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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Jan 30. 2019

북극의 빛, 오로라를 보다

트롬쇠의 오로라 헌팅

하늘엔 세 가지 순간이 있다. 낮, 밤, 그리고 오로라가 뒤덮는 시간.



하늘은 종종 분홍색이다.

파란색도 되고 잿빛도 되지만 해가 뜨고 질 때 이따금 분홍색 스카프를 두르는 하늘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검정과 파랑만으로 하늘을 그리던 초등학교 때는 분홍 하늘은 나만 아는 하늘인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고 하늘에 그 높이만큼 다양한 색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초록색은 어떨까?

춤추며 움직이는 하늘은?

가장 특별한 색을 보여주는 하늘은 뭐지?

궁금했다.

그래서였다, 오로라를 보러 떠난 건.

이런, 지금 생각하니 정말 단순한 이유였군.


오로라(Aurora).

내가 갔던 노르웨이에서는 오로라를 'Northern Lights'라고 부른다.

'Aurora' 보다 더 명확하고 간결한 이름이다.

북쪽 나라에서도 더 북 쪽으로 가면 비치는 북쪽의 빛.

오로라를 찾아 도착한 곳은 북쪽의 파리라 불리는 북극권 도시 트롬쇠(Tromso)였다.

엄연한 북극권 도시라 관광안내소에 가면 북극권 도달 증명서라는 걸 받을 수 있다.

북한도 못 가봤는데 북극에 도착했다.

무슨 말이냐면, 가는 길이 엄청 멀었다...

트롬쇠로 가는 동안 기내식만 세번을 먹었다

비행기를 타고, 타고, 타고 트롬쇠에 도착해서 처음 밟은 것은 땅이 아니었다.

눈이었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트롬쇠에서는 다큐고 일상이다.

도착했을 때 이미 눈이 많이 쌓여 있었지만 눈은 작아질 생각도 그칠 생각도 없었다.

심지어 극야 현상이 한창이라 온 세상이 깜깜하다.

호텔까지 가는 동안 눈코입에는 눈이 텁텁하게 들어차고 속눈썹에는 미니핫도그 같은 눈송이가 달렸다.

눈길을 걷지 못하는 캐리어는 든 것도 미는 것도 아닌 상태로 날라야 했다.

간신히 호텔에 체크인하고 방에 들어오니 만신창이였다.

후드 티를 엎으니 모자모양의 눈덩이가 나왔다.

네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결국 이날 외출도, 오로라헌팅도 포기했다.

트롬쇠에 있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로라헌팅을 나가겠다는 계획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좋다.

여행이 마음대로 된다는 생각 따위 해본 적 없지.

그래도 떠나기 전에 한번은 보여다오.

트롬쇠에 도착해서 시내로 가는 버스 안. 세시가 조금 넘었을 뿐이다.

눈은 다음 날 오후가 한참 지나서야 그쳤다.

정확히 말하면 많이 약해져서 그냥 맞아도 되는 정도로 변했다.

고향이 강원도나 울릉도였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충청도 평야에서 태어난 나에게 이 정도 눈은 자연의 신비다.

신기한 것은 잠시고 일기예보를 보며 불안과 초조함에 빠졌다.

오로라 헌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날씨다.

오로라지수도 구름 앞에선 의미가 없다.

오로라 어플과 일기예보에 표시된 구름은 100%.

99%도 아닌 100%였다.

예측에 100%가 있을 수 있다니.

뭔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다가 하늘을 보면 100% 구름 낀 날씨가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트롬쇠의 일정은 고작 5박이다.

오로라를 볼 기회가 최대 다섯 번인 짧은 여행이다.

이미 첫번째 밤을 날려서 무언가 해야한다는 강박감이 생겼다.

트롬쇠 여행자센터에서 투어를 예약했다.

예약하면서도 기대는 없었다.

오늘은 다른 날의 연습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소규모 투어가 아닌 단체 투어로 맛만 보기로 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추위를 떠올리며 옷을 껴입고 핫팩을 두르고 버스에 탔다.

그제야 난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난 더위를 탄다.

북극 추위 걱정에 지나치게 껴입은 옷은 난방이 되는 버스 안에선 멀미가 되어 돌아왔다.

오로라 헌팅의 핵심은 오로라를 보는 순간이지만 사실 오로라를 보는 시간보다 찾아다니는 시간이 훨씬 길다.

버스가 핀란드 국경을 넘어 세시간 이상을 달리는 동안 더위에 지쳤다.

더위, 졸음, 멀미에 질려갈 때 쯤 드디어 버스가 멈춘다.

도로에 종종 지나는 차를 보니 오지는 아니지만 멀고 외진 곳이다.

사람이 빛이 되는 장소다.

발목 이상으로 쌓인 눈을 걸었다.

다섯 겹을 껴입고 두터운 눈을 걸으니 열발자국만 걸어도 숨이 찬다.

차오르는 숨과는 별개로 핫팩을 뚫고 추위가 들어온다.

삼각대를 설치하기 위해 잠시 장갑을 벗었더니 손이 얼어붙는 듯하다.

그게 오로라와의 첫 만남이었다.


오로라가 보이지는 않는다.

모두가 말하는 대로 구름 같아 보인다.

처음에는 어디가 오로라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하늘 전체에 달빛 하나 새어 나오지 못하게 구름이 가득 껴서 오로라도 구름을 넘지 못했다.

셔터 속도를 조정한 사진에 희미하게 찍힌 초록을 보고서야 그것이 오로라인 줄 알았다.

첫 오로라는 '보는 것' 보다는 '느끼는 것'에 가까웠다.

사진에 찍힌 색을 보고 구름과 오로라를 구분하게 된 것이 이날의 소득이다.

오로라를 본 사람들이 왜 실망하는지 알겠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끝나면 나도 좀 실망할 것 같다.


다만 희미한 오로라보다는 선명한 별에 눈이 갔다.

오로라의 반대편에 천문대에서도 본 적 없는 별이 있었다.

북극의 별은 머리 위가 아닌 눈앞에서 빛난다.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이런 순수한 별을 봤다면 천문학자의 꿈을 꿨을 것 같다.

제대로 된 별을 본 적이 없어서 각종 시에서 찬양하는 별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 순간만큼은 알겠다.

춤추는 오로라를 보지 못해도 별의 기억을 갖는다면 후회는 없다.

더위와 추위에 번갈아 지친 몸은 피로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소시지와 빵을 굽기 시작했다.

첫번째 오로라 투어.

오로라 대신 별빛과 모닥불빛의 기억을 남기며 다소 허무하게 끝났다.

첫번째 오로라헌팅에서 만난 희미한 오로라. 구름이 너무 짙어서 오로라도 짙은 구름으로만 보였다. 이날의 오로라지수는 2, 구름은 거의 100이었다.

오로라가 보이지는 않는다.

모두가 말하는 대로 구름 같아 보인다.

처음에는 어디가 오로라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하늘 전체에 달빛 하나 새어나오지 못하게 구름이 가득 껴서 오로라도 구름을 넘지 못했다.

셔터 속도를 조정한 사진에 희미하게 찍힌 초록을 보고서야 그것이 오로라인줄 알았다.

첫 오로라는 '보는 것' 보다는 '느끼는 것'에 가까웠다.

사진에 찍힌 색을 보고 구름과 오로라를 구분하게 된 것이 이날의 소득이다.

오로라를 본 사람들이 왜 실망하는지 알겠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끝나면 나도 좀 실망할 것 같다.


두번째 헌팅도 비슷하게 시작했다.

사실 이날은 오로라지수가 5를 넘는 날이라 한국에서부터 기대했었다.

봉고차로 여러 지점을 옮겨 다니며 모닥불도 피우고 사미족 전통 노래까지 들었지만 오로라가 아닌 눈과 비만 나를 때렸다.

아팠다, 마음이.

사실 내가 트롬쇠에 머무는 동안 오로라 지수는 좋은 편이었다.

5일 중 첫날과 둘째날은  kp2, 나머지는 3 또는 4였으니 날씨 운이 없는 내 수준에서는 최대한의 오로라 지수나 다름없다.

심지어 두번째 헌팅을 떠나던 날은 시간에 따라 오로라지수가 5까지 올라갔다.

기대를 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헌팅을 떠나자 오로라투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라지수가 아닌 날씨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오로라를 본 사람이 왜그렇게 드문지를 알겠다.

하늘은 오로라를 잘 보여주지 않는다.

중간에 잠시 보이긴 했지만 어제보다 희미한 수준이다.

카메라가 없는 사람은 보지 못할 수준이라 다른 사람들이 다가와 사진을 보여달라고 할 정도였다.

사진을 보니 분명 하늘에 오로라는 가득하다.

다만 야속한 구름이 우릴 갈라놓고 있었다.

얼마나 귀하길래 그렇게 안보여주니?

두 번째로 본 오로라. 셔터 속도를 30으로 맞추고서야 저 정도로 보였다. 그나마도 금방 사라졌다.


열번쯤 장소를 바꾸는 동안 희미한 오로라 하나밖에 보지 못했다.

오로라지수가 제일 높은 날임을 감안하면 실망을 감출 방법이 없다.

12시가 가까워졌고 결국 가이드는 여기서 장비를 반납하라는 말을 한다.

따듯한 차 안에만 있어서 써보지도 못한 방한 장비들을 벗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Look!"이라는 가이드의 외침이 닿는 곳에 오로라가 펼쳐졌다.

그건 분명 오로라였다.

초록색이고 움직였다.

구름이 살짝 걷힌 틈 사이로 무언가 일렁이며 내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카메라가 아닌 눈으로도 보이는 초록빛.

오로라 어플에서 새벽에나 구름이 사라진다더니 진짜였다.

조금 더 헌팅을 나서면 더 좋은 오로라를 볼 텐데.

기쁘고 아쉬운 마음으로 호텔에 돌아가야 했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허락한 잠깐의 오로라.

그렇게 이틀 연속으로 오로라투어를 했더니 피곤했다.

낮에 잠만 자도 모자란데 하루는 개썰매까지 탔더니 밖에 돌아다니지 않고도 체력이 축난다.

하지만 이미 오로라를 본 이상 헌팅을 멈출 수 없다.

어젯밤 일렁이던 오로라는 더 큰 욕망으로 번졌다.

더 멋진 오로라가 보고 싶다.

어제보다 오로라지수는 안좋지만 오늘도 투어에 나선다.

오늘 투어는 그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왜때문인지 한국인 사이에서 유명한 Flexi Tour에서 한다.

한국인 사이에서 너무 유명해진 트롬쇠의 투어업체다.

하지만 의외로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한국인은 없다.

대신 돌아오는 건 가이드 다니엘의 설명이다.

오늘은 날씨가 안좋아서 좋은 오로라를 볼 수 없으니 투어를 내일로 옮기자는 말이다.

원래 내일은 자신의 휴일이지만 모두 원한다면 투어를 내일로 옮기겠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왜 그렇게 한국에서 평가가 좋은지 알았다.

진짜 오로라를 보여주려는 요정 아닌가 싶다.

특히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거기.

아주 오랜만의 유일이지만 가자는 부분이었다.

한국에 오래 살았더니 휴일에 민감하기에 이 사람 말을 들으면 내일은 진짜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설득당한 우리는 자리를 떠났고 정확히 24시간 후 다시 만났다.

다니엘의 예측처럼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양호하다.

트롬쇠 마지막 오로라 투어의 날씨와 KP 지수는 이 정도였다. 오로라지수가 엄청난 것도, 구름 상태가 좋은 것도 아닌 애매한 날이었다.

이날도 국경을 넘어 핀란드로 갔다.

달리다 보니 언뜻 오로라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투어가 처음이라 전혀 눈치를 못 챈 것 같았지만 희미한 오로라를 본 경험이 있는 나는 알 수 있었다.

조짐이 좋았다.

차 안에서도 희미하게 보인다면 다니엘은 나를 오로라 한가운데에 던져줄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진짜 오로라가 둘러싼 어느 도로 옆에 섰다.

맨눈으로도 오로라의 움직임이 보였다.

느낌이 아닌 눈으로 확실하게 보이는 오로라.

사방에서 일렁이는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머물러줬다.

오로라댄싱이라 부르는 움직임은 물론이고 오로라가 강한 날만 보인다는 핑크 오로라도 잠깐이지만 나타났다.

세번째 헌팅은 대성공이었다.



갈 때는 생각 없이 떠났는데 돌아오니 왜 그렇게 오로라가 보고 싶었는지 궁금하다.

보통은 유럽여행 중에 트롬쇠에 들르지만 나는 오로라를 보겠다고 한 가지 목표로 멀리까지 왔다.

마침 시간이 있었다고 하기에는 멀고 비싼 여정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오로라를 봤다.

트롬쇠의 마지막 밤에 나는 눈꺼풀 속에 담긴 오로라와 함께 잠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겨울밤에 문득 하늘을 보는 날이면, 어느 길 한가운데 누워 오로라를 보던 순간으로 돌아가 잠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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