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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Jul 02. 2017

이르쿠츠크에서 숨고르기

겨울왕국을 오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따라 달리면 8개의 시간대를 만난다. 한국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나 도착한 첫 목적지는 한국과 같은 시간에 있는 '이르쿠츠크'였다.   
    


TSR에서 제일 괴로운 게 뭐냐 물으신다면...

첫째는 씻지 못하는 것

둘째는 샤워하지 못하는 것

셋째는 나 자신이 더러운 것     


지금이야 여행 중엔 좀 더러워도 참고 내 땀냄새 정도는 애써 무시하는 게 가능해졌지만 장기여행이 처음이었던 그땐 정말 괴로웠다.

4인실, 2인실 같은 쾌적한 환경이 아닌 제일 싼 단체칸은 결벽증 환자라면 딱 12시간이면 사망이 가능하다.

중국인 대가족이 수시로 끓여먹는 수십 인분의 향신료 섞인 중국라면 냄새, 고향에 돌아가는 노동자들이 기차 연결 통로에서 피워대는 담배냄새 등등이 떠다니는 기차 칸은 사실 좀 가혹했다.

음식 냄새는 내가 끓인 짜파게티에서도 날 테니 먹지 말라 할 수 없고, 담배냄새가 괴롭지만 전날 밤 그들에게 얻어먹은 보드카 때문에 차마 소리도 못 지르는 나란 비흡연자는 손수건을 얼굴에 덮고 누워 있다.

무엇보다 이런 냄새를 온몸에 묻히고 머리를 3일 넘게 못 감으니 정말 죽겠더라.

이르쿠츠크역에 내렸을 때 배낭보다 '샤워'란 단어가 나를 더 무겁게 짓눌렀다.

간신히 숙소에 도착하고 샤워를 하니 살 것 같았다.    

샤워 생각에 공중목욕탕으로 보이던 이르쿠츠크 기차역

이르쿠츠크는 보통 알혼섬을 보들리는 도시다.

나도 알혼섬에서 1박 정도를 하고 나오려 했는데 짧게 보려면 안 보는 게 낫다는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알혼 입장은 포기했다.

대신 리스트비얀카에 다녀오기로했다.    

 

중앙시장에 가면 각지로 가는 미니 버스들이 가득하다.

주로 봉고차들이다.

그중 이르쿠츠크로 가는 차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가는 길이 매끄럽진 않아서 롤러코스터 부럽지 않은 승차감이었다.

내가 멀미를 안 하는 사람이라 다행이란 생각을 1시간쯤 하니 도착했다.     

리스트비얀카는 이르쿠츠크 근교 마을이다.

아주 작은 마을이지만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이 만나는 지점이라 독특한 경치를 만들어낸다.

여름에 갔다면 맑은 물이 찰랑거리는 모습과 주변 풍경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모습을 봤겠지만 봄은 내가 찾은 시베리아아직 눈길도 주지 않았다.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는 4월에도 여전했다.

한때 인터넷에 애니타임이라고 떠돌던 알혼섬의 사진과 엇비슷한 풍경이 리스트비얀카에도 펼쳐진다.

바이칼 호수의 겨울엔 전혀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두껍게 얼어서 맑고 투명한 얼음대륙이 만들어진다.

강 위로 차가 지나다닐 정도로 얼음이 꽝꽝 얼어있다.

내가 찾았을 땐 겨울왕국 개봉 전이었지만 사진을 다시 보니 겨울왕국이 생각난다.

사람이 별로 없었던 그날 얼음 속에 들어가고, 얼음 뒤로 걸어가고, 얼음 위로 지나갔다.

맑은 얼음 안으로 두터운 금이 보였다.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계절이라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수시로 들리기도 했다.

나는 얼음이 깨질까 두려웠지만 얼음 위로 트럭이 지나갔고 어린아이들은 뛰어다녔다.

이렇게 커다란 얼음을 얼릴 수도 녹일 수도 있는 거대한 자연이 이곳에 사람이 사는 일을 허락해줬다.

자연은 자비롭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강인하다.         


시베리아의 흔한 풍경
시베리아의 평범한 풍경
시베리아의 보통 풍경

얼음대륙에서 올라오면 기념품점과 식당들이 보인다.

러시아식 꼬치구이인 샤슬릭도 하나 사 먹고 작은 마을을 둘러봤다.

마음 같아선 하염없이 얼음 위에 있고 싶었지만 너무 추웠다.

시베리아와 북유럽의 혹독한 날씨를 몰랐던 나는 추위를 우습게 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다시 미니 버스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돌아왔다.     

     

이르쿠츠크는 두 달이 넘는 여행 중 가장 한국을 생각나게 하는 도시였다.

떠난 지 얼마 안 된 터라 아직 방랑에 적응을 하지 못했고 한국과 시차가 없었다.

한국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단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게다가 이르쿠츠크에선 한국의 중고버스를 수입해서 도색작업도 없이 그대로 시내버스로 사용한다.

이따금 지나가는 서울, 부산 같은 익숙한 지명이 적힌 버스가 러시아 글자 간판 사이로 지나가면 한 번씩 울컥했다.

이르쿠츠크 시내

백화점, 쇼핑몰, 시장 등 시내를 돌아보는 동안에도 한국 생각이 자연스럽게 났다.     

저녁을 먹고 11시 가까운 시간에 기차역을 다시 찾았다.

이번엔 모스크바로 향하는 두 번째 TSR을 탄다.

첫 번째 기차보다 조금 더 깨끗하고 조용한 기차를 탔고 다시 달렸다.

말 그대로 3박 4일을 달려 새벽 5시도 안된 시간에 드디어 TSR의 종착역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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