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의 진짜 신, 예술가

바티칸에서 보내는 하루

by 사십리터
바티칸엔 신도 있고 신과 같은 미켈란젤로도 있다. 성 베드로 성당은 거대함은 신을 품고 있고, 바티칸 박물관은 신을 축복한 예술가들을 담고 있다. 어쩌면 신이 바티칸에 내린 진짜 축복은 이토록 멋진 예술가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심이 아닐까?


# 로마의 평일

로마의 아침.

일정이 반 정도 지나니 느껴지는 건 피곤함 뿐이다.

피곤한 걸 보니 나답지 않게 힘든 여행을 했나 보다.

하지만 오늘은 이번 여행을 통틀어 가장 고단한 하루가 될 예정이다.

바티칸에 가기 때문.

바티칸 박물관 예약 시간에 맞춰 지하철을 타러 떠났다.

티켓을 사는데 하필 고장 난 기계를 골라서 고생을 했다.

어쩌면 일이 잘못되었단 사실을 알아채라는 계시였는지 모르겠다.

출근 시간의 로마 지하철은 정말 타기 싫은 수준이다.

출퇴근하는 현지인에 전 세계 관광객까지 모두 모인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지하철.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이미 지하철에서 충분히 지쳤다.

20170721_093547.jpg 오늘 여행의 고통을 한장으로 말한다면 인간의 고통을 격렬하게 표현한 라오콘상이다. 마치 과거에서 오늘의 날 위해 조각한 것 같다.

바티칸에는 많은 줄이 있다.

문제는 각 줄이 너무 길어서 어디에 서야 하는지 구분이 안 된다는 것.

개인예약 줄에 서야 하는데 그게 어딘지 구분이 안 된다.

간신히 줄을 서니 안내원이 여기가 아니라며 다른 곳으로 보낸다.

뭔가 이상했지만 우선 알려준 줄로 갈아탔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주변에 있던 한국인 가이드에게 여기가 개인예약자 줄이 맞냐고 물었다.

억지로 대답하는 기색이 역력한 가이드는 짜증스럽게 다른 데로 가야 한다는 말만 내뱉었다.

일하시는데 말을 걸어 죄송하지만 그렇게 싫었다면 차라리 모른다고 해주시지...

그분이 말해주신 잘못된 정보 덕에 전혀 엉뚱한 줄에 섰다.

이리저리 헤매다 알고 보니 처음에 선 줄이 맞단 사실을 알았다.

줄을 찾아다니다 보낸 시간이 거의 한 시간...

온갖 짜증을 참고 검문을 거쳐 간신히 박물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알게 된다...

아, 내가 날짜를 잘못 알고 예약했구나.

여러 번 날짜 계산을 했음에도 하루를 밀려 예약을 했다.

예약비까지 돈을 날리고 할 수 없이 표를 다시 샀다.

울며 겨자 먹는단 기분이 이거구나.

참 맵다.


# 바티칸 투어를 할까 말까? 말까!

언젠가부터 이탈리아 자유여행객들의 필수 코스가 되어버린 원데이 투어.

내가 처음 유럽에 갔을 무렵은 원데이 투어를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가 생기기 시작하던 때였다.

이제 바티칸은 투어 없이 다녀오는 사람 찾기가 힘든 수준이다.

나도 처음 원데이 투어를 알았을 땐 신세계였다.

패키지 투어의 번잡함 없이 담백한 설명만 듣는 투어가 있구나!

그래서 국가별로 다 들어보고 생각했다.

아, 다음에 오면 투어하지 말아야지.

20170721_124514.jpg 바티칸 박물관에서 나올 때 거치는 브라만테의 계단. 특이한 이중구조 때문에 시선을 끈다.

투어는 참 좋다.

로마에서 꼭 봐야 하는 문화재는 물론 그냥 지나가면 몰랐을 건물의 의미까지 많은 걸 알려준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이 TMI가 아니었나 싶었다.

가이드들은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다.

내가 대학 때 한 학기를 꼬박 배운 서양미술사를 단 하루 만에 알려준다.

그런데 문제는 가이드들이 똑똑한 거지 내가 그 모든 걸 하루 만에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는 거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내가 원래 알던 사실뿐이다.

IMG_1354.JPG 지나가는 길에 시선을 끌었던 그림. 바티칸의 대표작은 아니지만 바라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솔직히 우리가 모두 예술품을 보고 스탕달 신드롬을 느끼는 특권층은 아니지 않은가.

바티칸 박물관이 아무리 많은 작품을 가지고 있고 대단해도 그건 예술전공자들이 볼 때 그렇다.

우리에게 대단한 건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쯤 되는 화가들의 작품 정도다.

그런 건 바티칸을 통틀어 10개 남짓이다.

투어가 아닌 혼자 감상하는 박물관 관람이 하고 싶던 이유다.

생각해보면 그게 자유여행의 묘미인데 여기까지 와서 공부하고 가야 지란 강박 때문에 악착같이 투어를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은 어떤 투어도 없이 계획했다.


# 박물관을 본다는 것

우리나라 사람들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관람이 참 서투른 것 같다.

내 경우엔 그렇다.

박물관이 란 건 학교 소풍에 의무적으로 하나씩 끼워 넣어져 있던 코스 중 하나였다.

반별로 한 줄씩 서서 유물 전시방향으로 한 바퀴 걷는 게 박물관 관람의 전부였다.

그렇게 박물관을 배웠더니 어느새 난 영국박물관, 루브르 미술관마저도 그렇게 걷고 있었다.

아이고 의미 없다.

박물관은 모르는 걸 보러 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걸 확인하러 가는 곳이기도 하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할 때 공통 관심사가 있으면 대화가 쉬워지듯 박물관도 아는 게 있으면 관람이 재밌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선 투어비용 낼 돈으로 책과 영화 다큐멘터리를 찾아봤다.

바티칸에 도착한 이후엔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주는 그림의 절반 정도만 봤다.

너무 많이 봐서 아무것도 기억 못 할 바에는 몇 가지만 보고 오래 기억하는 쪽을 선택했다.

어차피 바티칸 박물관은 하루 만에 다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냥 평소에 보고 싶었던 그림이나 꼭 봐야 할 예술품 몇 가지를 조금 예습하고 가자.

우리는 초중고에서 10개도 넘는 과목을 한꺼번에 시험 봤던 사람들이다.

그림 10개 정도는 미리 공부할 능력이 모두 있다.

20170721_151235.jpg 성 베드로 성당 쿠폴라에서 본 하늘. 바티칸박물관의 그림들보다 더 오래 바라보게 되는 장면이었다.


# 그래서 결론은...

뭐 요약해서 이탈리아나 유럽의 원데이투어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1. 내가 정말 예술에 관심도 지식도 없는데 투어를 받을지 고민이다. 라파엘로랑 조토의 직업이 뭔지 모른다. 바티칸이 가고 싶은 이유는 유명하다는 거 딱 하나다.

-> 그냥 가지 말자. 그게 정신과 육체의 건강 그리고 지갑에 이롭다. 예술에 무지한 것보다 나쁜 건 억지로 관심 갖는 시늉을 하다 실망하는 거다. 그냥 유명해서 보고 싶은 거면 박물관 성벽에서 인증샷 찍는 게 박물관 보는 사람들한테 쾌적한 환경 제공하고 좋은 일이다. 박물관보다 행복해지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자.


2. 나는 딱히 예술에 대단한 관심이나 지식은 없고 소량의 상식만 있는데 조금 더 알고 싶은 욕구는 있다. (소량의 상식이란 미켈란젤로의 이름을 풀네임도 아닌 딱 미켈란젤로라는 이름만 알고 그의 대표작 중에 천지창조란 게 있다는 정도는 들어보았으나 다른 그림이랑 섞어 놓고 이중 어느 것인지 찾으라고 하면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다 라고 생각되는 정도)

-> 이런 사람들이라면 투어는 확실히 값어치를 할 것이고 잘하면 예술에 흥미를 갖는 계기가 될 것이다.


3. 전문가 같은 특별한 지식은 없지만 그래도 그림 보는 게 지루하지 않고 예술 관련 다큐멘터리나 책을 본 적 있고 라파엘로 베르니니 조토의 이름과 대표작 한두 개 정도는 안다.

-> 투어를 해도 좋고 마음 다잡고 공부 좀 해서 관람하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것이다.


4. 예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미술책에 등장하는 모든 작품에 해설을 할 수 있다.

-> 당신이 가이드 이상인데 왜 투어를 듣는가. 혼자 박물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스탕달 신드롬을 느낄지도 모르는데.

IMG_1348.JPG 바티칸의 필수 코스 중 하나인 아테네학당 앞에서 티켓들고 사진찍기.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각도가 맞은 사진은 없다.


# 로마 바라보기

격정의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드디어 올드브릿지로 갔다.

솔직히 한국인이라면 바티칸 투어의 가장 큰 목적은 이 젤라또 가게가 아니던가.

너무나 진하고 맛있는 피스타치오가 15초 만에 녹아서 질질 흐르는 장면을 보며 성 베드로 성당으로 갔다.

박물관에서 나오며 산 얼음물이 성당 앞에서 다 녹는 신의 기적을 보며 긴 줄에 섰다.

양산하나에 옹기종기 모여 한 시간이 지났다.

역시 이탈리아란 줄 서기에 시간의 반을 보내는 곳이다.

검색을 통과해 드디어 성당 내부로 들어왔다.

IMG_1366.JPG 올드브릿지의 젤라또. 가장 애정하는 피스타치오맛에 크림도 올렸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

한 종교의 상징이자 자부심.

가톨릭 신자들이 꿈꾸는 장소.

교황들의 요람이자 무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징이 담긴 장소다.

신을 위해 만들었다기엔 신의 장난처럼 느껴진다.

특히 성당 중앙을 가로지르는 전 세계 다른 성당과 크기를 비교한 바닥의 글씨들은 신의 관심을 숫자로 표현하려는 기분을 준다.

신에게 관심받고 싶은 한 종교의 마음이 보인달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성당을 이토록 거대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신을 생각하는 신자들의 마음이다.


거대한 성당을 한 바퀴 돌아 대망의 쿠폴라로 갔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다.

중간까지는 엘레베리터로 오르고, 이후는 계단으로 올랐다.

끝에선 밧줄까지 잡고 가는 가학적인 등반을 했다.

좁은 틈으로 로마 전경이 보인다.

로마 시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보니 바티칸에선 로마가 조금 멀게 느껴진다.

옛날 로마인들의 박해를 받던 신의 자녀들도 여기서 로마를 바라봤을까?

로마 여행 첫날에 로마가 아닌 바티칸에 온건 좀 아이러니지만 이런 시작도 나쁘지 않다.

앞으로 며칠 밤을 더 지낼 로마가 한눈에 보인다.

IMG_1391.JPG 가까이에서 바라 본 쿠폴라. 이곳에선 쿠폴라 꼭대기와 광장에서 바라본 동상들이 뒷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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