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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Nov 18. 2024

발리에 집을 지었다

발리 한 달 여행 숙소들

어딘가에서 한 달을 살아야 한다면?

당신은 당연히 ‘어디서’ 잘까를 고민하게 된다.

여행은 그렇다.

끝없이 어디서 잘까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 여행이다.

집 없이 떠돌겠다고 나가는 주제에 지붕을 찾아다닌다.

인간은 가장 짐승에 가깝던 구석기 시대에도 동굴이라도 있어야 잠을 자고 생활을 하던 존재이기에.

나 또한 커다란 배낭이라는 살림을 이고 지고 다니며 여러 집을 전전했다.

그럴 때면 여행과 피난이 뭐가 다른가 싶다.

총칼은 날아다니지 않아도 당장 내가 주도적으로 계획을 짜서 무언가 하지 않으면 잠자리 하나 보장되지 않는다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건 똑같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다고 내 인생이 평화로운 것도 아니다.

내 집 마련이 성공의 척도인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결혼도 하지 않고 내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사랑한다는 건 상당한 전투력이 필요한 행위이기에.

아무튼 나는 나를 성가시게 만드는 일상에서 떠났고, 몸을 뉘일 곳이 필요했다.

침대가 가장 맘에 들었던 발리 알로프트 꾸따 호텔

발리에서 호텔을 구한다는 건 상당히 난해한 일이다.

호텔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섬인 만큼 호텔, 리조트, 게스트하우스 등등 너무 많은 형태의 숙소가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9개의 숙소에 머물렀다.

길리에서 지낸 숙소

보통 발리에 간다고 하면 고급스러운 풀빌라를 떠올리겠지만 내겐 한 달 내내 풀빌라를 전전할 돈이 없었다.

그 결과 아주 다양한 형태의 숙소를 경험했다.

한 달은 아주 여러 밤이고 내겐 어디에서나 잘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기에.

이렇게 매일 같이 숙소를 바꾸며 다니다보면 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행이 그렇다.

여행이란 이름의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호텔, 노숙을 경험할수록 역설적으로 집을 떠올리게 된다.


집이란 뭘까?

호텔은 집이 될 수 있을까?


집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다.

이 뜻에 의하면 발리에서 내 집은 호텔이었다.

(물론 호텔, 에어비앤비 등 내가 거친 모든 숙박 시설을 통틀어 말한다.)

사실 호텔은 집과 상당히 반대에 있는 거리감 있는 단어다.

집을 벗어났을 때 이용하는 게 호텔이니까.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집은 있었지만 주택은 없는 생활을 했다.

수영장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아름다운 르네상스 울루와뚜 리조트(발리에서 머문 숙소 중 제일 비싼 곳이었다)

어쩌면 내가 호텔을 집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건 한국에도 집이 없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집과 (내가 결혼하여 꾸린)가정이 없기에 그것이 주는 안락함을 이해하지 못해서.

확실히 가족이 생기면 여행이 힘들어지고, 그 이유 중 하나가 숙박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있으면 호텔을 고를 때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으니까.

반면 나는 숙소를 정할 때 거리낄 게 없다.

아직은 때때로 노숙이나 야간 버스에서 하룻밤을 때우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 여행 중에도 다양한 형태의 집을 체험했다.

르네상스 울루와뚜/포포인츠 꾸따

운전기사가 내려주다 감탄하던 5성급 고급 리조트부터 두 명이 지낸다면 좁았을 호텔, 에어비앤비로 구한 하루 만 원대의 게스트하우스까지.

긴 시간, 혼자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형태의 주거 체험을 한 셈이다.

체험 결과, 발리엔 참 좋은 숙소가 많았다.

세계 각국의 호텔 체인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곳이니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참 미묘한 건 5성급 호텔이 아닌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낼 때가 집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우붓의 숙소는 강아지 세 마리가 뛰어놀고 마당에서 빨래와 꽃을 말리는 그런 게스트하우스였다.

1층에선 주인 가족이 살고 엘리베이터 없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던 그런 집 말이다.

우붓 게스트하우스 주인 집 댕댕이들
방 테라스에 고양이가 찾아오는 그런 집이었다

집주인은 발리 사람, 옆 방은 일본인이었던 그곳에서 나는 참 평안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뭐 하나 한국 내 집과 공통점 없던 그곳에서 왜 그렇게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참 모를 일이다.

우붓 게스트하우스 테라스에 누워서 본 풍경

그렇게 평온한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문득 메일함을 정리하다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나를 평가한 말을 보았다. 좋은 손님이었다는 의례적이고 간결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호텔에서 자신들을 평가해달라는 메일만 받다가 내가 평가당하는 입장이 되어보는 건 기묘한 체험이었다.

그들도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우붓 숙소 계단과 주변 풍경

메시지를 받고서야 호텔이 집이 없는 이유를 알았다.

호텔은 내가 다녀간 흔적을 최대한 깨끗하게 지우고 치운다. 흔적이 남지 않는 곳은 집이 아니다. 하지만 집주인이 무엇 하나라도 나를 기억해 주고 그들의 기억에 나를 담아주는 순간이 있다면 그곳은 집이 된다.

물론 호텔에서도 이따금 직원이 내게 걸었던 스몰토크가 기억에 남는 곳들이 있다. 그런 호텔은 기억 속에 작은 집으로 남는다.

풀빌라보다 작은 게스트하우스의 강아지들이 좋았다

발리 호텔의 직원들은 서비스직 특유의 가짜 친절일지라도 내게 끝없이 스몰토크를 걸고 나에게 자신들의 호텔을 기억에 남긴다. 내 여행 일정을 물어보고 언제 떠나는지 오늘 하루 무얼 하며 보냈는지 묻는 말들이 호텔을 하우스로 바꿔 간다.

상호작용이 있어야 그 호텔이 좋게 기억에 남는다는 걸 나보다 더 잘 아는 것이다.

호텔이 좋다=내 흔적을 잘 지운다

그래서 발리에서 지낸 숙소들은 대부분 집으로 기억된다.

언젠가 갔던 여행지 발리가 아닌, 언젠가 또 가게 될 여행지 발리가 된 것이다.

여행 중엔 비행기, 하늘 위도 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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