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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Jul 13. 2017

잠시 잠깐 모스크바

TSR의 끝이자 여행의 시작


러시아를 첫 여행지로 정한 건 어쩌다 보니 참 잘한 일이었다. 나에겐 없다고 생각했던 공산주의로 대표되는 내가 사는 세계와 반대되는 사상과 편견들. 사실은 나에게도 있었고 러시아는 그 모든 편견과 상대를 이해하는데 방해되는 생각을 털고 떠날 수 있는 출발점이었다.



4:41

새벽에 도착한 모스크바는 사실상 처음 보는 유럽이었다.

이후로 계속 보게 될 유럽 대도시의 풍경이지만 그때의 감동을 말해 무엇하리.

도시 풍경은 초보 배낭여행자의 마음을 흔들기 충분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부족한 잠도 자지 않고 싱숭생숭한 마음만 뒤적였다.

씻고 시내로 나가 둘러본 모스크바의 분위기는 유럽을 떠올리는 키워드 중 하나로 새겨졌다.

어쩌면 일주일 가까이 기차 안에서만 살다 본 풍경이 고향 땅이었어도 새롭게 보였을지도...


사실 러시아에는 관심이 없었다.

모스크바까지 와서야 러시아가 궁금해졌다. 

파리나 로마 같은 교과서나 방송에서 주입받은 도시들에 가려 러시아는 그냥 거대한 기찻길 정도로 생각했다.

자연히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핀란드로 가는 일정을 잡았고, 이것이 초보 여행자의 어이없는 실수였음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그래서 모스크바는 핀란드로 가는 기차를 타기 전에 급하게 둘러봐야 했다.

조금은 다급한 마음으로 모스크바 여행의 중심 붉은광장으로 향했다.

레닌의 묘부터 기타 등등 대단한 건물이 모여 있는 광장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바실리 성당이었다.

외관만 따지면 가우디의 성당보다 특이하다


유럽여행을 다녔으니 자연히 수많은 성당을 봤다.

너무 많은 성당을 보았기에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강렬한 성당은 별로 없는데 독특함으로 기억에 남는 2개의 성당 중 하나가 바실리 성당이다.

왜 테트리스란 게임에 뜬금없이 성당 이미지가 사용되었는지 딱 보면 알법한 그 생김새는 어찌 보면 괴이하기도 하다.

건축가의 눈을 멀게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왜 전해지는지 알 것 같았다.

어딜 봐도 강렬한 붉은광장은 당시 여기저기 공사 중이었는데 그런 정신없는 와중에도 요란한 생김새는 시선을 끌었다.

소련의 딱딱한 이미지가 벽돌마다 들어찬 붉은광장의 일괄적 질서를 깨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끊어지는 러시아 발음으로 이 앙증맞은 성당의 이름을 말할 수는 있을지 궁금하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더 장난감인 이 건물에 가까이 갈수록 생각보다 작고 생각보다 더 귀여웠다.

입장료를 받고 들여보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입구가 어디인지도 몰랐을 것 같다.


내가 러시아에 관심이나 애정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공산주의 국가라는 타이틀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반공교육을 교과서에서만 봤고, 국민학교가 아닌 초등학교에 다닌 세대다. 

물론 교과서는 북한이나 공산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엔 내용이 좀 부족했다.

휴전국의 국민으로서 어쩔 수 없는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 감정도 무의식에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붉은'광장이라니!

'레닌'의 묘라니!

너무나 빨갱이를 떠오르게 하는 색채의 단어들이다(물론 붉은광장의 붉은은 아름답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나는 북한 사람들이 뿔난 사람이라는 어이없는 정도의 오류는 없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웃지 않는다는 편견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입장료를 내고 줄까지 서야 하는 크렘린 궁전이나 레닌의 묘는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편견이 무너지기까지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붉은광장과 주변을 어슬렁 거리다 만난 맥도널드 덕이었다.

레닌의 묘에서 걸어갈 수 있는 맥도널드는 핑퐁외교도 완성하지 못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합일을 이루어냈다.

역시 전 세계인의 마음과 혀에 평화와 통일을 주는 것은 혀인가 보다.


멋진 러시아 건물에는 미국의 브랜드가 한가득이다

또 하나 러시아가 소련이 아님을 확신하게 된 것은 백화점 덕이었다.

바실리 성당을 보고 밥도 먹을 겸 들린 러시아 국영백화점인 굼백화점.

애플은 기본이고 온갖 브랜드가 들어와 있었다.

러시아 국영 백화점에 작은 미국이 들어온 기분이었다.

백화점이란 공간 자체도 상당히 자본주의적 설계가 된 공간인데 그 안을 채운 물건들은 공산주의란 단어 자체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말해줬다.

정치체제를 위해 노력했던 모든 것은 결국 물건 하나를 갖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보다 약한 것들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백화점을 기웃거리고, 밥도 먹고, 기차에서 잃어버린 아이폰 충전기도 하나 샀더니 어느새 핀란드로 가는 기차를 탈 시간이었다.

봤다고 말하기 민망한 러시아가 아쉬웠고 지금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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