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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게츠 Mar 26. 2018

운명

도끼 같은 책


책이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고정관념, 당연시 여겼던 생각의 틀을 깨는 도끼 같은 책을 만난 적 있는가? 나에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그랬고,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가 그랬으며 토머스 s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그랬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내가 판단한 남의 모습은 절대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며 오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총 균 쇠」를 통해서 나는 '지구 전반에 퍼진 초기 인류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진화 과정을 거친 게 아니라 진화가 퍼졌나 갔다는 것'을 알았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과학발전은 직선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순간에 변화하는 혁명과 같은 현상'이라는 것을 내게 알려줬다.


도끼 같은 책들은 내가 가진 '오해'를 풀어주고 세상을 또렷이 인식하게 하지만 대부분 두껍고 지루하기에 읽는 과정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두루뭉술하게 인식했던 대상을 도끼 같은 책들은 찬찬히 뜯어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 그 대상의 전후 맥락을 파악하고 차근차근 이해한다. 그렇게 우리의 '오해'를 풀고 그 대상을 새롭게 인식한다. 단계적인 이해 뒤에, 우리는 비로소 그 대상을 바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이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 심지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도 종종 '오해'를 하곤 한다. 살면서 일어나는 사건들 또한 전후 맥락을 파악하지 않고 단계적인 이해를 하지 않으면 '오해'를 할 뿐, 그 사건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운명」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사는 14살 소년 조르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주인공은 유대인이란 이유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부헨발트와 차이츠로 옮겨지며 수용소의 지옥 같은 삶과 마주하게 된다. 아침에 한번 배급되는 빵과 수프로 하루를 연명하고 감당하기 힘든 육체노동을 하면서 소년은 그곳에서 견뎌 나가는 법을 배운다. 나중엔 모든 걸 포기하고 삶의 의지마저 잃어버리지만 세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1년의 수용소 생활도 끝이 나고 소년은 부다페스트로 돌아오게 된다.


유대인과 수용소를 소재로 한 책은 많지만 다른 책들과 비교해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이 가지는 특징은 수용소 생활을 건조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 대부분의 수용소 소설은 그곳의 비인간적인 환경과 고통받는 인물의 묘사를 통해 수용소의 실태와 참혹했던 과거를 알리는데 집중한다. 그에 반해 저자는 14살 소녀의 눈으로 본 수용소를 무미건조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에게 수용소를 보여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적응해나가는 소년을 보여준다.


책의 저자 임레 케르테스는 책의 주인공과 같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실제 수용소 생활을 했다. 1년간의 수용소 생활은 트라우마가 되었고 후에 그가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되었다. 저자는 트라우마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기 힘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참혹한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많은 고민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운명」의 주인공 조르지가 고향으로 돌아와 그가 수용소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책의 마지막 10장이 저자가 약 280쪽에 달하는 이 소설을 쓴 이유이며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레 케르테스




운명과 자유

고향으로 돌아간 조르지는 옆집 노부부를 만난다. 소년의 이야기를 들은 노부부는 이제 그 사건은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소년은 자기가 겪어왔던 경험을 왜 잊어버려야 하는지, 왜 수용소 사건을 삶에서 지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소년은 노부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항상 이전의 삶을 이어 갈 뿐 결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는 없다. 나는 다른 길이 아닌 주어진 나의 운명 속에서 끝까지 정직하게 걸어왔다고 주장했다.


맞다. 소년은 마지막에 포기할 뻔도 했지만 주어진 운명을 정직하게 걸었다. 소년의 운명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과연 그 지옥 같은 경험을, 끔찍했던 시간을 어떻게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화가 나지 않을까? 분하지도, 슬프지도 않을까? 이에 소년은 "특히 저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이 끔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라고 답한다.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어떤 사건들이 전체적으로 봤을 때 명확하지도,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개념이 잡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개별 사건들 역시 정확히 이해되지 않음에도 그 사건들을 정상적인 경로로 분, 시간, 주, 달 단위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모든 사건을 멍한 상태에서 하나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시에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살면서 겪은, 직접 걸어온 운명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때 상황은 어땠는지 그리고 그 행동이 다음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세세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후 맥락과 단계적인 이해를 했다는 말이다. 삶에서 전후 맥락을 파악하지 않고 단계적 이해 없이 한 사건만 따로 떼어 놓고 본다면, 다시 말해 그 운명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이의 삶에서 일어난 사건을 판단한다면, 그 사건을 '오해' 할 수밖에 없다.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기 전 다른 사람을  판단해 '오해'하고 「총 균 쇠」를 읽기 전 초기 인류의 진화가 지구 전반에 걸쳐 동시에 진행되었을 거라 '오해'하고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기 전 과학의 발달은 점진적인 것이라 '오해'했던 것과 같으며 노부부가 소년이 겪은 일은 끔찍한 것이라고 '오해'한 것처럼 말이다.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큰 흐름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운명이라 부르는 큰 흐름 속에서도 스스로 선택하고 버티고 행동하며 단계적으로 운명을 살아낸다. 그렇기에 책에선 '우리 자신이 곧 운명'이라 한다. 우리는 자유를 떼어놓고 운명을 파악할 수없다. 또한 운명을 떼어놓고 자신의 자유를 파악할 수 없다. 큰 흐름 속에서도 우리는 행동하고 그 행동은 다음 상황에 영향을 준다.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되 자신의 자유 의지 또한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수용소 생활처럼 지옥과도 같은 경험을 수용하고 자기가 걸어온 을 받아들이는 주인공, 저자의 방법이다.


극복하지 못할 불가능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아갈 길 저만치에 행복이 피해 갈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가스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 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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