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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Jun 25. 2017

동해에서 러시아까지, 꼬박 하루

배 타고 유럽으로 떠나기



"인, 아웃 도시 어디로 잡았어요?"
"러시아, 터키요."
"오, 특이하다. 그럼 비행기는요?"
"저 여기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왔어요."
"우와, 그럼 러시아까진 비행기 몇 시간 걸려요?"
"몰라요 안 타봐서."
"???"
"동해에서 배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가서 거기서 기차 탔어요."
"......"


유럽 여행 중 만난 사람들과 대화 중에 여러 번 겪은 패턴이다.

그렇다.

난 유럽까지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았다.

이왕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로 했으니 출발도 비행기가 아닌 뭔가 그럴듯한 방법이 필요했다.

알아보니 동해항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가는 배편이 있었고 TSR 이용객들은 이 방법을 많이 쓴다.

그럴 만도 한 게 블라디보스톡 항구 바로 뒤에 기차역이 있다.

의심이 많아서 항구에서 기차역까지 어떻게 찾아가는지 많이 찾아봤는데 별다른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배가 항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차역이 보여서 그런 거였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동해항에 도착했다.

두 달 넘게 가출하는 딸내미 손에 김밥까지 쥐어서 충청도에서 강원도 동해까지 배웅해준 부모님을 마지막으로 보고 배에 올라탔다.

동해에서 러시아까진 데려다 준 DBS 크루즈


항구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한 러시아 글자들과 웃고 있어도 낯선 러시아 그대들 때문에 나란 쫄보는 먼 길이 조금 더 낯설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거의 없었고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러시아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한 달도 더 전에 학생 할인을 받아 배를 예약해뒀는데 특별할인이란 제목으로 당일에 구매하는 표가 더 싸다는 사실을 알고 약간 심기가 불편했다.

이래저래 언짢은 마음을 안고 수속을 마치고 배에 올라타 구경을 했다.

기대를 버리기 위해 노예 상선을 상상했기에 배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나는 제일 싼 표를 사서 객실이 아닌 도미토리형 단체룸의 침대 하나를 배정받았다.

생각보다 깨끗했으며 무엇보다 이용객이 없어서 수십 명이 쓸 방을 혼자 사용하는 셈이었다.

한동안 갑자기 떠나는 여행이 좀 무서워져서 몰래 찔끔거렸는데 배에 타니 조금 가라앉았다.

조금 더 신나 보려고 배 안의 매점부터 갑판까지 돌아다녔다.

배 안엔 작은 공동목욕탕이 있는데 이용객이 워낙 없어서 나 혼자 전세 낸 듯 탕을 차지하고 길게 목욕까지 했다.

관리를 잘하진 않아서 온도는 좀 차가웠지만 바다를 보면서 탕 안에 몸을 담그는 건 흔한 경험은 아니었다.

DBS 크루즈에서 판매하는 6000원짜리 한끼

동해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는 정박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꼬박 24시간이 걸린다.

날씨 때문에 도착 시간이 잘 변한다고 하는데 나도 1시간 정도가 더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배 안에서 식사는 따로 제공은 안되고 식사시간마다 방송을 하면 시간 안에 식당에 가서 사 먹는 방식이었다.

나는 가져간 음식이 있고 통 입맛이 없어서 배에서 내리기 전 마지막 식사만 사 먹었다.

배를 둘러보고 밖에 나갔다 들어왔다를 몇 번 반복하고 잠을 좀 잤더니 24시간이 훌쩍 지난다.

사실 자고 일어나서도 좁은 2층 침대 안에 있어서 러시아에 왔다는 실감은 나지 않았다.

바다를 바라보고서야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느껴졌다.

얼음이 떠다니는 러시아의 바다


아, 여기가 러시아구나.

한국은 개구리가 깨어난다 벚꽃 개화가 언제다 이런 잡담을 나눈지도 한참 지났을 4월.

4월의 바다에 얼음이 떠다니고 있었다.

바다에 얼음이 언다는 개념 자체가 책에서나 보던 거라 내가 진짜 어디 먼데 오긴 왔구나 싶었다.

이런 바다를 가지고 있으니 세계대전 때 러시아 전투가 그렇게 힘들었지.

배에서 내리기 위해 기다리며 밖을 보니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바로 그곳.

대망의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이 보인다.

긴장감에 여행의 설렘 같은걸 못 느끼다 이곳을 보니 조금씩 길떠남의 흥분이 시작되었다.

난 러시아 자체를 여행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오직 시베리아횡단열차가 목적이었기에 곧장 역으로 갔다.

혹시 배가 늦게 도착할까 싶어 기차 시간을 좀 늦게 예약해둔 터라 눈만 끔뻑거리며 역에서 시간을 죽였다.

한참이 지나 드디어 내 침대에 오를 수 있었다.

침대가 빼곡한 기차는 복잡하고 좁았다.

한쪽 창가엔 가로로 2층 침대가 늘어서 있고, 다른 창가엔 세로로 침대를 놔서 정말 빈틈이 없다.

이 복작거리는 객실 한 칸에서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내 주변을 꽉 채워서 탄 수십 명의 중국인 가족은 친척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한 달 가까이 기차를 타고 중국에서 러시아까지 넘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문가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스탄이 붙는 나라들의 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모여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서 희석하지 않은 보드카에 순록 통조림을 안주로 얻어먹기도 했다.

한무리 러시아 군인들은 기차 안 유일한 동양여자인 나를 너무나 신기해하며 번역 어플로 대화를 시도했다. 

세계지도를 펼쳐서 한국을 설명해줬더니 내리는 길에 비스킷과 순록통조림이 든 러시아 군용 식량 박스를 선물로 주고 갔다.

다소 더러운 기차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

이런 일들이 있는 동안 창 밖엔 그 유명한 자작나무가 자작자작 지나가고 있었다.

끝이 없다는 표현은 수학에서 무한대 기호를 배울 때나 쓰는 말인 줄 알았지 나무를 셀 때 쓰는 말인 줄은 이때 처음 알았다.

눈 속에 심은 나무가 하루, 이틀 계속 보이고 이따금 집이 보이기도 한다.

나무를 바라보다 반대편에 기차가 지나가면 몇 칸이나 되는지 세어 보기도 했다.

50칸쯤 세고도 한참을 지나가는 화물 기차를 보면 정말 이 나라가 얼마나 질릴 정도로 큰 나라인지 느껴진다.

100량이 넘는 화물 기차가 움직이는 게 가능은 한 것일까. 

중간에 내렸던 어느 역, 건물이 참 귀엽다


정차 시간이 긴 역에선 잠시 내려 그리운 바깥공기를 충전하고 팔다리를 쭉 펴는 시간을 갖는다
기차 안에서 파는 미지근한 맥주, 그러나 한겨울에도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로 더운 열차 안에선 미지근한 탄산에서 얼음의 시원함을 느낀다

그렇게 거의 70시간 가까이를 기차를 타고 갔다.

드디어 중간 목적지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비행기로 4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집에서부터 4박 5일이 걸려 도착했다.

도착은 작은 해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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