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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Oct 21. 2024

발리에 스며들기까지

여행자답게 여행하기

라운지에서 n잔.

비행기에서 n잔.

도합 n잔의 술을 마셨더니 발리에 도착했다.

가장 정신 차려야 하는 순간에 조금은 흐트러져 방심하고 있던 것이다. 발리는 어디까지나 남의 나라고 이방인은 할 일이 있는데 말이다.

관광세 도입부터 비자까지 뭐 그렇게 미리 준비할 게 많던지. 가기 전부터 그 절차들이 귀찮아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다 포기하고 무턱대고 발리에 발을 들였다.

라운지 칵테일을 시작으로 술을 좀 마셨다

덕분에 사전에 모든 준비를 마친 한국인들 사이에서 혼자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허덕였다. 저녁 비행기에서 연거푸 마신 술과 기내식, 참지 못해 먹은 라면까지 각종 음식으로 배는 부르니 몸은 둔했다. atm에서 현금을 뽑느라 고생하고, 공항 앞 호텔로 가는 순간이 그냥 피곤했다. 호텔 입구는 왜 그렇게 찾기가 힘들던지.

덥고 습한 날씨 속에서 보이는 건 아직 공항 건물뿐. 누가 공항에 도착만 해도 설레고 기쁘다고 했는가. 일단 그게 내가 아닌 건 확실했다. 나는 그냥 피곤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마법같이 실감 나지 않느냐고?

발리 공항

아니. 나는 공항과 연결된 호텔에서 하루를 잤고 다음 날도 여전히 공항이었다. 엄연히 말하면 발리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고, 아직 이른바 발리다운 풍경은 눈에 담지 못했다.

게다가 야행성인 나는 비행기에서부터 내내 깨어있었다. 픽업 차량 시간을 맞추기 위해 잠은 두어 시간밖에 못 잔 상황에서 꾸역꾸역 조식을 먹었다. 우붓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휴게소도 없는 도로에 두 시간을 갇혀야 했기에 그 좋아하는 커피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다. 카페인 중독자가 커피를 못 마신다는 건 아주 큰 일이다. 그건 정말 최악이다.

신과 교통체증이 공존하는 곳이 발리

간신히 호텔에서 나와 이동을 시작했다. 도로 한복판에 있는 신들의 조각상을 보니 이제 좀 다른 나라에 온 것 같다. 하지만 신기한 건 잠시. 우붓으로 가려니 길이 막힌다. 너무 막힌다. 가장 발리다운 풍경, 바로 교통체증을 보게 된 것이다.

주차장과 도로가 동의어로 쓰이는 발리

이쯤 되니 이상하다. 발리 되게 좋다고 했는데 언제 좋아지지?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기 전, 난 그저 피곤했다. 발리의 첫인상, 솔직히 좀 지겨웠다.

이쯤 되니 궁금하다. 발리는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내가 발리에 무료함을 느끼는 동안 발리는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지 궁금했다.

발리에 도착해서 처음 만난 건 비행기 앞에서 청소를 위해 기다리던 직원들이었다. 그다음은 공항 출입국 관리 직원, 호텔 직원, 차량 운전기사. 온통 여행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내가 지쳐가던 시간이 그들에겐 일상이었겠지.

발리 호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수건 아트

그들이 내가 처음 만난 발리다. 그리고 그들 이외에 다른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섬 전체가 하나의 관광지인 발리에서 내가 현지인의 생활을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광객용 호텔과 식당에 다녔고, 현지인의 삶은 여행과 분리되어 있으니까.

내가 만난 발리 사람들은 온통 어딘가의 직원이고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었다. 발리 사람이 친절하다는 건 익히 들었는데 서비스업 종사자의 친절이 어떻게 온전한 친절이겠는가.


발리에서 지낸 한 달.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난 발리를 찾는 무수한 여행자 중 한 명일뿐 발리에 나를 보여줄 기회는 얻지 못했다. 실제로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눈다 해도 발리어를 할 줄 모르는 내가 무슨 수로 그들의 내면을 이해하고 친구가 되겠는가. 그들은 신의 말도 못 쓰는 사람과 친구가 되지 않을 자유가 있다.

현지인의 나시짬뿌르와 관광객의 나시짬뿌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생각했다. 그냥 철저한 여행자가 되자고. 어차피 난 이방인이니 그저 조용히 지내자고 생각했다. 이 아름다운 섬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자고. 여기서 남기는 추억까지 모조리 주워 담아 한국으로 가져가자고. 위선은 벗고 여행자답게 살자고 생각한 순간부터 발리가 보였던 것 같다.

착각하지 말아야한다. 나는 여행객이기 때문에 어딜 가도 웰컴 환영을 받는 것이다. 잠깐 지내다 떠나는 게 나를 환영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그들이 친 벽을 기어코 부술 필요가 없다. 여행자에게 허락된 테두리 안에서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어느 외국인이 내 집에 찾아와 한 사흘 정도 친하게 지내자고 한다면 극 내향인인 나는 좀 무서울 것 같다.

웰컴은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특전이니 즐기도록 하자

진상 외국인으로 찍히지 않고 곱게 잊혀지는게 가장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내가 한 달 만에 발리를 전부 알 수 없다. 발리 또한 내가 너무 내밀한 면까지 알기를 바라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발리의 아름다움만 안고 가기로 했다.

관광객이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나의 세상은, 나의 발리는 한없이 아름다워진다.

차가 막혀도 한국 돌아가면 안 그럴 테니 웃어넘기고,

날이 더워도 한국 돌아가면 겨울을 만날 테니 즐겨버리고,

벌레와 쥐가 나와도 한국 돌아가면 없을 테니 신기하게 보고 지나가고,

그냥 거기 있는 햇빛 물 공기가 전부 한 순간의 느낌으로 끝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부터 이 여행을 사랑하게 됐다.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게 내 일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나는 여행을 정말 여행으로만 대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난 발리에서 지낸 순간이 가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발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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