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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Aug 05. 2017

물 위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 베네치아

다음에 와도 계속 있어주길

베네치아는 가라앉고 있는 도시다. 언젠가 아틀란티스처럼 전설 속의 도시가 될지도 모르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면 아틀란티스가 베네치아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베네치아는 가장 낭만적인 도시 중 하나다. 심지어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이 도시를 더 특별하게 만든다.

# 여행 둘째 날의 의미

여행 이틀 차란?

힘든 날이 이틀째란 뜻이다.

새벽 5시쯤에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엄마의 드라이기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깬다.

어제 마트에서 산 납작복숭아를 까먹고 주변 산책을 하다 식당 문을 열었더니 8시다. 

작은 호텔에 머무는 특권으로 이탈리아 할머니가 만들어주는 카푸치노를 마실 수 있었다.

커피의 달콤함이란 역설은 바로 이런 것이리라.

집 나간 정신을 카푸치노 거품에 눌러 담아 다시 몸속에 집어넣고 길을 나섰다.

이른 아침인데도 여행자거리엔 사람이 많다.

관광지의 아침엔 출근하는 사람들의 일상과 여행자의 특별한 날이 만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된다.

같은 출발이지만 서로의 아침은 퍽 다르다.

무라노로 가는 배에 타서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자랑하고 싶은 악랄한 마음이 든다.

별거없는 조식이지만 카푸치노가 모든걸 커버한다


# Murano

복닥거리는 베네치아를 빠져나와 트인 바다를 달렸지만 어쩐지 여기가 바다 같지 않다.

바다가 곧 도로라는 개념이 점점 익숙해진다.

물론 배 뒤의 엔진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물벼락 맞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만.

낡은 배는 쉬지 않고 달려 우리를 무라노에 내려줬다.

영업 준비 중인 무라노의 운하 옆 레스토랑

무라노는 유리공예 기술의 유출을 우려해서 기술자들을 가두는 일종의 감옥이었단다. 

다소 삭막한 이야기다.

유리를 다루는 섬세한 장인들이었으니 목숨 걸고 탈출했다는 이야기도 거짓은 아닐 것 같다.

지금은 과거는 상관없다는 듯 거리 곳곳에서 대형 유리작품이 세이렌처럼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다.

호객이나 눈치 주는 주인 없이 상점 안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갤러리를 둘러보듯 산뜻한 관람이 가능했다.

제일 큰 방해꾼이라면 너무나 강렬한 햇빛 정도?

골목 안쪽까지 숨겨진 유리작품 덕에 보물찾기 하는 기분이 들었다.

무라노 곳곳에 있는 재밌는 발상의 유리작품들


# Burano


진짜 등대 옆에 있는 murano faro 정류장, 여기에서 부라노로 가는 배로 갈아탈 수 있다

부라노는 고작 두 번째 방문인데도 익숙했다.

그 화사한 색감과 그 속에서 자기 색이 묻어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까지.

다 똑같았다.

아이유의 뮤비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난 반대로 이 섬 때문에 그 뮤비를 알게 되었다.

내가 부라노를 알았던 건 베네통(베네치아가 속한 베네토주에 본사가 있고 특유의 색감이 부라노섬에서 영감을 얻은 거란 썰이 있다) 때문이었고, 환상을 갖게 된 건 디즈니(디즈니월드 리조트가 부라노를 모티프로 만들었다고) 때문이었다.

정류장 앞 공원을 지나 골목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부라노의 전경이 시작된다.

짧은 골목이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 같다.

좁은 운하 양 옆의 알록달록한 건물에선 스머프나 일곱난쟁이가 튀어나와도 자연스럽게 인사할 수 있을 것 같다.

특산물인 레이스의 하얀색은 역설적으로 이 강렬한 섬에서 가장 존재감 있는 색이다.

햇살의 쨍한 색감이 담긴 파스텔톤의 건물 사이에 팔락거리는 레이스는 하얀색이기 때문에 튄다.

부라노에선 섬세한 무늬가 돋보이는 하늘하늘한 레이스와 각종 페인트 색들이 공존하고 있다.

다양한 색의 페인트를 사용하는 건 어부들이 돌아올 때 집을 쉽게 알아보기 위함이었고, 레이스가 특산물이 된 건 남자 어부들을 기다리며 여자들이 레이스를 짜서라던데.

페인트와 레이스란 기묘한 어울림은 옛날 부라노 남녀의 어울림에서 왔는가 싶다.


# 베네치아를 가장 선명하게 느끼는 방법

점심으로 파스타에 스프리츠를 한잔 마셨더니 정신이 알딸딸했다.

처음 맛보는 종류의 술은 참 잘 취하는 것 같다.

그 스프리츠 한잔이 리알토다리까지 길을 50번쯤 잃어버린 일에 대한 변명이 되길 바란다.

증축과 개축이 거의 불가능한 도시의 특성상 골목에 잘못 들어가면 길을 잃기 쉽다.

힘들게 리알토 다리를 찾았고 근처의 곤돌라 승강장으로 갔다.

지나갈 때마다 보여서 몰랐는데 곤돌라는 인기 있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탈 수 있었다.

현재 베네치아의 곤돌리에(곤돌라 사공)는 400여 명이라고 하는데 곤돌라를 원하는 사람이 더 많은가 보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우리 차례가 돌아왔고 무뚝뚝한 곤돌리에를 만날 수 있었다.

리알토다리 아래를 통과하는 곤돌라들

곤돌라는 어디서 타는지에 따라 볼 수 있는 풍경이 달라진다.

탄식의 다리 밑을 지나간다는 산마르코 광장과 리알토다리 사이에서 고민을 했지만 동선 상 리알토 부근에서 타야 했다.

기울어진 곤돌라에서 보는 기울어진 베네치아

곤돌라는 생각보다 승차감은 별로다.

귀족들의 운송수단이었으니 안락할 것 같았는데 좌우 모양이 살짝 달라서 오른쪽에서만 노를 젓기 때문에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서 다닌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찍어대는 사진 때문에 좀 껄끄럽기도 했다.

놀이공원에서 퍼레이드 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역시 베네치아를 가장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고전적인 방법임은 분명하다.

리알토 다리 밑 그림자부터 골목으로 들어가기 위해 배가 꺾이는 휘청거림까지 베네치아를 흉내 낸 세계의 많은 모조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곤돌라의 유래는 그리 낭만적이지 못하다.

다리가 거의 없던 옛날엔 맞은편 건물에만 가도 배를 이용해야 했는데 사공들이 승객에게 협박, 폭력, 갈취 등을 벌이는 사건이 많이 생기다보니 돈이 많은 사람들은 개인 배와 사공을 고용했다는 거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 난감한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가 있어서일까?

5년 전에 베네치아를 처음 봤을 땐 을씨년스럽단 생각을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야간기차를 타고 아침에 도착한 생경한 도시는 물의 흔적 때문에 낡은 건물이 많았고 묘하게 어두웠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이번에도 베네치아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확실한 매력이 있다.

라스베가스, 마카오 같은 도시에 베네치아를 본뜬 고급 호텔이나 쇼핑몰이 존재하는 이유가 분명 있다.

베네치아를 유지시키는 말뚝들

사실 베네치아는 많은 노력을 들여 만들었고 유지도 힘들게 하는 도시다.

몰디브 같은 섬처럼 지구온난화로 인해 점차 가라앉고 있다고도 한다.

실제로 비가 오면 산 마르코 광장에서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한다니 우기에 오면 그 말이 더 실감 날 것 같다.

영원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면 같은 장소도 참 다르게 보인다.

20여 분의 시간 동안 바포레토에선 보거나 느낄 수 없는 좁은 골목을 가깝게 지나갔다.

물속에 천천히 낡아가는 건물의 뿌리와 그 위에 널린 누군가의 빨래가 보였다.

짧은 여행 후 곤돌라는 제자리로 돌아왔고 곤돌리에와 헤어졌다.

곤돌라와의 헤어짐을 기점으로 베네치아를 정리하고 피렌체의 시작을 위해 산타루치아역으로 향했다.

조금 더 가라앉은 베네치아에 다시 올 날이 있을지를 궁금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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