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알고리즘이 나에게 ‘발리’라는 단어를 외쳐대는 2024년의 어느 날 내가 나에게 계시를 내렸다.
때가 됐다, 발리에 갈 때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항공권을 예매한 뒤였다.
그렇게 2024년의 여름,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나는 혼자 떠난 여행자고, 여긴 발리다.
사실 아직은 인천공항이다
발리.
2004년 방영된 모 드라마 덕분에 내 동년배 중에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된 휴양지다. 물론 한국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라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라는 영화가 있어 한국 아닌 곳에서 오히려 더 인기 있는 여행지다.
발리 친구들
이렇게 유명한 발리지만 사람들은 '발리에서 생긴 일' 드라마가 명작이었다는 사실 빼고는 발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예를 들어 발리가 인도네시아의 섬이라는 것, 남반구라는 것, 시차가 1시간 밖에 없다는 것과 같은 사소한 지식 말이다. 아마도 발리가 그냥 발리라는 나라인 줄 아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익숙한데 잘 모르는 곳. 해외란 게 다 그렇지만 발리는 나에게도 유난히 그런 곳이었다. 캄보디아,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말레이시아까지 다 가본 이후에야 눈을 돌렸으니 말 다 했지.
그럴 만도 한 게 발리는 멀다. 비행시간부터 7시간. 한국인들 많이 가는 태국, 베트남이 기내식도 안 먹고 갈 수 있는 거리인 것에 비해 7시간은 비행기에서 다리에 쥐가 한 번 나고, 각자 고비를 맛본 후에야 지나가는 시간이다. 발리 이거 가는 길부터가 쉽지 않다. 휴가 아닌 신혼여행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도 동남아 휴양지보다 하루 이틀 시간을 더 보태야 하기 때문이겠지.
발리에서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현지식
그래서 나도 서른이 훌쩍 넘을 때까지 여행을 미루고 미루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사람들 왜 이렇게 발리, 발리 하나 했던 것이다. 이쯤되면 의문이 생긴다. 발리, 그거 좋다는 건 알겠는데 뭐가 특이할까?
우선 여행자의 관점에서 볼 때 발리가 참 특이한 점이 다른 휴양지에 비해 유난히 장기 여행자가 많아서였다. 혼자 훌쩍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입을 모아 말한다. 그냥 계속 있고 싶다고. 오래 머물 수 있다고. 혼자서도 재밌다고.
인스타가 기대하는 발리=플로팅조식
그래서 나도 조금 긴 여행을 해보기로 했다. 기간은 약 한 달. 같은 곳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발리 곳곳을 돌아다녔기에 한 달 살기보다는 여행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그렇게 한 달짜리 여행이 시작되었고, 끝났다.
그래서 어땠냐고?
사람들 왜 그렇게 발리, 발리 하나 했더니 “발리, 발리, 발리.”.
발리, 거기 좋더라.
아메리카노에 뷰 추가요
발리에는 1,300원짜리 밥이 있다.
길다가 만나는 개와 고양이가 있다.
눈 돌리면 바다가 있다.
숨 쉬며 흔들리는 정글이 있다.
발리엔 행복이 있다.
내게 발리에서 부족한 건 선크림뿐이었다.
술도 좀 부족하긴 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거창한 생각이 많았던 것 같긴 한데 비행기에서 내려 발리 공기를 들이켜자마자 푸스스 잊고 그저 발리에 나를 맡겼다. 요가와 명상으로 알찬 여행을 하겠다던 마음가짐은 빈땅 한 잔에 홀렸고, 많이 돌아다녀 살이 빠져 돌아오겠다는 마음가짐은 나시고랭과 미고랭 앞에 흘렸고, 결국 혼자 바다에서 정글에서 울다가 웃다가 누워있다 돌아왔다.
1500원짜리 국수 한 그릇
사실 발리는 동양인보다 서양인에게 맞춰진 섬이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랜드마크와 관광지가 약하다.
일단 일명 라이스테라스라고 부르는 경관부터가 한국인에게는 단순히 논밭뷰인데 서양 여행객들이 보기엔 독특한 광경이라 하나의 관광지가 된다.
논두렁 한 가운데 위치한 리조트가 발리에선 고급 숙박 시설이다
수많은 비치클럽이 놀이동산을 대신하고, 동양인이 기피하는 햇빛이 섬 전체에 가득하다. 전부 서양인의 시각으로 볼 때 새롭지 한국인 입장에서 다른 동남아 휴양지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풍경이다.
우붓의 유명한 트래킹코스 짬뿌한 릿지 워크
하지만 바다로 나가 사롱을 돗자리처럼 펴놓고, 나무 아래 그늘에서 책이나 읽고 하품이 나오면 엎드려 잠드는 건 누가 해도 즐거운 일이다. 밥 먹다 식당 벽에 기어가는 도마뱀과 눈치 마주치면 한 템포 쉬어가도 좋다.
발리에선 이런 깡패한테 숙소를 습격 당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발리는 뭘 해서 즐거운 곳이 아니라 뭘 안 해서 즐거운 곳이다. 어렵게 관광지를 찾아다닐 게 아니라 드넓은 발리에서 취향에 맞는 동네 하나를 찾아 숙소를 구하고, 서핑이든 요가든 하고 싶은 걸 질릴 때까지 하면 그게 여행의 완성이다. 실제로 발리에서는 논에 가도, 들에 가도, 바다에 가도, 절벽에 가도 다들 맥주 한 잔 놓고 하염없이 수영만 하고 수다만 떨고 있다.
달리 볼 게 없으니 노을이 필수라고 하며 각자의 나라에서도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을 보며 여기가 특별하다는 집단 암시에 걸린다.
그리고 착각이 행복을 부른다. 해가 지면 아직도 퇴근 못 한 나에게 화가 나던 사람들이 같은 해를 보고 아름답다고 외치고 있다. 발리의 일몰은 그것으로 역할을 다한다.
랍스터를 뜯으며 바라 보는 일몰
사실 발리는 호불호가 강하게 갈린다. 장단점이 극명해서 유난히 그렇다.
일단 발리의 가장 큰 문제는 교통체증이다. 겨우 섬 하나인데 길이 많은 것도 아니고 넓은 것도 아니고 평탄한 것도 아니라 한 번 막히면 섬 전체가 막힌다. 비행기 타고 오가는 길이 더럽게 멀어서 고생하는데 가서도 트래픽잼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택시 타고 1km를 가는 데 45분이 걸리면 그때부터 욕이 나올 수 있다. 눈앞에 목적지가 보이는데 택시 기사가 이제부터 내려서 걸으라고 하는 곳이 발리다.
어쩌면 발리가 단기여행자보다 장기여행자에게 인기 있는 이유가 교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식으로 관광지 하루 정복이 불가능해서 여기서 일주일 저기서 열흘을 머물며 숨만 쉬다 오는 게 발리의 묘미니까.
온갖 특이하고, 크고, 예쁜 카페 돌아다니는 것이 발리의 일상
여행은 오묘한 것이라 단지 기후가 다른 곳에 있다는 이유만을 일상에서 하던 모든 행동을 특별하게 만든다. 발리는 많은 사람들이 특별하게 여기는 곳이고, 그 기운이 모여 특별히 특별한 곳으로 만든다. 좋다고 생각하면 발에 채이는 짜낭사리처럼 기쁜 순간이 툭툭 걸린다.
발리 사람들이 신들에게 바치는 공물 짜낭사리
나는 아직도 발리가 특출 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옆에 발리에서 사 온 과자 한 봉지를 뜯지 못하고 굴비처럼 바라보고 있을 정도로 미련이 있다. 그곳이기에 느낀 것들이 있었고, 다시 갈 생각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하려는 건 발리가 특별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발리에서 한 달을 잘 놀고 왔다는 주절거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