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 누구도 존재의 가치를 얕잡아 보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그 시간의 가치를 쳐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또 하나의 경력이 되어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이를 실천하고자 책을 쓰게 되었다.
<준규네 홈스쿨> 저자 소개 중 일부이다.
20대 후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고, 30대 초반 출산을 하며 자발적 경단녀의 삶이 시작되었다. 아이를 낳고 육아 관련서들을 읽으며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째는 아이들이 지닌 잠재력에 놀랐고, 둘째는 그런 아이를 과연 남의 손에 맡겨야 하는가? 였다.
그리고 지금 와 생각하면 다행스럽게도? 나의 직장운은 그리 좋지 못했다. 대학 졸업 때까지 공부 잘하고, 모범생으로 살아온 것에 비하면 직장은 늘 나를 열등감에 시달리게 했다. 변변하지 못한 직장이었을 때도 많았고, 회사나 팀이 공중분해되기도 여러 번. 그렇다 보니 당시 다니던 회사도 절대 관두지 못할 만큼 탐나거나 소위 잘 나가는 직장이 아니었기에 좀 더 쉽게 일 대신 육아를 선택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질이 강하고, 고집도 세고, 본인 의사가 명확하고, 낯선 환경에 대한 거부감이 큰 데다, 건강 상태까지 그리 좋지 못했던, 손이 많이 가는 아이를 키우며 직장 생활 못지않게 힘들었다. 주변에도 아이 키우는 것보다 회사 나가는 게 낫겠다며 육아 휴직을 중단하고 회사로 돌아가는 엄마들도 많았다. 하루에 몇 시간 씩이라도 어린이집에 맡겨야 한숨 돌리겠다는 엄마들도 많았지만 그마저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오감 자극으로 시냅스에서 신경세포들의 돌기가 서로 연결되며 폭발적인 뇌 발달을 이룬다는 이 중차대한 시기에 아이 한번 키워보지 않고 네일 아트 한 손톱이 더 중요할 것만 같은 20대 초반 선생님들이 가득한 어린이집에 내 아이를 위탁할 수 없었다. 영유아기 부모와의 애착형성과 정서적인 안정감이 중요하고 그 경험이 인생 전반에 걸쳐 정서적 토대를 이룬다는 이론들을 접하며 차마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길 수 없었다.
그렇게 내 발등을 찍듯, 아이 여섯 살 되던 해까지 육아의 굴레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아이를 키우며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들 탓에 한 권 두권 읽기 시작한 육아서적이 나중에는 교육 전문 서적들까지 확장되며 아이들 보육, 교육, 엄마의 역할, 가정에서의 경험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키웠다. 어린이집에 맡기거나, 학원에 맡기고, 뭔가 남의 손에 맡기는 게 가장 쉽지만 그만큼 탈도 많다는 생각을 동시에 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에서 실컷 뛰어놀게 하고, 상상력이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고, 책을 항상 옆에 두게 하려 노력하고, 아이 입장에서 공감하려 애썼다. 당시 내가 하는 일이 전업주부고 아이 엄마이다 보니 그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늘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나는 뭘 잘하지?'
'나는 아이가 커서 독립시키고 나면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하지?'였다.
남편에게도 입버릇처럼 묻는 것이 "당신이 보기에, 난 뭘 잘하는 것 같아?"였다. 대학 졸업 때까지 그런 질문 하나 없이, 그저 모범생이기만 했던 나는, 등골이 휘도록 일하며 자식 뒷바라지하는 부모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여기며 공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삐그덕 거리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품었던 의문이자 인생의 숙제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내가 잘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을 찾는 것.
아이를 키우면서도 여전히 그런 인생의 고민을 품은 채,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편한 방법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것에 중심을 두는 고지식한 엄마였고, 무엇하나 쉽게 넘어가지 않는 아이로 인해 기다리고 공감하며 나를 조금씩 바꿔야만 했다. 어느덧 아이가 6살이 될 무렵, 주변에서는 '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내지 않느냐', '그러다 사회성 떨어진다' 등등 참견의 소리들이 들렸다.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만족감과 조금은 쉬고 싶은 마음이 동해 6세 때 집 근처 유치원을 보내게 되었다. 몬테소리 교육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과 최하 10년 이상의 경력을 보유한 아줌마 선생님이라는 점, 운동복을 입고 아이들과 뛰어놀 준비가 되어있는 듯한 선생님 모습에 어느 정도 신뢰가 갔다. 뭘 가르쳐 준다고 포장하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아이는 아주 잘 적응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만의 시간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나서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갑자기 생긴 시간에 대해 불안감이 요동쳤다. 등원 후 유치원 근처 카페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커피를 마시는 아줌마들의 '활동?' 도 얼마간 참여해 보았다. 그럴수록 공허했다. 시간도 아까웠다. 집에 있어보면 아이와 있을 때와는 달리 자꾸 늘어지고, 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면 안 되겠다 싶어, 집안일도 일찌감치 해놓고 책도 읽고, 운동도 해보곤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이 또 다시스 멀스 멀 올라왔다. 이러다 진짜 아줌마가 되겠구나 싶었다. '뭐라도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덜컥 들었다.
우선 오전 시간에 한가로이 놀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나 같은 아줌마가 오전 시간만 일할 곳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 고학력자, 스펙 깡패인 엄마들이 즐비했지만그들이 오전 시간 동안만 일할 곳, 그런 업무 조건을 반기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편의점 계산 알바나 마트 알바 말고는 할 일이 없다고들 했다. 마주한 현실이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 되면 다들 다시 일하러 나갈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리 늦어도 3~4시면 끝나는 아이들을 누군가에게 위탁해야 하고, 그 돌봄을 알아보고, 퇴근 전까지 아이 맡아줄 곳을 생각하다 보면 결국 남의 손에 아이를 돌보게 하는데 번 돈을 고스란히 다 쏟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결국, 남의 손에 아이를 이리저리 맡겨 가면서까지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되고, 그 생각은 쳇바퀴를 돌듯 항상 제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뭔가 부업이 될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띈 것이 북촌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었다. 다행히 내가 사는 북촌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은 동네였고, 우리 집 주변에도 한옥 게스트 하우스들이 제법 많았다. 18평의 너무 좁은 한옥이긴 했지만 사랑방 하나만 운영해볼까 하며, Airbnb 같은 공유 숙박업에 대한 고려를 하게 되었다. 잠시 망설여졌다. 우리가 쓰기에도 작은 집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이 불편하고 좁을 테고,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늘어날 것은 자명했다.
그래도 일단 시작해보고, 도저히 안 되겠으면 그때 다시 고민해보자는 마음으로 사랑방에 있던 30년 된 낡은 피아노를 옮겨 공간을 확보하고, 호스트 등록 절차를 마치고, 손님을 기다렸다. 운 좋게 한 팀, 두 팀 손님이 오고, 그 과정에서 영어로 응대하는 법, 방 세팅하는 법, 숙소 안내 등 익숙지 않은 것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며 재미가 조금씩 붙기 시작했다.
운영을 잘만 한다면 생각보다 장점들이 많은 일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이렇게 손님을 받아서, 차곡차곡 모은 숙박 수입으로 1년에 한 번 나도 여행 갈 여유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통해 문화체험도 하고, 영어 공부도 되니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아 보였다. 다행인 것은 아이도 집에 오는 낯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며 교류도 하고, 언어 체험의 기회도 생기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다.
집을 좁게 쓰는 불편함만 감수하면 집안일을 조금 더하는 정도로 다른 아르바이트나 일을 하는 것에 비해 육아와 병행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 장점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게 7년 넘도록 슈퍼 호스트 자리를 지키며 수백 명의 외국 관광객들을 손님으로 받았고, 그들과 쌓인 추억, 가슴 찡한 스토리들이 수없이 생겼다. 당초 계획대로 그 수익으로 일 년에 한 번, 한 달씩 아이와 함께 해외 배낭여행을 6년 넘게 갔으니 이 정도면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에너지가 넘치는 나는 에어비앤비를 6개월 정도 운영하자 자리가 조금 잡히는 듯했다. 수시로 울리는 영어 문의 문자도 어느 정도 매뉴얼이 생겨서 응답에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스케줄 관리만 잘하면 손님들 편의를 봐주면서도 내 시간을 충분히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그렇게 루틴으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자 두 가지 고민이 다시 들기 시작했다. 에어비앤비를 조금 확장해서 직장인만큼 벌어볼까?, 아니면 일이 될 만한 다른 것들을 좀 배워보아야 하나?...
평소에 배워보고 싶었는데, 우물쭈물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하지 못했던 것들이 뭐였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딱히 그런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우연히 우리 집 근처 단골 카페에서 하는 커피 클래스를 발견하게 되었다. 카페를 차릴 생각은 아니었지만, 언젠가 닥칠지 모를 나의 인생 2막을 위해 뭐라도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하루에 두 세잔 정도를 마셔야 성이 찰 만큼 커피 없는 인생을 생각해 보지 못했으니, 일단 이렇게 좋아하는 거라도 뭐가 되었든 시작해보자 싶었다.
처음에는 취미 클래스로 개설된 핸드 드립 과정을 들었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요 커피라는 놈이 신기해서, 내리는 스킬에 따라 맛이 달라지고, 물 온도, 로스팅 포인트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 등을 경험하면서 커피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분석적인 사고를 좋아하는 나의 적성에 딱 맞았다. 일종의 음식의 과학같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도 조금씩 만나며, 아이가 중학교 갈 때쯤이면 엄마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더라는 선배 엄마들의 충고를 여기저기서 듣게 된다. 그러면서 내 마음속에 작은 목표 하나를 세워놓게 되었다.
아이 6학년 때쯤 나의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내 손이 덜 필요할 때쯤인 그때, 서서히 부모로부터 조금씩 독립을 위한 준비를 시작할 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도 자기 인생을 잘 살고, 나도 내 인생을 잘 살기 위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엄마로서의 인생 전반을 성실하게 아이에게 오롯이 내어주고, 아이 중학교 갈 때쯤부터 본격적으로 어떤 일이든 하며, 내 인생 후반을 독립적으로 살아야겠다는 막연한 계획과 희망을 품었다. 적어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 키우다 쓸모 없어져 버렸구나...'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커피를 배우고, 기계 다루는 법도 배우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1년 정도 하고, 로스팅까지 배웠다. 그렇게 커피와 관련된 것들에 관심을 둔지 3~4년이 흘렀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생 펑크가 나면 대타로 가기도 하고, 같이 커피 배웠던 사람들 가운데는 카페를 창업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나는 섣불리 시작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다'였다.
아이가 아직 어리고, 시시각각 아프기도 하고, 아직은 내 손이 필요한 시기였다. 내 성격상 시작한 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고,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테고 만족스러울 만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상황으로 인해 히스테리를 부릴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그 상황들은 아이, 남편, 집안일 등 불편한 상황들이 도미노처럼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5~6년에 걸쳐 발을 담그고 있던 커피는 에어비앤비로 온 손님, 집을 찾는 손님들, 그리고 나를 위한 고급 취미?로 자리매김했고 여전히 커피사랑 중이기도 하다. ^^
그렇게 에어비앤비로 손님을 받고, 여름이면 아이와 한 달씩 여행을 다니고, 카페를 들락거렸지만 채워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초등 1학년을 다닐 때부터 아이는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물었고, 2년 간의 힘든 시간을 보내며 결국 아이가 초등 3학년 여름부터 홈스쿨링을 하기 시작했다. 다시 아이와의 생활 시작이었다.
홈스쿨링 결정 전까지 2년여 동안 아이 학교와 관련한 고민의 과정들은 <준규네 홈스쿨> 책에도 나와 있으니 간략히 넘어가겠지만, 그 시간 동안 나 스스로 가장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혹시 아이가 하나라서 내가 아이 교육에 너무 몰입해 있나?'였다. 2년간 아이 학교와 교육 대안에 관한 고민을 하루도 떨친 날이 없을 정도였다. 이러다 학교 다니는 6년 내내 이런 고민을 하겠다 싶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학교를 관두게 할 용기가 나지 않아 정면으로 문제를 들여다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그럴수록 내가 집중하고 몰입할 대상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다음은 영어공부였다. 대학시절 어학연수를 너무 가고 싶어 한이 맺혔던? 나는 에어비앤비를 하며 생활 속에서 매일 영어를 사용하게 되는 환경이 너무 즐겁고 감사했다. 그렇게 영어 실력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도 같았지만 동시에 실력이 향상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느끼기도 했다. 미국에서 왔던 손님 한 명과 인연이 닿아 Language Exchange를 하며 영어 공부를 계속하고는 있었지만 뭔가 제자리걸음인 느낌이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 프로그램이었다. 테솔은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학습 방식에서 가장 좋은 것이 누군가에게 가르쳐 줄 수 있으면 제대로 아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며 한국외대 테솔 대학원 6개월 단기과정에 도전하게 되었다.
지원 원서를 쓰고, 영어 면접을 준비하고, 외국인 교수로만 구성된 수업을 들으며 일상이 매일 도전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 과정을 정말~ 너무도 열심히 공부했다. 최선을 다했고, 남들이 보기에 나의 공부 목적이 뭔가 이상해 보인다고들 했지만, 나 스스로 즐거웠다. 설거지하며 과제 구상을 하고, 청소기를 밀며 머릿속으로 숙제를 해야 했지만, 집안일이 아닌 무언가에 몰두하고 그 일들을 잘 해내기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어디 가서 영어 교사할 것도 아니면서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아이와는 동떨어진 누군가와의 커뮤니티에서 달라진 내가 조금씩 보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발견한 나는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아줌마이기에 가능한 것도 같았고 아이를 키우며 조금은 달라진 자아를 확인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테솔 대학원에서 과정을 마치고 한 달간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이 있었다. 과정 중에 미국의 공립학교의 Observation프로그램이 2주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준규를 보며 고민이 컸던 나는, 주저 없이 한 달간의 미국 인턴십 프로그램을 신청하게 되었다. 책으로만 읽는 해외의 교육환경 말고, 직접 눈으로 교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떻게 다른지... 우리나라 교육 환경보다 어떤 것들이 나은지...
나 혼자 미국에 가 있는 동안 9살 아들내미의 거처가 걱정이던 나는 동생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 동생은 노르웨이 친구 집에 얹혀살며 석사과정을 하던 중이었는데, 마침 논문 제출을 막 마친 터라 한 두 달 시간이 있다는 말에 덥석 조카의 노르웨이행을 부탁했다. 내가 미국으로 출발하는 날, 9살 준규의 목에 가디언 목걸이를 걸어 노르웨이행 비행기를 태워 보냈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각자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에어비앤비 공유 숙박 운영, 카페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커피 로스팅, 일주일에 세네 번 대학원 수업과 과제, 집안일과 아이 돌보는 일을 동시에 하던 나는 미국에서 한 달 동안 휴가를 와 있는 것 같았다. 밥 먹고 학교에서 세시까지 수업 들으며 공부하는 일만 하는 단조로운 하루를 보내려니 너~~ 무 쉬웠다. 밥 먹고 공부하는 일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싶었다. 그렇게 미국 공립학교도 경험하고, 한 달간 공부만 하며 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다.
아이의 학교 문제에 너무나 몰입하고 있는 것 같아 애써 외면하려고 이것저것 나를 들볶으며 배우고, 일했지만,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해결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아이는 학교에서 점점 더 지치고, 시들어갔다. 결국 미국에서 한 달간의 충전을 한 덕분인지, 고슴도치 같이 가시를 세운 아이가 보였고, 시한폭탄 같은 아이를 보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와의 의논 끝에 홈스쿨링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초등 3학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다시 집에서 아이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첫 해는 학교에서 멍이 들 데로 들어버린 아이를 보듬고 다독이며 그 당황스러움을 추스르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학교라는 거대한 배에서 내려 작은 보트를 타고 망망대해를 마주하는 기분이었지만 아이 앞에서 그 불안감을 들키지 않으려 무진장 애써야 했다. 그렇게 온갖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한해, 두해 홈스쿨링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아이의 홈스쿨링을 지켜보며 옆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는 본보기가 되는 것 말고는 없었다. 내가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내가 하루를 규칙적으로 보내고, 일 년 계획에 맞춰 한 달을 계획하고 하루를 계획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방법 말고는 아이를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홈스쿨링 첫 해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아이에게 뭐든 시도해 보라는 말로 끊임없이 격려했지만, 그 말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을 때가 수 없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나 혼자 몰래, 머릿속으로만 차곡차곡 쌓아뒀던 <준규네 홈스쿨>의 초고를 쓰게 되었다. 언젠가 용기를 내어 책을 내 보자며... 육아 이야기, 에어비앤비 이야기, 한옥 이야기를 썼다. 아마도 홈스쿨링 하는 아이 옆에서 나태해질 수 없어서 그 많은 시간을 책상에 앉아 있다 보니 쓰게 된 것도 같다.
남들 모르게 초고를 써놓고도, 여전히 나는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뭘 하며 살아야 할까?
'나는 뭘 잘하지?'라고...
홈스쿨링을 한 지 2년쯤 접어들자 아이도 예전처럼 밝아졌고,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심심한 시간들을 채우기 위해 아이는 의욕적으로 놀기 시작했고, 학교 가기 전 아이가 시간을 보내던 그 패턴을 조금씩 찾은 듯했다. 공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재미있는 것들로 하루를 채워나가길 바랐다. 밝고 건강하고, 하루가 행복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떤 때는 한 달 내내 종이만 접고 앉아있을 때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탁구에 미쳐 탁구장 문턱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넘기도 했다. 고가의 로봇이 갖고 싶다며 반년이 넘도록 로봇 만들기에 심취해 있기도 했다. 따로 하는 공부라고는 수학 공부 말고는 없었다. 나머지는 독서나 생활에서 채워지는 공부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아이 편에 서서 맛있는 밥해주고, 안아주고, 같이 옆에서 걸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학교라는 틀 속에서 숨쉬기 어려워하던 아이는 집에서 지내며 다시 펄떡거리는 날생선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아이도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되어 소중한 아이만의 경험과 스토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쌓여있는 종이접기를 팔아보겠다며 일일장터에 참여하기도 하고, 장터에서 만난 꼬마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미르이 종이 접기라는 유튜브도 시작하며 '구독자 20명 기념' 종이접기를 업로드하고, 운 좋게~ 영재 발굴단에 로봇 영재로 소개도 되고, 자신감을 조금 얻은 아이는 북촌 마을 서재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종이접기 교실을 열기도 했다. 로봇부품을 지원받아 원 없이 로봇을 만들어 보기도 하지만, 눈이 오는 날이면 동네 꼬마들을 모아 눈 치우는 사업을 구상하며 노는 '동네 백수?' 다운 생활도 여전히 이어 나갔다.
심심하면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산책, 도서관에 가서 신간 만화책 보기, 자전거 타고 인형 뽑고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가기, 엄마 눈 피해 탁구장에서 온라인 게임하기, 마당에서 해바라기 하며 책 보기 등 하루하루 일상이 너무 신이 나 보였다. 늘 뒷전이던 공부를 조금씩 하기도 했지만, 자기만의 공부법을 찾아 여러 가지 시행착오들을 경험하며 혼자 하는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스스로 느끼는 듯했다.
남들하고는 너무 다른 길이었지만, 행복해 보였다. 그걸로 이미 충분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교육 전문가분들이 몇 있었는데, 그분들이 매번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준규 엄마, 준규 키운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지 그래요?"
교육 현장에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교육 방식을 실제로 실천하는 사례라며 내가 준규를 키운 방법을 통해 사교육 하지 않고도, 꼭 학교에 잘 적응하지 않더라도, 아이가 이렇게 행복하고 자기 분야를 찾아가며 잘 클 수 있다는 것을 공유해야 한다고 용기를 주셨다. 매일 학교 마치고 학원으로 걸어 들어가며 늦은 밤까지 몸도 정신도 피폐해지는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부모들에게 충분히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직 크고 있는 아이 이야기를 세상에 꺼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처럼 소심하고 조심성 많은 사람이 하기에는 위험하고 시기상조 같아 보였다. 아들 팔아 책 쓰는 것 같아 별로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고민 진행 중이었다. '나는 뭘 잘할까'
어느 날 그간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혹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뭘 잘하는지 '짠~'하고 나타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 듯, 긴 시간 동안 아이를 키우기 위해 원칙을 지키려 애쓰고, 사교육에 현혹되는 엄마들을 보며 아이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마음먹으며 실컷 책 보고 그저 공부 그릇을 키워주면 충분하다 여겼던 하루하루들. 공부는 본인이 원해야 할 수 있는 것이고, 어린 시절에는 학원 가서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시간보다 놀이터에서, 여행길에서 느끼는 아이의 노는 시간에 더 큰 가치를 두며 아이를 키워 온 그 수많은 시간들 속에 내가 있었다. 그 시간이 나였고, 내가 지난 10년 넘게 최선을 다해 온 것들이었다.
자신감이 생긴 것인지, 조심성이 없어진 건지... 용기가 조금 생겼다. 그동안 아이를 키우며 원칙을 지키고, 아이 입장에서 공감하려 애쓰고, 교육과 관련된 책을 읽으며 최선을 다했던
그 시간이 어쩌면 내 경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잘하는 것을 찾을 것이 아니라, 지난 12~3년간 단 한 번도 생각의 끈을 놓지 않고 몰입해 있던 자녀교육에 관한 것들이 내가 잘하려고 애쓰고, 잘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되돌아보게 되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아주 근본적인 답을 찾는 지루한 시간들 속에서 아이도 나도 많이 성장해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책으로 인해 혹시라도 내 아이의 미래에 대해 사회적인 시선으로 '성공'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결같이 나를 칭찬해 주는 남편의 몫도 컸다. 그 칭찬으로 인해 나는 그 누구보다 자존감 가득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아이로 인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준규네 홈스쿨> 책을 2019년 6월,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제목만 보면 홈스쿨링 권장 도서 같지만, 집이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독자층을 분명히 해야 하는 출판사의 사정도 포함되었다. ^^
다만 부모들이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는 어떤 부모인가'라고 자문할 수 있는 책이길 바랐다. 그렇게 부모 자신을 한번 더 들여다보고, 아이들 눈높이에서 내 아이를 공감할 수 있길 바랐다. 그리고 이 책으로 인해,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괜찮다 말하고 싶었고 세상이 바뀌어서 달라졌다고들 하지만, 남들이 다 하듯 학원 보내고 공부하라 채근해서 아이를 우등생으로 키우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잘 커나갈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막상 학교 밖에 나와보니, 학교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나를 끼워 맞출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자기만의 세계를 용기 있게 만들어 가도록 응원해주는 것이 나의 옳은 역할이었다. 기관 부적응이 인생의 실패가 절대 아니며, 남들과 다른 길에서 오히려 자기만의 궤도를 만드는 것이 곧 21세기형 미래 교육의 단면이라는 생각도 했다. 맨날 백수처럼 놀 것만 같던 아들이 조금씩 조금씩 자기만의 꿈을 키워나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고, 실패할 것 같으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던 아이는 온갖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해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가는 감동적인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이 아이가 결과보다 과정에서 얻는 성장들을 보며 뭉클했다.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건축과 출신에 글도 몇 번 안 써본 내가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지난 12년 동안 놓지 못했던 긴 고민과 생각들 때문이었다. 조금 더 깊이 고민하고, 아이를 보며 가졌던 호기심들을 채워가며 그간의 시간들을 정리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책은 완벽할 수 없었지만, 내 부족함을 인정하고 용기를 내 쓰게 된 책으로 인해 한번, 두 번씩 강연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홈스쿨링 초기에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 막막하고 불안했던 그때의 절실했던 기억 때문에 <홈스쿨링이 궁금하다면...> 모임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지난해 1차 모임을 가졌다. 올해도 8번의 모임을 계획하고 있다.
아이가 6학년쯤 내 인생의 후반부를 위해 조금씩 바깥세상에 발을 내딛겠다는 계획이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결혼을 늦게 한 친구들은 건축사도 따고, 대학에 강의도 나가며 자기만의 커리어를 키워나간다. 그들에 비하면 마트 문화센터에서 일일 강연하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난 감사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생기고, 내가 한 경험들로 인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글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엄마라는 직업은 그 누구도 가치를 쳐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역할을 대신하려면 돌봄, 조부모님까지 동원하면서도 아이는 애착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정서적으로 힘들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엄마들 스스로 '엄마의 시간'을 공들이고 노력하는 만큼 아이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것만큼 집에서 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더 책임감 있는 하루를 보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그 시간들이 모여 엄마라는 직업에도 경력이 생기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