불러 보는 일. 그리고 그다음, 당신과 나 사이에 완성된 이 춤을 바르게 향유하는 것. 공간을 지키고, 론다의 흐름을 살피고, 안전을 먼저 두는 것. 더불어 이 문화를 널리 알리며 함께하는 사람들을 늘려 가는 것.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데서 끝내지 않고, 소통과 마음의 전달로 탱고가 쓰이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다.
탱고가 ‘춤추는 슬픈 생각’이라 불렸던 이유, 왜 콤파트리토(Compadrito)의 그림자가 곧잘 소환되는지, 밤이 깊어지면 보르헤스의 문장을 찾게 되는 이유를 우리는 궁금해하고 알아가야 한다. 그 과정을 건너뛰고 문화를 수단으로만 쓴다면—욕망의 배경, 지배의 장식으로 소비한다면—그건 존중이 아니라 약탈이다.
존중은 추상어가 아니다. 몸의 습관이자 실천이다. 아브라소를 맺을 때 부드럽게 앉아 상대를 지탱하려는 마음, 어깨선에 필요 이상의 힘을 올리지 않는 것, 불안정한 축을 밀어붙이지 않는 것, 붐비는 론다에서 높은 간초를 포기하는 것, 까베세오가 빗나갔을 때 억지로 다가가지 않는 것—거절은 모욕이 아니라 다른 저녁의 선택임을 아는 태도. 그리고 음악이 클라이맥스로 치달아도 내 욕망보다 상대의 안전을 더 크게 두는 것. 이것들이 모두 탱고를 향한 존중(respeto)이다.
문화를 향한 존중과 서로를 향한 존중은 별개가 아니다. 탱고의 역사에 귀 기울이는 귀는 파트너의 흉곽이 내는 미세한 리듬에도 귀 기울인다. 반도네온의 숨이 길어질 때 서두르지 않는 마음은, 상대의 몸이 보내는 “오늘은 짧게”라는 신호도 알아듣게 한다. 문화 앞에서 겸손한 사람은 사람 앞에서도 겸손하다. 이 순서를 거꾸로 세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탱고의 존중을 세 가지로 적어 둔다.
하나 배움의 존중이다. 음악, 시, 언어, 도시의 맥락을 조금씩이라도 더듬어 본다. 마찬가지로 milonga, compás, arrastre가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해한다. 더불어 나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의 감정과 동작, 그리고 그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해 본다.
둘 공간의 존중이다 론다를 흐르게, 아브라소를 편하게, 안전을 먼저. ‘보여주기’보다 ‘지나가게’를 선택한다. 탱고에서 흐름과 느낌은 중요하다. 흐르지 않는 탱고는 죽어 있는 것과 같고, 느낌이 없는 탱고는 팥 없는 붕어빵이다.
셋 사람에 대한 존중이다. 함께 춤을 추는 존재를 친구·동반자로 대해야 한다. 잠깐이라도 만나는 상대는 일종의 전우, 혹은 파트너와도 같다. 실패를 벌하지 말고, 부족한 부분을 서로가 채워 가며 하나의 춤을 만들어 가야 한다. 탓하기 시작하면 춤은 완성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DJ, 론다에 함께하는 사람들, 위대한 작곡가들 모두를 존중하는 마음을 잊지 않을 때 탱고는 더 살아 숨 쉬게 된다.
존중은 크고 장엄한 제스처가 아니다. 작은 조도에서 과장하지 않는 선택들의 합이다. 광고가 주입한 도발 대신 품위 있는 거리, 과시 대신 귀 기울임, 소비 대신 함께 살림. 그 합이 쌓이면, 탱고는 더 이상 성적 장식으로 비치지 않는다. 삶의 애환이자 희로애락의 기록으로 다시 보인다. 우리는 그때서야 왜 사람들이 “탱고는 춤추는 슬픈 생각”이라 했는지, 왜 어떤 밤에는 보르헤스의 구절이 더 정확한 설명이 되는지, 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마지막 곡이 사그라질 때, 나는 상대의 손을 놓기 전 아주 짧은 파우사를 더한다. 눈빛으로 묻는다. “고마웠어요.” 눈빛으로 답이 온다. “나도요.” 반도네온의 벨로우즈가 작게 접히고, 홀 안 공기가 사각 하고 자리 잡는다. 우리의 춤은 끝났지만 탱고는 끝나지 않는다. 다음 문장을 위한 여백이 남는다. 그 여백 위에서 문화는 이어지고, 우리는 다시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