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느끼는 과정
나폴레옹도 극찬한 광장에서,
매일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닌
크레마가 묻어나는 에스프레소가 목을 지나가니 비로소 이탈리아가 느껴진다.
카타르 항공은 새벽에 떠난다.
느지막한 시간에 찾은 인천공항은 극성수기 직전임에도 밤 특유의 차분함이 있었다.
아마도 면세점이 문을 닫았기 때문.
그런 와중에 공항에 일찍 도착했고 면세점 대신 면세구역 한 층 위를 탐험해야 했다.
라운지에 들리고 구석에 있는 수면실에서 잠시 수면시간도 보냈다.
수면실엔 이미 많은 환승객들이 있었고, 아직 밤샘이 낯선 중2짜리 동생은 그 틈에서 잠들었다.
야행성인 나는 수면실과 옆의 명상실, 박물관 사이에서 방황했다.
문 닫은 하이네켄바 옆에서 입맛을 다시다 보니 보딩시간이 되었고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 배열은 우리 셋에게 딱 좋은 3-3-3 배열이었고 듣던 대로 간격이 넓은 편이었다.
물론 들어오면서 비즈니스석을 봤더니 한없이 슬퍼지는 좌석이었지만.
이륙 후엔 10분쯤 자다 깨다를 반복해야 했다.
밤잠이 없고 비행기에서 잠을 못 타는 탓도 있고, 제일 큰 문제는 기체 흔들림이었다.
출발 당일은 비가 정말 많이 오는 날이었고 기상이 안 좋다 보니 비행기가 상하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이런저런 난기류를 만나봤지만 그중 최악이었다.
나는 멀미가 없는 사람인데 기내식이 얹히는 걸 느꼈다.
밥을 2번 먹고 영화를 2편 보고 이러저러하니 드디어 카타르에 도착했다.
하마드 공항은 인천공항과 비슷한 느낌이다.
허브공항 다운 규모였지만 비행에 지쳐 큰 감흥은 없었다.
엉망이 된 내 꼴을 다듬고 요기를 하기 위해 라운지를 찾기에만 바빴다.
공항보다 유명한 어메이징한 곰돌이를 지나 라운지를 찾았더니 청소 중이라며 다른 라운지로 보낸다.
처음엔 라운지가 업그레이드된 격이라 좋아했으나 그 시각 라운지를 이용하려는 모든 사람이 모인 비즈니스 라운지는 앉을 의자조차 없었다.
샤워실은 대기 인원이 많았고 음식은 종류가 적은 건 둘째치고 참 맛이 없었다.
불편한 속에 진저엘 한잔을 넣은 것이 제일 큰 수확이었다.
환승시간은 참 빨리도 지나갔고 게이트를 찾아가니 브릿지가 아닌 버스 연결이었다.
카타르는 버스를 타러 나가는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사막이 어떤 기후인지를 똑바로 알려줬다.
온몸엔 끈적한 습기가 액체괴물처럼 들러붙었다.
더위에 약한 나는 아무리 국가가 돈이 많아도 카타르 국민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말 그대로 온몸으로 알아냈다.
비행기를 옮겨 타고 다시 5시간쯤 되는 비행을 거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베네치아의 마르코폴로 공항은 도시의 명성만큼 큰 공항은 아니다.
유럽인들은 기차로도 많이 들어오고 로마가 이탈리아의 관문 역할을 하니 아주 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모든 걸 감안해도 직원들이 참 느리다.
입국 수속을 하는 직원은 2명뿐이었으며 그마저도 점심시간인 듯 교대로 사라졌다.
입국은 엄청 느리게 진행됐다.
수속이 얼마나 느렸냐면 캐리어를 찾으려는데 이미 우리 비행기의 짐이 나온 지 한참이 지나서 컨베이어 벨트 사이에 카타르항공의 수하물이 모여 있고 간판만 하나가 덜렁 서 있었다.
캐리어가 나를 기다리는 기특한 상황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짜증이 나려 하는데 어떤 직원이 나에게 중국어 통역을 해달라고 하고...
베네치아 입국은 피곤함의 연속이었다.
어렵게 수속을 마치고 드디어 버스 티켓을 사서 베네치아 본섬으로 향했다.
공항 근처는 사진에 나오는 수상도시와는 전혀 다른 평범한 모습이다.
너무 익숙한 도로와 건물들이 보여서인지 아직 내가 이탈리아에 왔단 실감이 안 난다.
버스 운전은 다소 거칠었고 드디어 바다와 철길이 보였다.
베네치아에 온 것이다.
공항에서 베네치아 본섬의 호텔에 간다면 당신은 잠시 천국과 지옥을 함께 겪는다.
거의 하루가 소요되는 비행 이후에 당신은 차가 들어가는 마지노선인 로마광장의 버스 정류장에서 본섬으로 들어가는 가대한 돌다리를 마주친다.
캐리어를 들고.
케로베로스가 지키는 지옥문도 짐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 같지는 않던데 여긴 그렇다.
에스컬레이터는 고사하고 나무판이라도 하나 덧대는 센스조차 없는 돌다리는 캐리어를 끌고 가기엔 많이 힘들지만 그 와중에 마주치는 베네치아는 참 예쁘다.
운하 위를 차 대신 지나는 작은 배들과 만들어진 시대가 느껴지는 유럽의 건물들은 판타지 영화의 세트장 같은 분위기를 만든다.
진짜 욕나오게 힘들고 욕나오게 예쁘다.
다리를 건너 산타루치아역 여행자거리에 있는 호텔에 왔다.
베네치아다운 비싸지만 별로인 2성급 호텔이었다.
그래도 이 가격에 엘리베이터와 욕실이 모두 있는 역 근처 호텔을 구하기는 참 힘들었다.
한국을 떠나 처음으로 등을 펴고 침대에 잠시 누웠더니 다음 일정은 잊고 잠들고 싶었다.
허나 시간을 낭비할 순 없어서 다리를 움직인다.
베네치아는 예전의 그 베네치아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바포레토 24시간권을 사서 산타루치아역 정류장에 갔으나 사람은 너무 많았고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원하는 배를 탈 수 있었다.
엄마와 동생이 힘든 건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을 내가 미안해야 하는 건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몸이 지쳐서 많은 사람이 전부 바퀴벌레나 메뚜기쯤으로 보인다.
백색의 광장은 여전히 아름답고 세계 어딜 가도 있는 비둘기가 많았다.
나폴레옹을 비롯한 많은 지배자들이 실패한 세계 통일을 비둘기가 하고 있는 기분이다.
비둘기가 있는 바닥 대신 두칼레궁전을 바라보면 광장의 아름다움이 들어온다.
피곤한 와중에도 베네치아의 분위기가 물씬 다가왔다.
광장을 나누는 두칼레 궁전은 산 마르코 광장을 다른 평범한 광장과 확실하게 구분해준다.
그저 건물들이 감싼 모양 때문에 무슨 스퀘어가 되는 곳들과 달리 산마르코 광장의 사각형은 오롯이 두칼레 궁전을 위한 공간이다.
인간이 백색을 보고 느끼는 순수, 순결, 아름다움, 동경, 질투 등등의 감정이 이 광장에 가득하다.
저마다 하얀색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한쪽엔 더없이 성스러운 산마르코성당이 있다.
(물론 이 서당의 역사와 청동말을 보면 좀 덜 성스럽긴 하지만 이곳에서 순수하게 기도했을 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된다.)
나폴레옹은 이 광장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말했다지(번역된 말만 들어서 정확한 워딩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이곳을 빼앗으러 왔던 그와 스치러 온 나 모두 같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폴레옹과 나의 공통점은 작은 키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미적 취향도 통하는 면이 있는가 보다.
우리는 광장을 스쳐 빠르게 산마르코 광장의 가운데 우뚝 선 종탑으로 향했다.
이탈리아 관광지 줄 서기의 초급쯤 되는 산마르코종탑의 줄 서기가 시작되었다.
티켓을 사고 종탑 안 자판기에서 물한병을 빼먹고 그 물을 다 마셨더니 우리 차례가 되었다.
이탈리아 문화재에서 결코 흔치 않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종탑 위에 올랐다.
일몰을 보기 좋은 장소지만 도저히 일몰 시간까지 버틸 자신이 없어서 그냥 밝은 풍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물론 시간은 충분히 늦었지만 아직 낯선 유럽의 늦은 일몰 때문이었다.
베네치아의 풍경을 스캔하고 내려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피곤해서 내키는 대로 들어간 레스토랑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식당이었다.
첫 식사여서인지 엄마는 이것저것 먹어보고 싶은 듯했다.
유로 환율에 익숙지 않은 엄마는 그 가격은 신경 쓰지 않았다...
베네치아의 명물이라는 먹물 파스타를 비롯해 이것저것 주문해서는 급하게 먹기 시작했다.
맛은 괜찮은 편이었으나 몸이 지쳐서 많이 먹지는 못했다.
그만 숙소로 돌아가려고 계산서를 달라고 5번쯤 요구했으나 웨이터들은 우리가 아직 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지 뭔지 거의 30분 동안 요구한 계산서를 주지 않았다.
아주 오래 기다려서야 계산이 끝났고 뭔가 아쉬움에 베네치아의 상징 플로리안 카페를 찾았다.
산 마르코 광장엔 많은 카페가 있지만 다른 모든 카페를 합쳐도 플로리안의 명성은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제일 오래되었다는 이 카페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카사노바 핫초코를 내세워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하지만 사실 내가 찾았을 때는 주변 공사 때문에 플로리안이란 간판조차 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도 몇몇 악사들은 있었고 음악소리가 좋단 엄마의 말에 자리를 잡고 잠시 앉았다.
그 유명한 카사노바 핫초코는 초록색 민트향이 강해서 나에겐 별로였다.
카사노바는 이 카페에서 여자들을 꼬셨다는데 그때 이 핫초코를 사주면 작업을 걸었다면 바로 넘어가진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에스프레소를 사줬다면 내 취향을 한 번에 간파한 그 남자에게 넘어갔을지도...
플로리안의 커피는 정말 맛있다.
로마에서 배웠던 대로 설탕 한 봉지를 털어 넣어 음미한 에스프레소는 나를 이탈리아에 데려다줬다.
마치 이탈리아가 내게 내미는 웰컴드링크 같았다.
비행기에서 내려서도 실감하지 못했던 사실을 1720년부터 자리를 지켜왔다는 카페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프루스트 효과처럼(물론 정확한 뜻은 다르지만) 향과 맛을 매개로 기억과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커피 마시는 방법으로 문화권을 구분하곤 해서 에스프레소가 자연스러운 곳을 유럽으로 인식한다.
특히 이탈리아는 항상 에스프레소잔 밑에 커피와 섞여 남아 있는 설탕 알갱이로 기억된다.
다 마셨을 때 어떤 음료보다 강한 맛과 향으로 기억되는 그런 곳이 이탈리아다.
그런 이탈리아 여행이 이곳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었다.
여행이 끝나면 어떤 나라보다 강렬한 기억이 남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