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불감증과 평화
미얀마 여행 중 최고의 순간을 물으면 망설임 없이 대답 할 수 있다. ‘스피드 보트’에서 보낸 하루가 더없이 소중했다고. 미얀마에 도착해서도 할까말까 망설인 재미가 의심스러웠던 보트에서의 반나절에 감사한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반나절을 보낸 그 작은 배는 평화였다.
-이라와디강을 따라 이동하는 미얀마의 운송수단이다. 유람선이 크루즈 흉내를 낸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관광객들은 주로 '만달레이->바간'으로 이동 할 때 이용한다. 반대 방향인 '바간->만달레이'도 운행을 하지만 강의 방향과 반대로 가기 때문에 시간도 더 오래 걸리고 비수기에는 운행이 없는 경우도 있다. (미얀마의 성수기는 여행하기 좋은 겨울을 의미한다)
-보트는 '스피드 보트'와 '슬로우 보트' 두 종류가 있다. 여러 회사에서 운행을 하는데 티켓에는 아침, 점심 2번의 식사요금이 포함된다.
-스피드 보트와 슬로우 보트는 속도 차이가 크게 나는 건 아니다. 솔직히 스피드란 말이 민망할 정도. 다만 스피드 보트는 주로 외국인들이 이용해서 약간 더 시설이 좋고 가격이 비싸다.
-예약은 호텔이나 여행사에 부탁하면 된다.
-오후의 강한 태양과 싸울 자신이 없다면 무조건 천장이 막힌 그늘 자리를 사수해야 한다. 그늘막도 시간이 지나면 앞의 몇 좌석을 제외하고는 빛이 들어온다. 내 경우엔 배의 오른편 제일 앞자리에 앉았고, 일출이 제일 잘보이는 자리였다. (만약 나와 반대방향으로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반대쪽이 일출이 잘 보이는 자리가 아닐까?)
-2층 야외석의 경우 새벽엔 춥지만 정오쯤 되면 땀이 살짝 날 정도로 더웠다. 실내에는 에어컨을 틀어두기 때문에 안에 들어가면 시원하다.
땅이 꽤 넓은 미얀마에서 도시 간 이동은 보통 비행기와 버스를 이용한다.
바간-만달레이 이동도 보통은 버스를 이용하지만 스피드 보트를 타면 두 도시 사이에 흐르는 이라와디강을 따라 갈 수 있다.
바간, 만달레이 두 도시 뿐 아니라 미얀마 북부에서 발원해 미얀마 중심을 관통하는 이라와디강은 미얀마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
물가에 넘쳐나는 미얀마 사람들의 생명력, 살아가는 진실 된 모습이 보고 싶어서 버스보다 2배 이상 느린 보트를 선택했다.
관광지가 아닌 미얀마 전역의 모습을 가만히 앉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동 시간이 거의 12시간 가까이 걸리기 때문에 하루를 따로 빼야 하는 일정이라 버스를 탈지 미얀마에 와서도 보트를 탈지 고민을 많이 헀다.
고민 끝에 가장 '미얀마 다운 시간'을 느껴보고 싶어서 티켓을 사버렸다.
스피드보트의 출발시간은 해가 뜨기도 전인 5시 반이다.
호텔에서 미리 예약해 준 택시를 타고 새벽 4시 45분에 호텔을 나왔다.
외딴 제티(Jetty, 선착장)에 택시 기사가 도착하자 보트 직원과 택시기사가 내가 탈 보트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를 내려줬다.
어둠 속에 배 한척이 희미하게 보였다.
직원의 안내를 따라 아슬아슬한 나무다리를 건너 배 안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티켓 확인만 마치면 승객보다 좌석이 수십배는 많아서 지정석 없이 아무 자리나 앉을 수 있다.
꽉 막힌 1층에는 석유 냄새가 가득했다.
조금 춥지만 사방이 뚫린 2층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손님이 몇 명 들어오지 않았는데 배가 출발한다.
설마 했는데 승객은 나까지 13명이 전부다.
말한마디 안했지만 이미 친해진 기분이다.
지금도 보트에 타고 있던 13명의 승객이 모두 기억난다.
인레에서 다시 마주친 5명의 중국인 일행, 머리가 희끗한 두 할머니, 내 배낭을 번쩍 들어줬던 두 남자, 캡모자를 쓰고 나란히 앉아 책을 보던 커플, 배 뒤의 그늘 없는 자리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던 여자, 그리고 나.
13명의 승객과 그와 엇비슷한 숫자의 선원의 항해가 시작되었다.
새벽 추위를 조금 더 현명하게 버틸 방법을 찾으며 좋은 자리를 잡은 것에 만족하고 있으니 직원들이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메뉴가 단순해서 준비랄 것도 없다.
오래된 흔적이 보이는 토스트기에 식빵을 수십장 구워서 탑을 쌓고, 급식실에서 보던 커다란 보온통에 커피를 넣고, 삶은 계란과 잼을 준비한다.
빵이 인원에 맞춰 어느 정도 구워지면 직원은 승객 한명한명에게 아침을 먹으라고 알려준다.
직원들은 모두 새벽에 노동하면서도 참 잘 웃고 친절하다.
직원을 따라 한번 웃어준 뒤 원하는 만큼 빵과 커피를 가져다 먹으면 된다.
그릇도 포크도 없는 제법 야생적인 아침 식사다.
넥타르나 불노초 보다 귀한 아침 상이다.
토스트에는 잼대신 별을 발라 먹었다.
커피 한모금마다 밤하늘의 어둠을 한입씩 마셨다.
설탕대신 별 뿌린 하늘을 마시니 기분이 달다.
커피 두 잔으로 몸을 녹이니 어느 새 날이 밝아온다.
어디선가 나타난 새들도 강 위에서 아침거리를 장만 중이다.
노트북 배경화면 삼고 싶은 몽환적인 하늘색이다.
우주를 혼자 떠다니는 기분에 로그인한다.
어느 새 해는 완전히 모습을 보였다.
날이 밝고 옆에 지나가는 배구경, 강가에서 농사짓는 사람구경을 하다보니 금세 해가 달아올랐다.
여기저기서 썬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쓰고 햇빛 반길 준비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승객들은 저마다의 세계에 빠진다.
끝없이 경치를 보고, 방석을 가져다 갑판에서 요가를 하고, 음악과 독서에 빠지고, 카드게임을 한다.
나도 썬크림을 바르고 그늘 자리에 앉아 아이패드에 넣어두었던 영화를 한 편 봤다.
처음엔 앞을 보고 있던 승객들은 어느 순간 의자를 옮겨 강이 잘보이도록 홈씨어터를 만들고 있다.
직원은 쿠션을 더 갖다 쌓으라고 가져다준다.
나도 주변에 있던 의자 4개를 모아 짐을 올리고 다리를 뻗어 오른쪽 경치가 잘 보이는 명당을 만들었다.
이번 여행에선 무엇보다 여유롭고 싶었다.
아무 생각없이 영화도 보고 책도 보고 싶었는데 그럴 틈이 잘 안생긴다.
어딘가 가야하고 관광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어서 바간에서 가만 누워 있으면서도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이 배 위에서 만큼은 가능했다.
봐야한다고 정해진 것도, 이 시간에 꼭 해야 하는 일도, 분주하게 움직일 일도 없다.
그냥 최선을 다해 이 작은 의자에 앉아 널브러져 있기만 하면 된다.
13명의 승객이 해야하는 일은 무료한 시간을 허비할 수 있는 가장 기발한 방법을 찾고 실천하는 것이다.
아이패드 속 영화보다 현실감없는 10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는 기분이다.
장르는 판타지 정도?
허겁지겁 경치를 먹어치웠더니 배가 고팠다.
햇빛이 많이 뜨겁게 느껴질 시간 쯤이 되니 다행히 도시락을 나눠준다.
볶음밥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옥수수의 단맛이 기분 좋은 예상 밖의 맛있는 볶음밥이었다.
반쯤 먹고 조금 더 먹고 싶단 생각을 할쯤 요리사가 냄비를 통째로 들고 나타났다.
일일이 돌아다니며 더 먹고 싶으면 덜어가라고 한다.
식탁도 와인도 없이 이렇게 근사한 식사가 가능하다.
점심도 먹고 바간에서 간식으로 산 소시지롤도 먹고 한국에서 가져 온 과자도 한봉지 먹었더니 냉장고에 든 판매용 맥주가 보인다.
팔이 따가울 정도로 볕이 내려 쬐자 맥주의 탄산이 간절했다.
결국 맥주 한병을 사들고 맨 뒤 벤치로 갔다.
mp3에서 지금 분위기와 어울리는 음악이 나오길 기다리며 미얀마비어의 탄산을 음미했다.
나를 선두로 여기저기서 맥주를 찾기 시작했다.
13명의 승객은 서로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 중이었다.
영화도 보고 맥주도 한잔하고 식물이 되기 직전까지 광합성도 하며 시간을 즐기는데 갑자기 배가 멈춰 선다.
직원들이 1층으로 몰려가서 뭔가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강 중간중간에 모래섬들이 있었는데 배가 피하지 못하고 걸린 모양이다.
자주 있는 일인지 당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슨 일인지 설명도 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옷을 벗고 강으로 뛰어들어 배 밑에서 기계를 확인한다.
자기들끼리 고치고 있지만 다급해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승객들도 누구도 재촉하거나 문제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다만 뒷자리로 모여들어 어떻게 해결 중인지 관람할 뿐이다.
이 소동은 배 위의 오락거리나 쇼정도일 뿐이었다.
다들 웃으며 배 밑을 바라보고 반대 편 풍경을 보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안전불감증일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선 그냥 그게 당연하다.
어차피 그들 방식대로 해결 할 것이고 잠시 후면 문제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지금 걱정할 필요는 그 무엇도 없다.
해결이 예정 된 문제라면 지금 걱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해결될 일은 문제가 아니다.
신기했다.
같은 상황이 한국에서 있었다면 내가 먼저 나서 무슨 일인지 캐묻고 이의제기하고 난리를 피웠을 텐데.
여기선 무신경함인지 평화인지 모를 감정이 나에게 전염된다.
싫지 않았다.
심지어 계속 들리던 모터소리가 끊어지자 그 정적을 즐기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 생겨도 평온함을 유지한다는 이것이 평화였다.
물론 큰일이 아닌 상황이라 가능했지만.
전쟁과 평화같은 세계 명작을 읽어도 이해못한 평화를 강가에서 조난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모터 소리가 몇 번 요란하게 나더니 배가 움직인다.
선원들을 바라보던 승객들도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사건의 유일한 흔적은 물에 들어가 기계를 살펴보던 선원이 배 난간에 걸어 둔 젖은 옷뿐이었다.
평소 쓸데없이 하던 근심걱정도 사실 저기 널려 있는 빨래 정도밖에 안되는 일은 아니었을까?
이라와디강에 내리쬐는 햇빛으로 모든 걱정을 말려서 돌아가고 싶었다.
선원의 초록색 론지를 말린 햇빛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만달레이 제티 근처에 도착하자 요란한 배 한척이 보였다.
황금빛 동상이 세워진 배였다.
내가 타고 온 배와 많이 다르다.
수상 호텔이나 호화 여객선 쯤 되나보다.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그 모습이 만달레이의 첫인상이었다.
어느 새 해가 출발할 때와 반대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만달레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