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개의 분수와 수백 가지 파스타

로마에서 조용하게 놀기

by 사십리터
한 가지 구경거리에 수천 명의 사람이 달려드는 로마. 하지만 중심가를 벗어나면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장소들이 있다. 로마 시내의 몇 가지 명소를 지나쳐 조금만 멀리 가면 수백 개의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정원과 수백 가지 파스타를 구경할 수 있다. 로마로 질주하는 관광객이 무서워질 때쯤 대피하기 딱 좋은 곳들이다.


# "나, 오늘 한가해요" 하고 싶다

여행 중 가장 늦은 아침을 먹고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조금씩 지루해하는 엄마와 더 자고 싶은 동생 사이에서 눈치를 보다 한마디 했다.

"그만 나갈까?"

엄마 이기는 딸은 없다.

하지만 당당하게 게으름을 피울만한 변명이라면 있다.

오늘은 목표가 적다.

오전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정원 빌라데스테(Villa d'Este)에서 산책이나 좀 하고, 오후엔 이탈리아의 고급 식료품점 잇탤리(Eataly)에서 파스타 쇼핑을 할 예정이다.

두 군데만 가면 된다는 한가한 마음으로 숙소를 나와 코나드(이탈리아의 체인 슈퍼마켓)로 갔다.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을 사고, 티볼리(빌라데스테가 있는 로마 근교의 지명)로 가는 버스를 타러간다.

코트랄버스를 타기 위해 메트로 B선의 거의 끝인 폰테마몰로(P.Mammolo)역까지 왔다.

사실, 얼마 안 되는 일정의 비결은 긴 이동시간이다.

IMG_1512.JPG 지하철 B호선의 폰테마몰로역 앞에 있는 코트랄 버스의 정류장


# 나는 커피 한잔에도 기분이 좋아진다

버스티켓을 사고 피곤한 엄마를 위한 카푸치노도 샀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맛있다.

버스표 사다 얻어걸린 커피라기엔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느낌이다.

맛있는 커피를 마셔서 기분이 좋은 채로 버스를 기다렸다.

승강장은 여럿이지만 한군데만 사람이 몰려 있어서 딱 봐도 어디가 티볼리행인지 표가 난다.

버스는 에어컨을 틀지 않아서 좀 더웠지만, 창문을 좀 열었더니 바람이 들어와서 불쾌하진 않았다.

IMG_1508.JPG 폰테마몰로역 지하 매표소 옆 바에서 파는 카푸치노. 커피를 안마시는 엄마도 맛있게 먹었다.

버스가 생각보다 높고 가파른 산으로 올라가서 점점 경치가 좋아진다.

버스는 목적지는 있지만, 안내방송은 없다.

내리는 곳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버스에 탄 외국인들은 모두 눈치를 본다.

눈치게임에서 1만 외치고 아무도 2를 외치지 못하는 상황처럼 미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곳은 그냥 지나갔지만 빌라데스테에선 기사님이 딱 여기가 거기라고 소리를 지른다.

미어캣이었던 우리 외국인들은 내려서 모두 같은 곳으로 간다.

사람들을 따라가니 어김없이 빌라데스테 입구가 나온다.

일요일이지만 로마를 벗어난 이 산속 마을은 유유자적이다.

로마 시내에 비하면 관광객이 없는 수준이라 입구도 크지 않다.


# 귀족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티볼리에서 유명한 건 빌라데스테(Villa d'Este)와 빌라아드리아(Villa Adriana)나 두곳이다.

빌라아드리아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빌라데스테는 에스테 가문 추기경의 저택이다.

티볼리 지사로 임명된 추기경 아폴리토 2세가 공관이 별로라는 이유로(...) 수도원을 개조해서 정원이 딸린 화려한 저택을 지은 거란다.

난 기숙사는 나랑 잘 안 맞으니까 기숙사보다 큰 집 지어서 살아야지 같은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정확한 사연이 궁금하다.

아드리아나(현재는 터만 남아 있음)를 모델로 삼아 만든 것이 데스테다.

르네상스식 설계와 미학적 모습 기타 등등의 이유로 건축가 사이에서 유명하다는데 어려운 건 전문가들의 몫이고 여기가 유명한 이유는 분수 덕분이다.

분수가 500개쯤 있다.

서울시 분수가 441개라는데(정확한 숫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정원 하나에 분수가 500개 가까이 있다.

어린이대공원에서 음악분수 하나만 보고 한 시간씩 노는데 대체 어떻게 관람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숫자다.

물론 모든 분수가 큰 건 아니지만 이 정원의 규모가 짐작되는 숫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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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단한 정원과 저택의 시작이라기엔 좀 초라한 입구로 들어가 표를 샀다.

우선은 저택을 가볍게 한 바퀴 돌아보고 드디어 정원으로 나갔다.

말이 저택이지 사실상 궁전이다.

정말 잘 계획되고 가꿔졌음이 보인다.

정원과 저택, 주변 포도밭이 만난 풍경이 그럴듯하다.

보는 순간 알았다.

아, 사진 명당이구나.

만약 신께서 인생샷을 건질 명당이 어디냐 물으신다면 여기라 말하겠다.

사진을 싫어하는 나지만 여기선 욕심이 난다.

계단을 하나 내려갈 때마다 사진을 찍으며 분수 구경을 했다.

하지만 빛이 너무 강해서 그 많은 사진 중에 건진 건 없지만...

밖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양산까지 챙겨왔지만 거대한 나무들이 그림자를 만들어서 양산 없이도 걸을만했다.

중간쯤 내려가니 올라올 걱정은 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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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3_130329.jpg 사진엔 흐리게 나오지만 솟구치는 분수에 강한 햇빛이 닿아서 무지개가 보인다

이러저러한 분수를 보고, 큰분수 작은분수 전부 보고, 사진도 찍고, 오르간 분수까지 왔다.

정해진 시간마다 오르간 연주를 한다는 이 분수 앞엔 사람들이 몰려있다.

기대에 차서 정각에 녹화 준비를 마치고 햇빛을 받으면서 분수 앞자리를 사수했는데!

음악은 없다.

정각에 '짠!'하고 연주가 시작되는줄 알았는데 한참 뜸을 들인다.

게다가 정말 오르간이 연주될 뿐 뭔가 분수가 추가로 올라온다거나 하는 쇼라고 할 만한 풍경은 없었다.

정직하게 오르간 연주만 될 뿐이며 소리도 들리다 끊어지다를 반복할 뿐 크게 아름다운 연주는 아니었다.

20170723_122458.jpg 다소 허망한 오르간 분수. 오르간 연주 시간이 안맞는다면 기다리면서까지 볼 필요는 없을 듯.

허무하게 오르간이 끝나고 그늘을 찾아 도시락을 먹었다.

이유식과 과일을 먹는 가족, 혼자 왔는지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쓱 꺼내 먹는 아저씨 사이에서 우리도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었다.

이 근처에 적당한 식당이 없단 걸 알고 도시락을 들고 온단 계획을 세웠다.

나야 여행 중엔 항상 한 끼쯤 대충 때우는데 밥과 국을 사랑하는 엄마가 좀 걱정되긴 했다.

하지만 정원이 맘에 든 엄마는 신경 안 쓰는 눈치다.

계획은 성공이다.

20170723_132112.jpg 내려올 땐 분수가 없어도 걷기 좋은 정원이지만... 올라오는 길엔 계단이 무섭다

간단한 점심 후 다시 정원들 봤다.

엄마는 정말 맘에 들었는지 여행 중 거의 처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올까 말까를 고민했는데 안 왔음 어쩔뻔했담.

정원 제일 아래까지 내려갔다 다시 돌아오니 아마 2~3시간쯤이 지났나 보다.

돌아가는 길에 귀찮아서 가지 않으려 했던 빌라아드리아나를 지났다.

사람들이 많이 내리는 걸 보고 엄마가 '저기도 뭐가 있나 봐'라고 말했지만 모른 척 했다.

엄마 미안.

저기까지 가긴 내가 너무 귀찮아서 모른척했어.

우리 그만 로마로 돌아가자.


# 이집트에는 없는 로마 피라미드

땅만 파면 유물이 나와서 지하철 공사도 못 한다는 로마.

그곳엔 상상을 초월하는 유물, 유적들이 많다.

콜로세움 같은 전 세계가 아는 유적도 있지만 참 의외의 유적도 있다.

바로 피라미드!

스킹크스까지 갖춘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비하면 미니어처나 모델하우스 수준이지만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받은 로마에도 피라미데(Piramide)가 있다.

물론 내가 보려는 건 피라미데가 아니다.

지하철 피라미데역 근처에 있는 잇탤리(EatTaly)에 가는 중이다.

20170723_152809.jpg 로마에도 피라미드가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에 비해 너무 작아서 이게 뭔가 싶겠지만 진짜 피라미드 용도의 그 피라미드가 맞다. 제대로된 이름은 세스티우스의 피라미드!

Eat과 Italy 두 단어를 재치 있게 합성한 명칭인 Eataly는 이탈리아만이 할 수 있는 영어식 말장난이다.

이름답게 이곳은 이탈리아의 식재료를 파는 식품점이다.

전세계인 누구나 호불호 없는 피자와 파스타의 종주국다운 언어유희가 부럽다.

전체적인 느낌은 좀 크고 세련된 이마트 같은 느낌이다.

다만 이마트와 달리 이곳에서 파는 물건은 음식, 또는 음식을 위한 물건뿐이다.

이탈리아 지역별 유기농 식재료와 특산물을 모아뒀기 때문에 특별한 관심이 없어도 스쳐보기 괜찮은 장소다.

엄마는 요리하는 쪽, 나는 먹는 쪽에 관심이 많다.

여긴 엄마 핑계를 대며 날 위한 시간을 보내기 딱 좋은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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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온 목적은 딱 하나.

파스타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나지만 라자냐, 펜네 같은 파스타 종류도 좋아한다.

특히 리가토니 같은 숏파스타를 좋아하는데 한국에선 사 먹기도 해먹기도 어렵다.

항상 리카토니를 파는 곳까지 발걸음 하거나 파스타 값과 비슷한 배송료를 물고 인터넷으로 사야 맛볼 수 있었던 파스타들이 이곳에 있다.

결국 우리 셋은 모두 여기서 한 차례씩 넋을 놓았다.

나는 수백종류는 되어 보이는 처음 보는 파스타 앞에서.

엄마는 온갖 서양 요리도구 앞에서.

동생은 쌓여있는 초콜릿 코너 앞에서.

특히 나는 진열대를 가득 채운 처음 보는 생김새의 파스타 코너에서 이성을 잃고 다음 진열대로 넘어가는 순간 또 다른 파스타들이 나타나는 순간 넋을 놔야 했다.

파스타 코너만 동네 구멍가게 수준의 매장을 채우고 있다.

약 10여 종의 파스타를 챙겼더니 중요한 사실이 떠오른다.

아, 배가 고프다.

이 많은 식품 사이에서 우리는 배가 고팠다.

신나는 쇼핑 후 먹은 저녁이 아직도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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