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로 떠난 이탈리아 남부 투어
나폼쏘 투어를 알아보던 중 자꾸 카프리가 눈에 아른거린다. 푸른 동굴에 호기심이 발동한다. 결심한다. 가자 가프리로! 보자 푸른동굴! 먹자 다미켈레! 이번 이탈리아 남부는 버스투어 대신 기차여행이다.
피곤해서 화장과 고데기는 포기했지만 상쾌하다.
카프리에 가는 날이니까!
화장 따위가 카프리의 영광을 막을 순 없다.
박보영과 지성의 신혼여행지였고 황제부터 세계적 부호까지 온갖 유명인들의 별장이 있다는 섬 카프리.
비록 옆엔 지성 대신 중2짜리 동생이 딸려있으며 별장도 아는 유명인도 없지만 나는 간다 그곳에.
카프리는 비범한 섬이지만 가는 방법이 번거롭고 돈이 많이 들어서 아직 한국인들의 발길이 적다.
사실 처음 계획은 남부까지 내려오지 않는 거였는데 갑자기 폼페이가 보고 싶어서 나폴리로 가는 기차표를 사고, 푸른 동굴을 알고는 다시 계획을 수정했다.
돈 드는 건 싫어하는 내가 굳이 일정에 없던 남부까지 발걸음 한 이유는 모두 '푸른 동굴' 너 때문이다.
초소형 입구, 맑은 바다, 쏟아지는 햇빛, 잔잔한 날씨.
이 모든 조건을 클리어해야 푸른 동굴에 들어갈 수 있다.
게토레이색 동굴 사진을 보는 순간 '아, 저 정도 봐야 이탈리아 봤다고 어디 가서 명함 내밀겠구나' 싶어 폼페이에 맞춰놨던 일정을 재조립했다.
다만 이 카프리는 귀찮다는 문제가 있다.
우선 나폴리나 소렌토 같은 남부 도시에 가서 항구로 이동한 뒤 페리를 타야 한다.
우리는 나폴리 첸트랄레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택시를 타고 베베렐로 항구로 갔다.
인터넷에 떠도는 나폴리 택시기사들의 사기나 호객은 없다.
사기를 당할 때 나타난 잘생긴 마피아의 도움을 받고 사랑에 빠져서 그 자리에서 카프리로 신행을 가는......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면 낮술 한잔하면서 이런 판타지적 상상을 했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폴리는 세계 3대 미항임과 동시에 마피아와 근접한 악명 높은 도시가 아니던가.
나폴리 치안에 대한 악명을 워낙 많이 들어서인지 묘하게 건물들이 음산해 보인다.
하지만 기차가 조금 지연되었음에도 항구엔 제시간에 잘 도착했고 택시비도 무난하게 나왔다.
출항까지 10분도 안 남은 배가 있어서 서둘러 티켓을 구매했다.
타이밍이 잘 맞는다.
어떤 역경도 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다.
모든 일은 잘 풀릴 때 의심해야 한다.
출항 3분 전.
나는 뛰어야 했다.
티켓이 아닌 영수증만 받아서 배를 타겠다고 승강장으로 간거다.
내가 가진 물건이 티켓이 아님을 배를 타려는 순간 알았고, 3분 남았으니 빨리 티켓 받아오란 검표원의 말에 달려야했다.
엄마는 이날 내가 뛰는 걸 오랜만에 봤다고 말했고, 동생은 처음 봤다고 말했다.
간신히 티켓을 받아 가까스로 탑승했다.
나폴리에서 제일 무서운 건 사기꾼이 아닌 나 자신의 정신머리였다.
아직도 끝이 아니다.
카프리엔 도착했지만, 아직 푸른동굴까진 멀었다.
마리나그란데 항구에서 또다시 작은 보트로 갈아타야 푸른동굴로 갈 수 있다.
아침부터 이동만 했는데 놀랍게도 아무 데도 도착을 못 했다.
오늘 한 일이라곤 결제과 이동뿐이지만 괜찮아, 카프리는 사랑이야.
카프리 항구에 내려 고민고민 할 것 없이 하나뿐인 길을 따라 직진하면 왼편에 푸른동굴 투어를 위한 작은 부스가 보인다.
여기서 투어의 종류가 두 가지(푸른동굴까지만 가는 Blue Line/푸른동굴+카프리 한 바퀴 돌기가 포함된 Yellow Line)로 나뉜다.
푸른동굴이 목적인 사람들은 페리에서 내리면 곧장 이곳으로 오기 때문에 순식간에 줄이 길어진다.
우리는 블루라인 요트를 타고 카프리의 절벽을 보며 바다를 달렸다.
옆에 앉은 커플의 애정행각과 곧장 달려드는 매서운 남부의 특산햇볕이 거슬렸지만 섬 구경이 재미져서 참을 수 있었다.
드디어 푸른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차례다.
시동을 끈 요트에서 얌전히 기다리니 동굴로 직접 들어가는 미니보트들이 다가와 요금소까지 에스코트한다.
해상 식당은 가봤어도 해상 톨게이트는 처음이다.
또다시 결제와 이동을 했지만 괜찮아, 푸른동굴은 참사랑이야.
좁은 입구에 들어가기 위해 배와 일체 되어 누웠더니 어느새 동굴 속이다.
너무 순식간이라 어안이 벙벙하다.
카프리의 짧은 동굴을 빠져나오자 게토레이의 고장이었다.
옆에서 인어가 팝콘을 팔아도 자연스럽게 사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으로 보고 예쁘겠단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신비한 느낌이 들 거라곤 생각을 못 했다.
에메랄드니 비취니 하는 보석 색으로 표현 되는 느낌이 아니었다.
심해에 숨겨진 영롱함 자체가 잠시 수면 위로 올라온 느낌이다.
잘 관리된 아쿠아리움에 생기가 더해진 색.
물 자체가 빛을 감고 있다.
너무 자연적으로 발생한 색이라 인공적인 느낌이 들었다.
만약 푸른동굴의 색을 한줄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노벨문학상을 받아 마땅하다.
아직은 게토레이 색이 제일 적절한 표현.
생각해보니 오늘 어딜 가는지 설명을 안 했는데(가이드의 재능은 없다) 엄마는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드디어 진짜 카프리 시내로 간다.
요금을 생각하면 버스를 타야겠지만 버스정류장의 긴 줄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시간을 핑계로 택시로 발길을 돌렸다.
게다가 카프리의 택시는 오픈카다.
고급진 차종은 아니지만, 카프리는 길 자체가 관광요소기 때문에 오픈 택시는 그 값어치를 한다.
어디서 기사까지 딸린 오픈카를 타보겠나 싶어 냉큼 택시에 올라탔다.
길은 그 유명한 아말피 해안보다 스릴 넘쳤다.
절벽에 만든 길이라 워낙 좁으니 온갖 경차들이 다닌다.
버스, 트럭 모두 작으니 놀이공원에서 카트 타는 기분만 들고 현실감은 떨어진다.
반대편 절벽을 바라보면 게임 그래픽 같은 풍경이 보인다.
게다가 내가 탄 건 (처음 타보는) 오픈카가 아닌가.
정원을 잘 가꾼 어느 집의 담벼락에 붙어서 두대의 차량이 스치는데 이건 택시가 아니라 놀이기구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기사님이 아주 크게 틀어준 제목 모를 요란한 음악이었다.
배가 고파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경치가 모든 장사를 대신하는 곳이었다.
웨이터는 불친절했고 음식 가격은 비싸지만 용서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 바로 뒤에 있다.
밥, 아니 라자냐를 먹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봤다.
맥주 한잔을 마셨더니 비로소 내가 카프리에 있음이 실감 난다.
한국에서 카프리 맥주를 마실 때면 왜 뜬금없이 맥주 이름에 섬 이름을 붙였나 했는데 와보니 이해가 된다.
특히 그 곰살맞은 해님은 잘 만든 마크였다.
맥주를 부르는 풍경이다.
내려가는 길은 오렌지색 버스표를 사서 도저히 버스란 생각이 들지 않는 미니미한 버스에 탔다.
버스 주제에 온갖 귀여움이 다 느껴진다.
버스의 창문 안으로 나뭇가지가 스르륵 들어왔다 나갈 정도로 도로와 집이 가깝다.
나폴리로 돌아가는 배 시간이 좀 남아서 옆의 바다에서 갈매기한테 과자를 던져주고 3분 해수족욕을 했다.
발끝뿐이지만 찬 기운이 몸에 퍼지니 좋다.
이제 VR보다 현실감 떨어지는 이 섬을 떠난다.
여행사의 남부투어가 아닌 기차를 타고 나폴리에 온 가장 큰 이유, 피자 먹으러 갈 시간이다.
나폴리에서 피자 투어를 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난 피자를 좋아하진 않아서 딱 한군데만 간다.
제일 유명한 집.
제일 유명한 피자집을 말하라면 피자헛이지만 그래도 피자의 본국에선 예의상 'Da michele(다미켈레)'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피자의 발상지라는 나폴리에서도 원조로 알려진 피제리아 '다미켈레'에 가기 위해 골목에 들어가니 어마어마한 줄이 반긴다.
아니, 사실 그들은 경쟁자를 반기지 않는다.
이 피제리아 앞에는 사람이 세면대 비누 거품처럼 바글바글하다.
심지어 하수구가 막혔는지 사라지지도 않는다.
옆 건물에도 피자집이 하나 더 있지만 모두 이 앞에만 있다.
사람들을 뚫고 우왕좌왕하다 3번 번호표를 받았다.
그렇다.
번호표는 1번부터 100번까지 있고 내가 받은 건 100번을 넘고 새로 시작된 3번이었다.
내가 갔을 때 입장한 번호는 60번대...
번호는 이탈리아어로 불러준다.
내 차례가 돌아오는 동안 이탈리아어 숫자 공부를 마치고 1부터 100까지를 말하게 되었다.
제2외국어라 2년간 배운 일본어 숫자는 다 까먹었는데 이탈리아어로 내 나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교육은 현장학습과 체험이 중요하다.
다들 워낙 오래 기다려서 본인 번호를 부르면 복권 당첨된 듯 소리를 지르며 들어가고 사람들이 박수도 쳐준다.
줄을 오래 서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 피자집 앞에서 피자를 파는 앞집이야말로 진짜 대단한 맛집 아닐까?
저길 갈까?
그래도 순서는 생각보다는 빨리 돌아온다.
중간에 포기하고 나가떨어진 사람들이 많기 때문.
모든 번호를 기다리면 4~5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래도 2시간 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간신히 들어갔더니 주문도 한참을 기다린다.
어렵게 주문하고 어렵게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왜 피자가 눈물 모양으로 보이는 걸까?
맛은 확실히 있지만 두시간을 기다리기엔 좀 부족하다.
확실히 피자에서 느껴본 적 없는 쫄깃함이 있고, 치즈는 고소하지만 그래도 역시 보상이라기엔 좀 부족하다.
역시 오늘 최고의 기억은 푸른동굴로 해둬야겠다.
눈물 어린 피자를 다 먹고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안녕 나폴리, 안녕 카프리.
넌 사랑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