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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Jun 25. 2017

시베리아횡단열차 탈만해?

10년 만에 이룬 꿈


사람들이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탈만해?"라고 물으면 난 항상 같은 대답을 한다.
"평생에 딱 한 번만 해볼 만해. 두 번도 안되고 딱 한 번이야."


시베리아 횡단 열차(이하 TSR).

연관되는 단어는 '버킷리스트'.

버킷리스트에 담아 둔다는 의미는 현실성 떨어진다는 것.

게다가 5년 전엔 지금보다 더 멀리 있는 말이었다.


처음 TSR을 탈 생각은 초등학교 때 했다.

그게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저건 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더랬다.

될지 안될지도 모르면서 일단 한다고 마음먹은, 나 자신과 한 가장 무모한 약속이었다.


초등학교 때 텔레비전에서 본 TSR은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였다.

심지어 여행 프로그램도 아닌 VJ특공대로 기억한다(오래된 기억이니 프로그램 이름이나 자세한 내용은 왜곡이 있을 것이다).

정보 프로그램에서 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는 대학생들을 취재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하지만 당시 성우의 목소리까지 기억난다.

대체 난 생수통에 물을 받아 머리를 감던 피곤에 쩐 그들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쫓아간 걸까?


중학교 영어 시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영어로 영작하는 시간이 있었다.

엉망진창인 영어로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기였던 것만 기억난다.

그때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영어로 무엇인지 질문했지만 선생님도 정확한 답은 모르셨다(심지어 이때 발표한 단어가 틀렸다는 건 10년 후에야 알게 된다).

TSR의 인지도는 딱 그 정도였다.

그래도 난 TSR을 타고 자작나무 숲을 끝없이 달리는 상상을 끝없이 끝없이 했다.


결국 여행을 마친 지금 누군가 "시베리아 횡단열차 탈만해?"라고 물으면 같은 대답을 한다."

"평생에 딱 한 번만 해볼 만해. 두 번도 안되고 딱 한 번이야."


어설픈 마음으로 도전하기엔 무리가 있다.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 내려 비행기를 탄다는 괴담 아닌 괴담도 들어봤다.

나야 신이 내린 집순이, 침대 성애자, 준 히키코모리라 별 문제는 없었다.

사실 남들이 TSR이 답답하지 않냐고 물을 때 난감하다.

난 누가 내 사지를 결박하는 상황 정도가 아니면 답답해하지 않으며 혼자라는 사실이 심심하지 않다.

오히려 가만히 침대에 누워 시시각각 변하는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것은 내게 오락을 넘어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고 많으면 세상이 돌아가는데 문제가 있다.)

이런 나조차 괴로움이 한 번씩 저릿저릿 스쳤으니 TSR이 고문인 사람이 대다수 일 것이다.

특히 본인이 ADHD가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말자.

하지만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얼마나 광활하고 지금까지 내 발길이 닿은 곳이 얼마나 작은 점에 불과한지를 알기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세계에서 국토 면적이 가장 넓은 나라 러시아.

하지만 그 큰 땅을 갖고도 부동항을 찾아 전쟁을 벌여야 했을 정도로 척박한 환경을 느끼기에.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아파트에서 살았고, 서울에 와서 작은 땅에 살기 위한 도시인의 몸부림을 봤다.

그런 나에게 자작나무만이 살아가는 땅이 1주일씩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광활은 넘어 광막한 풍경이었다.

이 끝에 무엇이 존재한다고 상상하기 버거운 그런 풍경이 1주일 동안 열렸다.

내가 가려는 유럽은 이렇게 넓은 대륙을 견뎌야만 갈 수 있는 곳이구나.

이렇게 멀다면 내가 모르는 것, 낯선 것, 다른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야.

비행기로 날아갔다면 절대 알 수 없는 그런 사실을 깨닫는데 1주일이 걸렸다.

여행 시작에 깨달음을 얻어서 이후엔 어떤 새로운 것을 봐도 최소한 그것을 이상하거나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그들과 나의 다름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4월에 바다에 얼음이 얼어 있는 그들과 벚꽃을 기다리는 나는 차이나는 존재다.

  

의지가 약한 내가 뭔가 마음먹고 실제로 이룬 일은 거의 없다.

특히 10년 넘게 다짐한 일은 없다.

유일하게 딱 하나,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10년 만에 이룬 꿈이다.

TSR은 10년의 기대에 미치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기차 안의 1주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기이한 날들로 남았다.

나에겐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이상으로 신묘한 이야기가 그 기차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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