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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Jun 29. 2017

꽃 찾으러 왔단다, 제주에

10만원으로 떠난 제주 여름꽃 여행

여행이라 제목을 붙이긴 짧은 한나절, 당일치기로 제주에 다녀왔다.

생각나는 대로 갑자기 떠난 길이라 돈을 안 들이는 게 제일 큰 목표였다.

그래서 제목도 10만원으로 제주 가기로 적었다가 너무 선정적이라 슬쩍 부제목으로 내렸다.

제일 싼 비행기를 찾다 보니 새벽같이 출발하게 되어 아직 어두운 기가 하늘에 남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남쪽나라 제주엔 여름이 조금 더 빨리 찾아왔고 각종 여름꽃들이 피어나 있었다.

그중 3개의 꽃을 찾아 제주를 돌아봤다.



#1. 보롬왓의 라벤더


드라마 도깨비 촬영장소였다는 '보롬왓'.

보롬=바람, 왓=밭.

바람 부는 밭이란 뜻이란다.

지극히 제주다운 낭만이 느껴지는 이름이다.

원래는 메밀밭이 펼쳐져 있어야 하지만 이미 철이 끝나서 메밀꽃 대신 라벤더가 허전함을 채우고 있었다.

이효석의 모밀꽃필무렵으로 시작해서 드라마 도깨비가 완성시킨 하얀 꽃들을 보고 싶었지만 내년을 기대할 수밖에...

충혼묘지 정류장에 내려 길을 따라가니 묘역이 보이고, 표지판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니 보롬왓 카페가 보인다
원래는 메밀꽃을 봐야 진가를 느끼겠지만 이미 메밀밭과 보리밭엔 흙만 보이는 상황

라벤더 밭은 메밀이 사라진 허전함을 채우기엔 사실 좀 작다.

은근한 보랏빛의 라벤더는 꽃이 크거나 색채가 짙은 꽃도 아니라 밭이 더 작아 보이는 탓도 있다.

그래도 사람이 거의 없는 이른 오전에 찾아서 사진에 걸리는 사람이 없어서 꽤 넓어 보이는 사진이 몇 장 나왔다.

라벤더 밭을 보니 후라노 생각도 나고 즐겁다.

도깨비신부는 포기해야했으나 대신 라벤더밭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실제로는 더 예뻤지만 날이 워낙 흐려 사진은 영 좋지 못하다.

그래도 여기저기 포토존을 만들어두고 화분 만들기 체험장까지 갖춘 모양새가 퍽 귀엽다.

카페 앞 잔디밭과 라벤더 밭 앞의 테이블과 의자, 곰돌이 등등.

작은 밭을 대신할 포토존들이 제법 있다.

다들 삼각대와 셀카봉을 들고 라벤더 밭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하지만 보롬 왓의 진가는 라벤더 밭이 아닌 수국 길이다.

썰렁한 메밀밭 사이에 있는 수상한 입구를 지나면 비밀의 정원이 등장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국 길은 정말 예뻤다.

비 때문에 날는 안 좋지만 수국을 보기엔 비 오는 날이 제격이다.

이름부터 물이 가득한 수국은 물이 있어야 피고, 비가 와야 생기가 돈다.

제주에 수국을 볼 수 있는 길이 꽤 있는데 대부분은 차도 근처다.

하지만 차는 커녕 자전거 한대나 겨우 지나갈 이 오솔길은 오가는 차 걱정 없이 즐기기 좋다.

탐스런 수국 중엔 사람 얼굴보다 큰 덩어리도 있다
보롬왓 카페 뒤에 마련된 화분만들기 체험장



#2. 사려니숲(비자림로)의 산수국


원래 수국은 사려니숲에서 보려 했는데 티저로 생각했던 보롬왓의 수국 길이 너무 강했다.

하지만 산수국은 또 다를 것이라 생각하며 사려니숲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내리고 있다.

숲이라 나무 사이로 걸으면 우산 없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슬쩍.

하지만 사려니숲은 비가 좀 와야 예쁜 장소 중 하나다.

약간 비가오면서 안개가 낀 사려니숲은 예쁘지만 폭우가 오면 입산이 통제되니 우산없이 갈수있는 이정도가  좋다

하지만 이 예쁜 숲을 담기엔 핸드폰 카메라는 부족하다.

실제로는 햇빛과 안개가 절묘하게 만나 빛나는듯한 분위기가 나오는데 사진으론 그냥 뿌옇고 흐리게 보인다.

그리고 생각보다 수국이 많이 없다.

오히려 버스정류장에서 입구까지가 수국이 많고 정작 산책로에는 수국이 적다.

하지만 듬성듬성 핀 모양새가 자연스러워서 좋다.

작정하고 꾸민 꽃밭에선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묻어난다.

보롬왓의 수국길이 포토존 느낌이라면 사려니숲의 산수국은 산책길에 스치는 강아지 같은 반가운 느낌이다.

산수국이 따로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수국이라면 특유의 둥근 공 모양을 떠올렸는데 산수국은 전혀 다르다.

지나가며 라벤더로 오해하고 가시는 분들도 있었다.

보통 알고 있는 수국이 부케 같다면 산수국은 부케를 든 신부의 머리에 나비장식 같다.

수국들은 하얀 드레스 하나만 가지고 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을 맞는 신부처럼 파스텔톤의 은은한 색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아는 꽃들이다.

둘 다 장미같은 강렬함 없이 안개꽃처럼 주변과 자신을 조화롭게 살아간다.

날 봐달라는 억지스러운 미가 아닌 남들이 먼저 속으로 우아하다고 느낄만한 그런 품위가 있다.

수국의 빛깔은 땅을 닮는다던데 이렇게 부드러운 꽃들이 피는 것을 보니 제주는 참 온화한 땅이다.

산수국들은 숲에 가득한 향기 속에서 제 모양을 뽐낸다.


홀짝홀짝 비가 오고 나뭇잎에 쌓여 무거워진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비처럼 내리고

그런 일을 몇 차례 겪다 중간에 길을 꺾었다.

시간과 체력이 조금 더 있으면 10km 산책코스를 끝까지 가도 좋겠지만 그건 나중에 해야겠다.

얄궂게도 산책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으니 해가 든다.

맑아진 건 아니지만 딱 내가 숲을 걷는 동안만 비가 뿌렸다.



#3. 김경숙해바라기농장의 해바라기


제주에서 찾은 3번째 여름꽃은 해바라기다.

여름 원피스엔 어울리지만 겨울 원피스에 프린트되어 있으면 어색할 꽃 해바라기.

수국만큼이나 이름에 정체성을 담은 꽃이다.

수국이 빗속에 있어야 매력이 더해지는 꽃이라면 해바라기는 날이 쨍할수록 활력이 넘치는 꽃이다.

비가 예보된 하늘이 못내 아쉽지만 해바라기농장을 찾아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길을 걷다보면 해맑은 해바라기 간판이 보인다.
농장의 주차장과 입구

사실 여기까지 온건 무료입장인 이유가 컸는데 올해부터는 입장료가 생겼다.

농산물교환권이란 이름으로 3000원을 받는다.

농장에선 아이스크림, 육포 등을 팔고 있는데 나중에 이 입장권을 쿠폰처럼 써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다.

물론 잘 가꿔진 사유지에서 사진 찍고 즐겁게 놀다가는 것이기에 흔쾌히 입장료를 냈지만 제주 각지의 유채꽃밭들이 1000원 정도의 입장료를 받는 걸 생각하면 아주 싼 금액은 아닌 것 같다.

원래 입장료라고 생각하고 아이스크림 하나쯤 먹을 생각이긴 했지만 무료인 줄 알고 왔다가 돈을 내게 되니 좀 이상했달까.

농장이라 아주 많은 해바라기를 상상했는데 생각보다는 규모가 많이 작았다.

구름다리 아래로 희미하게 보이는 해바라기가 거의 전부다.

아무래도 한 번에 모든 밭에 꽃을 피우지 않고 일정 부분의 밭을 돌려가며 심어야 오래 꽃을 보기 때문인 것 같다.

해바라기 밭 전체가 나온 사진은 꽤 예쁘게 잘 찍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찍혀서 올리기가 좀 그렇다.

웨딩촬영 중인 중국인 부부, 가족, 커플 등 많은 사람들이 작은 꽃밭에 올망졸망 다 나와버렸다.

해가 없어서인지 풀죽어 보이는 해바라기들

잘 정리된 꽃밭은 참 예쁘다.

일부러 찾아오기엔 제주도에 무료로 볼 수 있는 해바라기 밭이 몇 군데 더 있는 것 같고 그냥 근처를 지나는데 날이 너무 맑아서 해바라기 밭을 보기 딱 좋은 순간이다 싶을 때 가면 좋은 곳이다.

입장권으로 낸 3000원에 1000원을 더해서 40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솔직히 생우유아이스크림을 먹다 먹어었더니 별 맛은 없었지만 차가운 당분이 필요한 순간에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먹었더니 기분은 좋다.



# 제주 여름 꽃을 따라간 뚜벅이 하루 코스
-제주공항 - 보롬왓 - 사려니숲(비자림로) - 김경숙해바라기농장 - 공항

# 경비
비행기표 왕복 : 86200원
김경숙해바라기농장 입장료 : 3000원
해바라기씨 아이스크림 : 4000원(농산물이용권 -3000)
버스요금 : 기본요금 1300 ×4번 이용(교통카드로 결제해서 정확히는 모르겠고 아마 몇백 원쯤은 더 들었을 듯)


여기에 밥값을 더하면 딱 10만원에 다녀온 셈이다.

여행은 날을 길게 잡아 최대한 여유롭게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제주가 많이 가까워져서 요즘은 당일로 등산다니는 사람도 많더라.

나도 저가항공 덕에 비행기표가 싸지고 거리가 가까워져서 가끔 제주가 너무 그리우면 당일여행을 다닌다.

요즘은 우동먹으러 일본 갔다 온단 말이 농담이 아닌 때라 그런 일이 가능하다.


내가 처음 제주에 갔던 건 중문에 롯데호텔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제주는 거리는 똑같지만 지금 보다 많이 멀었다.

유커란 말도 없었고, 지금 해외여행을 대하듯 제주도를 생각하던 시절.

내가 제주 여행이 보다 귀한 것이던 시절에 제주를 여행해본 마지막 세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굉장히 늙어 보이는데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에 제주에 첫 방문을 했다.

그래서 처음 제주를 본 추억은 나 대신 카메라가 가졌고 나는 초등학교 이후의 제주를 기억한다.

그때를 기억하면 제주에 절대 어울리지 않을 상업화란 말이 들어찬 현재가 좀 아쉽지만 그것이 제주 도민만큼은 아닐 것이기에 일단 그 이야기는 접기로 한다.

나도 제주를 많이 가본 사람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만 해도 내가 제주에서 꽃밭이나 찾으러 다닐 줄은 몰랐다.

지금은 유명 관광지는 관광버스 수십대가 다니고 정말 작은 카페까지도 소문이 나서 웨이팅이 있는 상상 못 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1년에도 몇 번씩 찾는 사람들을 위해 갈 때마다 새로운 스폿이 생긴다.

올해 초에도 친구들과 제주를 찾았었는데 그때만 해도 없거나 몰랐던 곳들을 몇 달 만에 알게 되었다.

익숙해지는 만큼 새로운 섬 제주.

다음엔 또 어딜 가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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