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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Oct 28. 2024

발리는 발리가 아니다

발리의 다양함

발리에 오는 사람들이 하는 가장 큰 착각이 뭘까?

바로 발리의 규모일 테다.

발리는 결코 작은 섬이 아니다. 제주도의 n배 크기다 이런 실측적인 관점 문제가 아니다.

물론 실제 크기가 크기도 하지만 발리의 교통 사정 때문에 1km를 가는데 차로 1시간이 넘게 걸릴 수도 있는 곳이 발리다(과장이 1도 섞이지 않은 말이다).


게다가 이 화산섬은 아주 다양한 기후와 식생을 자랑한다. 남부에서 더위 먹고 탈수 증세를 보이다 북쪽 정글 지대로 가면 으슬으슬 떨며 겉옷을 찾게 되는 곳이 발리다(실화다).


모순이지만 이게 사람들이 발리에 오래 머물고, 다시 오는 이유 같다.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이 작은 섬에 3개국 이상의 모습이 보이니까. 실제로 지역을 옮길 때 국경을 넘는 것 같은 고비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것은 발리에서 돌아다닌 몇몇 지역에 대한 보고서다.



1. 꾸따
튜토리얼.

꾸따는 온화한 표정으로 발리니즈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발리에 오신 걸 환영하오, 여행자여. 여기 웰컴드링크가 있소.

꾸따는 그렇게 나와 당신을 처음으로 ‘웰컴’하는 발리의 관문이자 시작점이다. ‘공항에서 내려 발리로 들어간다’라고 말할 때 그 발리가 꾸따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꾸따는 비치워크를 중심으로 바다와 근방의 호텔을 묶어 부르는 명칭이다.

꾸따 쉐라톤 호텔의 웰컴 드링크, 웰컴 초코, 웰컴 푸드
웰컨 케이크에 웰컴 아이스크림까지 아주 그냥 온 꾸따가 나를 웰컴한다

발리 관광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개발된 전통 있는 지역이기에 아직도 대부분의 여행자가 이곳에서 일정을 시작한다. 공항, 호텔, 쇼핑몰 등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으니 당연하다. 유명하고 오래된 월드체인 호텔들도 많이 모여 있고, 새로 생기기도 하는 지역인 만큼 시설이 노후화된 경향이 있다. 물가도 다소 비싸다.

꾸따가 유명한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꾸따는 서퍼들의 성지다. 파도가 좋아 초보자들이 서핑을 배우기 적당하다. 물론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서핑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 천국이란 이름이 붙은 결정적인 이유일 테다. 바다 옆에 수두룩한 파라솔이 전부 초보 서퍼들에게 과금을 유도하는 엔피씨라고 할 수 있다.

아라비카 커피 등 핫플이 한국보다 먼저 자리 잡는 곳이기도 하다

반대로 말하면 서핑을 하지 않으면 할 일이 없는 곳이다. 바다를 보며 멍때리는 걸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문제없지만 성미 급한 한국인들에겐 꾸따 자체에서 뭔가 할 일은 없고 위치 때문에 여러 투어를 나가는 본거지가 되는 지역이다. 물론 아무것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여행자들이 지나가기 싫어도 지나가야 하는 땅이기에 오히려 기본적인 인프라는 가장 잘 갖춰져 있다. 게임에서 초보자 마을에서 모든 기초 아이템을 팔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비치워크와 같은 대형 쇼핑몰이 몇 개 있지만 매일 다채로운 쇼핑을 하기엔 부족하다. 맛집, 카페, 비치클럽, 마사지 등등을 즐기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기엔 가장 좋은 장소다.

비치워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교통 지옥 발리에서도 가장 심각한 지역

발리 레벨 0인 당신이 아이템을 구비하고, 기초 지식을 습득해서 더 큰 마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그곳이 꾸따다.


2. 스미냑 / 르기안 / 짱구
“누려.”

흔히 발리의 청담동, 홍대 등등으로 불리는 지역들이다.

스미냑과 르기안에는 돈 들인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상점이 즐비하고, 신생 관광 지역 짱구에는 센스 첨가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맛집과 숙소가 많다.

느낌 좋은 스타벅스 데와타 지점 / 시그니처 데와타라떼(프렌차이즈가 시그니처 메뉴를 내놓는 곳이 여기)

스미냑과 르기안은 꾸따 바로 위로 연결된다. 발리 서쪽 바다이니 사실상 같은 지역이다. 홍대라고 말할 때 홍대가 홍대, 합정, 상수를 통틀어 말하기도 하듯이 이곳에서 맛집을 찾으면 지역 구분이 의미가 없다. 걷다가 문득 지도를 보면 지역을 넘어간다. 그 말은 이 지역들도 꽤 오래된 관광지라 좋지만 오래된 호텔과 리조트가 많다는 뜻이다.

플리마켓이나 쿠킹클래스 등이 있는데 다른 지역보다 이곳에서 하는게 좀 더 비싸다

짱구는 정반대로 새로 뜨는 지역이다. 꾸따에서 북쪽으로 한참을 지나면(사실 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발리 교통으로는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 푸릇한 논이 시작된다. 그리고 농작물 사이에 있다기엔 생경한 세련된 상점이 하나씩 보인다. ‘아니 뭐 이런 데 이런 데가 있어?’ 소리 나오는 곳이 짱구다. 에어비앤비에서 깨끗한 인스타 감성 숙소가 보이면 주로 여기다.

1시간 걸려서 밥만 먹고 돌아와야 했던 짱구, 그 유명한 센소리움 나도 먹었다

발리의 모든 지역이 코로나 때문에 죽어갈 때 짱구만 멀쩡했다는 말이 있다. 단순 여행이 아니라 장기 거주에 가까운 외국인들이 많아서란다. 그만큼 외국인(특히 서양인)이 기대하는 판타지적 요소를 츙족시키는 동네가 짱구 같다.

센소리움에서 제일 맛있는 거 음료라는 말 왜 사실?

그러나 떠오르는, 신생 등등의 수식어가 붙는 동네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교통. 이곳에서 활발히 돌아다니려면 오토바이가 필요하기에 나는 밥 한 끼 먹고 돌아오는 걸로 짱구 여행을 끝냈다. 사실 너무 젊은 여행지는 내 취향이 아니기에.


3. 남부
“한국인은 관광 필요하지? 여기야.”

발리는 관광지다.

루브르 같은 박물관이나 바티칸 성당 같은 역사적인 유적물은 없어도 관광지라면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래서 있는 게 남부다.

남쪽엔 울루와뚜 사원을 비롯해 각종 관광 거리가 있다. 하지만 쉽게 보여준다는 뜻은 아니다. 대중교통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발리에선 가이드와 운전기사를 낀 투어가 필수다. 오토바이 운전을 못 한다면 대부분 남부투어라고 말하는 코스로 다니게 된다. 발리의 무더위와 싸우며 하루 돌아다니면 탈진 증세와 함께 ‘나 발리 와봤다’라고 말할 수 있는 증명사진 몇 개를 건지게 된다.


사실 이 코스는 발리에 일주일 이하로 머물고 가는 한국인들에게 맞춰 특화된 코스 같은데 요즘은 장기 여행객이 늘고, 오래된 여행지이다 보니 다양한 코스도 많이 개발되었다.

예전엔 유명하지 않았던 동쪽의 누사페니다도 최근엔 필수 관광 코스로 들어간다.

새벽부터 출발하는 빡쎈 누사페니다 투어에서 볼 수 있는 장면


4. 우붓
“나야, 발리.”

사실 내가 생각한 발리는 우붓이었다. 휴양지 필수 조건인 바다에서 일부러 멀리 떨어져 안으로, 내륙으로 들어가고서야 닿는 그곳이 말이다.

서양인들이 좋아 죽는 라이스테라스

태양이 작열하는 이국의 바다는 간데없고 뜬금없이 정글이 시작되는 곳에 우붓이 있다. 높은 지대에 있고 나무가 우거진 곳이라 날씨가 시원하다 보니 장기 여행객도 많은 곳이다.

사실 우붓이 좋은 건 날씨가 90% 이상의 이유를 차지한다

관광자원으로는 유명한 사원 몇 개가 근처에 있지만 이 또한 오토바이가 없다면 가이드를 낀 투어가 필수다. 몽키 포레스트가 유명하지만 동물이 싫으면 극심한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다. 입장권 안 내고 들어가도 주변에 가서 뛰면 사방에서 원숭이가 같이 뛰어다닌다. 요즘엔 지프투어도 반쯤은 필수 코스가 된 것 같다.

몽키 포레스트 주변에선 원숭이가 참새 대신 전기줄을 탄다

사실 동부투어 정도를 제외하면 관광이 아니라 그냥 요가와 명상, 트레킹, 디지털 노마드 생활로 시간을 보내는 게 우붓라이프의 정석이다. 예술가의 마을이란 말처럼 곳곳에서 갑자기 '뿅'하고 아름다운 곳이 나온다.

우붓에선 갑자기 뭔가 볼거리가 등장한다

한국인에게 우붓이 환상적인 이미지로 박혀 있는 건 이른바 발리스윙으로 불리는 그네 때문이다. 논뷰 카페와 데이클럽에서 야자수 사이에서 그네를 타며 드레스를 휘날리는 인증샷, 바로 그것.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보니 생각 같지 않다. 무섭다.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는 한국의 여성들이 얼마나 강인한 이들인지 알게 되었다.

데이클럽도 좋지만 트래킹 코스도 참 좋은 우붓

우붓이 최고로 기억되는 건 완벽한 날씨와 나까지 싹트게 만드는 울창한 숲이 주는 기묘한 경치 때문 같다.


5. 길리
러블리 & 판타지

길리에 가기 전까지는 그토록 아름다운 세계를 보지 못했다. 약간의 과장은 섞였지만 그만큼 특별했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가 아니라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자동차가 없다는 단 한가지 사실이 그렇게 큰 차이를 만들 줄이야.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는 시간부터 이미 길리가 좋았다

사실 길리는 엄연히 말하면 발리가 아니다. 인도네시아의 섬 중 하나고, 위치가 발리에서 가까워서 묶어서 많이 가는 것뿐이다. 공항이 없는 작은 섬이기에 발리 공항이 길리의 관문도 되는 것이다. 심지어 길리는 ‘섬’이란 뜻이고 흔히 길리라고 말하는 곳은 길리 트라왕완이라는 작은 섬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작아지는 규모의 섬. 그곳이 전세계 관광객을 흡수할 정도로 특별한 건 바로 자동차가 없다는 점 때문이다.

발리의 길에는 차도 오토바이도 아닌 자전거와 마차가 줄 지어 서 있다

걸어서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섬에서 돌아다니는 건 자전거와 마차다. 발리의 엄청난 교통량에 넋이 나가 있다가 길리에 들어가면 감회가 남다르다. 포근하다. 폭신하다. 섬이 나를 다독이는 느낌이 든다.

고양이가 낮잠을 자는 포근함이 내가 기억하는 길리

낮에는 수영복을 입고 덜렁덜렁 나가서 바다에 빠진다. 투어 업체 없이 혼자 나가서 팔다리를 휘저으면 옆으로 거북이가 지나간다. 바다 아래 또 다른 세상이 들려주는 소리가 그렇게 아름답다. 밤에는 방음이 안 되는 숙소에 누워 지나가는 마차 소리를 듣는다. 밖에서 들어오는 소음을 느끼고 있노라면 섬 전체가 들려주는 ASMR에 빠져 잠들게 된다.

내 허접한 수영 실력으로도 바다에 들어가면 거북이를 볼 수 있다

길리는 내가 가본 여행지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 곳이다.

길리의 모든 시간이 좋았따


발리는 지역별로 정말 많이 다른 곳이다. 이쪽에서 절벽을 보며 놀라다 저쪽에서 화산을 보며 우왕좌왕하는 곳이다.

그러니 발리라고 말할 때 ‘발리’가 다 같은 발리는 아닐 것이다. 나의 발리가 어디인지는 한 달을 돌아본 지금도 모르겠다.

사실 내 한 달을 한 달 살기라고 부르기 꺼려지는 이유도 이것이다. 한 곳에서 진득하게 한 달을 보내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너무 다른 곳을 다녀서 살아봤다고 말하기엔 민망하다.그래서 나는 나의 발리가 어느 발리인지 알기 위해 다시 떠나고 싶다.

바다에 사롱을 깔고 책 보며 시간을 보내는 그 순간이 발리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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