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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Oct 09. 2017

처음으로 호스텔에서 자던 날

뭘 해도 처음인 핀란드 헬싱키


          

예술의 전당에서 무민 회화전을 한다. 핀란드 생각이 나서 쓸데없이 반갑다. 핀란드에서 보낸 시간은 짧았지만, 기억은 많다. 지금은 익숙해진 호스텔 도미토리가 처음이었던 그날. 휴게실에서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는 외국인들. 둘러앉은 휴게실에서 독일인 여행자가 나눠 준 감자칩 한 조각.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속담을 감자칩 한쪽도 나눠 먹는단 나만의 격언으로 바꿔 준 그런 날이었다.                   



# 국경을 넘는 기차

모스크바(Москва́)의 레닌그라즈키(ленинградский)역에서 헬싱키행 야간 기차에 탔다.

시베리아횡단열차를 빼면 않으면 처음 타는 야간기차다.

러시아에서 핀란드로 가는 야간열차는 신기함 자체였다.

잠든 사이에 국경을 넘어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조금 흥분했다.

어수선한 TSR과 달리 하얀 복도에 깨끗한 4인용 객실이 늘어서 있다.

하얀 복도, 새하얀 침구가 깔린 기차가 출발하는 까만 밤.

혼자 나타난 동양인 여자의 여권을 검사하는 곱지만은 않은 시선.

속옷 차림으로 잠든 옆 침대 사람.

초보 여행자에겐 뭐 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다.

핀란드행 야간열차의 복도, TSR을 탄 직후였기 때문에 기차계의 5성급 호텔로 보였다

다음날 12시가 조금 넘어서 헬싱키에 도착했다.

별다른 관광 없이 그저 러시아를 통과하는데 거의 열흘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유럽여행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나서야 트램이 지나가는 유럽다운 거리가 펼쳐졌다.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무거운 배낭으로 억누르며 숙소를 찾아가 짐을 맡기고 나왔다.

기차가 도착 한 헬싱키 중앙역


# 핀란드의 첫 목적지

첫 일정은 디자인박물관이다.

북유럽에 대한 지식은 바닥 수준이지만 디자인의 우수성은 알고 있었다.

북유럽감성, 북유럽디자인, 북유럽가구...

디자인에 까막눈이 나지만 느껴보고 싶었다.

의자부터 앵그리버드까지 많은 전시물이 핀란드를 보여줬다.

디자인박물관은 북유럽의 첫 일정으로 마땅한 처사였다.

박물관을 나와서도 괜히 도시가 감성적으로 보였다.

핀란드는 내가 상상으로 디자인했던 여행을 현실로 끌어내 주고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과 북유럽의 4월다운 을씨년스러운 날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내 가방 안에 중학교 때부터 꿈꾸던 유레일패스가 들어 있고 이제 그걸 개봉하기 직전이다.

꿈이라고밖에 생각 못 할 순간이 현실에서 날 기다린다. 

핀란드 헬싱키의 디자인 박물관! 박물관 보다는 전시장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 감자칩 한쪽도 나눠먹는 곳 

핀란드에선 처음 해본 일이 너무 많다.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처음은 호스텔이다.

도미토리는 처음 겪는 형태의 숙박시설이었다.

호스텔은 날 충분히 두근거리게 했다.

동생이랑도 같은 방을 써본 적이 없는데 국적, 인종, 성별, 나이가 다른 사람들이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게 가능은 한가?

대체 거기선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호스텔을 찾아갔다.

몇 시간 전까지 모르는 사람들과 야간 기차를 타고 있던 기억 따위는 잊고 새로운 고민과 두근거림에 빠졌다.

막상 들어선 호스텔은 별거 없었다.

오히려 호텔이라면 느끼지 못했을 포근함이 만족스러웠다.

처음 가본 호스텔은 큰길이 아닌 골목길의 평범한 건물이었다. 

편지로만 알고 지내던 외국인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기분이었다.

2층 침대가 늘어선 방은 먼저 온 여행자들의 짐으로 가득했다.

각 잡힌 호텔 침구가 아닌 다소 어지러운 방에서 사람 냄새가 났다(진짜 냄새가 났는데 기억이 미화 된 건지도 모른다).

유럽 땅에 쉴만한 곳이 있을지 고민했던 시간을 날려줬다.

누군가 머무는 흔적들은 그곳이 여행자가 쉬는 공간임을 말해줬고, 이방인이 모이는 공간임을 말해줬다.

방안을 둘러보고 휴게실로 갔다.

호스텔의 주방 겸 휴게실

휴게실이야말로 호텔과 호스텔의 가장 큰 차이다.

책장엔 세계 각국의 가이드북이 있었고 그 중엔 한국어 가이드북도 있었다.

전 세계의 언어가 여기가 핀란드란 사실 한 가지를 말해줬다.

모르는 사람이 놓고 간 한국어 가이드북이 내가 제대로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이정표 같았다.

혼자인 여행자들은 한쪽에서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만지고, 한쪽에선 스파게티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순간 섞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조금 물러나 있었다.

영어로 대화하는 그들 사이에 섞이기엔 실력도 용기도 없었다.

정말 작은 용기가 생긴 건 스파게티를 만들던 여행자가 싱가폴인이라는 걸 알아들은 순간쯤이었다.

얼마 전 싱가폴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반가워해 준 그 여행자의 영어 발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잠시 후 어느 독일인 여행자가 먹던 감자칩을 하나씩 나눠줬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별거 아닌 과자 한 봉지를 나눈 그 시간이 신기했다.

(ps. 이날 대화의 주제는 ‘어느 나라의 물가가 제일 비싼가?’였다. 북유럽의 물가에 슬퍼하는 여행자들의 대화였으나 사실 일본, 스위스, 독일 등 그날 모인 여행자들의 본국도 만만찮았다.) 

안락했던 호스텔 구석쟁이

                     

# 핀란드의 아침

밤은 지나고 여행자에게 비 내리는 아침이 왔다.

하지만 우산을 쓰는 사람은 없다.

북유럽 멋쟁이들은 시크하게도 비 따위 신경쓰지 않는다.

나도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쓰고 그들 사이에 비와 함께 들어가 트램을 탔다.

목적지는 템펠리아우키오 교회(Temppeliaukion kirkko)다.

이름 외우기가 너무 어려웠던 템펠리아우키오 교회는 암반을 그대로 살려 만든 독특한 교회다.

책에서 죽기 전에 봐야 할 세계 건축물 1001가지 중 하나로 봤던 기억이 있다.

죽기 전에 봐야할 것이1001개면 좀 많다는 생각을 했고 교과서에 나온 건물 정도가 아니면 볼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 중 하나를 찾아가고 있단 사실이 재밌다.

템펠리아우키오 외관

실제로 교회 안에 들어갔을 때 참 많이 신기했다.

그동안 봐온 한국의 교회는 물론이고 책에서 본 유럽의 성당과도 전혀 달랐다.

교회가 아니라 어떤 용도로 써도 특이할만한 외관이었다.

거대한 와인 창고 같았다.

가장 전형적이고 보수적인 종교의 공간이 이렇게 새롭기도 하구나.

예수의 무덤이 있다면 이런 생김새였을까?

모두 다른 돌의 생김새를 보듬듯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며 한참 있었다.

이토록 자유로운 신의 공간이 있음이 놀라웠다. 

템펠리아우키오 내부


# 참 작은 도시, 헬싱키

템펠리아우키오 교회를 나오니 특별히 할 일은 없다.

서울, 도쿄, 북경 등등 유럽여행 전에 만났던 나라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수도를 품고 있었다.

핀란드의 수도인 헬싱키는 처음 본 작은 수도였다.

국토는 한반도보다 넓지만 인구는 서울 인구의 반이 좀 넘는 나라의 수도는 한산하다.

그런 상황에서 비는 오고 하루 동안 무제한으로 트램을 탈 수 있는 이용권이 있다!

그래서 무작정 트램을 타고 종점으로 갔다.

지하철과 다른 트램의 유연한 속도와 움직임에 맞춰 낯선 건물과 공원, 모르는 사람들을 지켜봤다.               

시내를 한 바퀴 돌아 아카데미넨 서점(AKATEEMINEN KIRJAAUPPA)으로 갔다. 

규모를 빼면 평범한 서점이지만 영화 때문에 가보고 싶었다.

무작정 헬싱키를 걸어다니다 만난 희미한 태극기. 대한민국 영사관으로 추측.

내가 핀란드에 대해 아는 사실은 핀란드를 모른다는 게 전부였다.

자일리톨, 휘바휘바, 노키아, 앵그리버드가 지식의 전부였다.

나 자신의 무지에 당황해서 핀란드를 알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영화 ‘카모메 식당(かもめ食堂: Kamome Diner, 2006)’이었다.

헬싱키의 풍경을 알기 좋은 일본영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주인공이 서점 카페에 앉아 책을 보던 제일 조용한 장면이었다.

고요에 고요함을 더한 평안한 장면이었다.

서점은 한 나라의 문화가 완전히 녹아 있는 공간이다.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사적인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궁금했다.

규모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훨씬 못 미치는 크기였지만 더 큰 세상이었다. 

서울의 대형서점들은 한글의 세계고 익숙한 나의 세계다.

하지만 핀란드는 모르는 세계다. 

모르는 세계의 모르는 글자 앞은 너무나 큰 세계였다.

지독하게 모르는 그 세계 속을 조금이라도 알아보기 위해 모르는 글자 속을 떠돌아다녔다.  

책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은 국민성을 보여주는 키워드다.

백야와 오로라의 밤을 보내야 하는 그들에게 책이란 우리보다 더 특별한 존재인지 모른다.

반딧불이와 눈, 한석봉 어머니의 떡 써는 소리에 맞춰 책을 읽어온 우리나라 사람들도 책에 대한 가치관이 특별한 편이겠지만 기계 문명이 닿지 않았던 시대에 낮이 닿지 않는 영원한 밤을 보냈던 그들에겐 더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어둠에 갇혀 책 속의 밝은 세계 또는 더 깊은 어둠 속을 다니는 그들에게 책이란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들의 세상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서점 지도 코너에 있던 한국 지도. 딱히 애국심이나 국뽕에 취하는 편은 아닌데도 한국인 1도 못만나는 도시에 있으니 지도만 봐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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