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규네 홈스쿨 May 10. 2020

아이라는 거울은 나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장대비가 눈앞을 뿌옇게 흐리며 억척스럽게 쏟아지던 날이었다. 작은 초등학교 입구, 솟을대문 밖 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우산을 쓰니 시선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한 손에 트랜스포머가 그려진 작은 우산을 들고 준규 수업이 끝날 건물 앞까지 잰걸음으로 올라갔다.  잠깐 사이였지만 측은한 눈빛을 넘치듯 담아, 눈인사를 건네는 다른 학부모들에게 짐짓 편한 척 답례인사를 하며 서둘러 지나쳤다. 건물 앞에 우산을 받쳐 쓰고 아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아이 반 여자 친구 한 명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천진하게 물었다. 


"준규 정말 학교 관둬요?" 그렇다고 대답하자, 다시 묻는다.

 "왜 학교 그만둬요? 홈스쿨링은 왜 하는 거예요? 그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준규가 학교를 관두고 홈스쿨링 한다는 소식에 학교생활이 당연스러웠던 아이들이 혼란스러울까봐 걱정을 하고 있던 터라 대답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저 애매한 웃음으로 무마하며 동문서답을 하고 자리를 피했다. 잘 지내라는 말과 함께...


이윽고 건물 캐노피 아래에 준규 얼굴이 보였다. 옆에는 아이의 단짝인 준모가 자기 덩치만큼이나 불룩해진 준규 가방을 앞으로 메고 나란히 서  있었다. 초등 3학년 2학기용으로 받은 교과서와 사물함 보관품들을 모두 챙기니 가방 하나로도 부족해 준모가 자기가 들어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것이었다. 준모는 뒤로는 자기 가방, 앞에는 책이 가득 채워진 준규 가방을 메고, 짐이 가득 든 보조 가방을 가슴에 끼듯이 들고 있는 준규에게 우산까지 받쳐주며 우리 차까지 에스코트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두 녀석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나의 마음은 날씨만큼이나 소란스러웠다. 


준규의 초등학교 마지막 날이 외롭지 않도록 든든히 옆자리를 지켜준 친구와 작별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탔다. 차로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를 달려 집 앞에 도착했다. 만세 삼창을 할지도 모른다는 예상과는 달리 아이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3년 간 매일 아침 학교 가는 길이 지옥 같다고 말할 만큼 힘들었던 학교를 관뒀으니 홀가분해할 줄 알았는데, 본인도 이 상황이 예사로운 일은 아니라 여겨서인지 얼떨떨해 보이고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집 앞에 도착해 짐을 내리려고 보니 비가 더 거세져 바로 내렸다간 옷이며 짐이 모두 젖을 지경이었다. 비가 조금 잦아들 때까지 차에 있기로 하고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란히 앉아 마지막 날의 소감은 어땠는지, 서운하지는 않았는지, 날아갈 듯 좋았는지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초등학교의 마지막 날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다 담임 선생님이 반 친구들에게 롤링페이퍼 쓰는 시간을 마련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친구들이 써주었다며 가방에서 코팅된 색지들을 꺼내 보여준다. 종이는 색색마다 반 친구들의 진심 어린 메시지들로 가득했다. 어린 마음에 준규가 학교를 관두는 게 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평소 트러블이 잦았던 남자 친구 녀석들의 고해성사들이 꽤나 많이 쓰여 있었다. 반면 여자 친구들은 '네가 없으면 이제 우리 반에 개그맨은 없는 거니'와 같은 말로 준규의 부재에 대해 아쉬움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아이 앞에서 담담한 척 롤링페이퍼를 읽어가던 중 나는 더 이상 울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평소 본 적 없는 나의 울음에 아이도 덩달아 울음이 터져버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달궈진 기름에 생선을 튀기는 것 같은 요란한 빗소리는 우리 모자의 서러운 울음소리를 영원히 세상에 들리지 않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같았다.


솔직히 학교를 관두기로 결정하기까지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인생 대부분의 일들이 딱 한 가지 이유로 규정할 수 없듯, 단순한 친구 문제나 담임 선생님의 문제라고 치부하기엔 더 복잡한 이유들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서럽거나 힘들어지면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그 문제의 원인을 돌리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에게 서운함이 일부분 있었더라도, 그들 때문에 도망치듯 학교를 나온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였더라면 더더욱 학교를 다니며 부딪히고 풀어야 할 문제였기에...


그렇더라도 아이 마음 한구석에 서운함 내지는 화나는 감정으로, 반 친구나 선생님에게 앙금이 남아있지는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그 롤링페이퍼를 보며 한편으론 뭉클하고 감사했다. 좋은 끝맺음을 할 수 있게 도와준 것 같아서...  아이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네가 나에게 하소연하던 것들이 대부분 진짜였구나' 하는 미안함도 나의 울컥함에 한몫했다.


어디까지나 학교 대신 홈스쿨링을 결정하게 된 것은 준규의 더 나은 일상과 행복한 유년시절을 위해서였다. 하루하루가 지옥같이 느껴질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해 날이 갈수록 본인을 스스로 문제아라고 받아들이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이 학교에서의 마지막 날을 따뜻하게 마무리할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충분히 좋은 시작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감사함, 속상함, 앞으로의 불안감들이 뒤섞여 담담한 척 애쓰려던 내 마음은 봇물 터지듯 눈물로 솟구쳐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통곡에 따라 울며 당황했을 아이를 안심시켜야 했다. 한참을 울고 아이를 꼭 껴안고 말했다.  "엄마는 너희 반 친구들이 용기 내어줘서 감사해. 그래서 눈물이 났어. 그동안 학교 다니면서 많이 힘들었지? 엄마가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아서 너를 너무 오랫동안 힘든 곳에서 버티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때론 친구들 때문에 속상했던 적도 많았을 텐데, 친구들도 이렇게 솔직하게 너에게 사과의 편지 써준 거 보면 큰 용기 낸 거라고 생각해. 그래서 엄마가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나네.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


그렇게 아이도 나도, 학교에서 힘들어 도망치듯 나온 것이 아니라, 더 나은 하루를 위해 능동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을 되새기며 이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보자고 다짐했다.

2~3일 동안 몸살로 몸져누운 남편과 급체로 열이 이틀 동안이나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이 아프고 무거웠다. 나야 3년 가까이 아이 학교 생활을 옆에서 지켜보며 내색은 못했지만, 하루도 고민의 끈을 놓지 못하다가 상황을 종결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음에 한편으로는 속 시원하고, 마음이 오히려 고요했다. 하지만 그저 내가 잘하고 있다고 응원만 하던 남편도 이런 결정까지 올 수밖에 없었음에 속상한 듯했고, 학교를 관두길 그토록 원했던 아이 또한 결정의 무게를 감당하기엔 버거운 듯 했다.  


그렇게 가시처럼 아픈 9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홈스쿨링의 첫 시작은 쉽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앞으로의 불안한 시간에 대한 생각들로 수없이 모래성을 쌓고 허물었지만, 아이에게 그 불안한 시작을 들키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평소처럼 일어나 밥먹고, 책보고, 아무렇지 않은 듯 내색하지 않고 1~2주를 보냈다. 아이는 덩달아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나 실컷 책도 보고, 종이도 접고, 레고도 만들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10일쯤 지났을 무렵 아이가 아침에 일어나 내게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엄마, 우리 홈스쿨링 하는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라고... "뭘 해야 할 것 같아?"라고 묻자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홈스쿨링인데 그래도 계획도 짜고, 공부도 하고 그래야지, 이렇게 마냥 놀 수만은 없지 않을까요?" 그렇게 물어준 아이가 감사했고, 서두르지 않기를 다행이라 여겼다. 나름 순조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조로운 출발에 비해 홈스쿨링 일과의 시행착오는 예상보다 만만치 않았다. 태어나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학교 선생님 노릇이며, 반 친구 노릇, 학교장 노릇, 엄마 노릇까지 동시에 해야하는 일은 때로는 그 무게감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더 힘든 것은 무기력함과 반항감으로 뭉쳐진 아이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첫 일 년은 뭔가 해보려는 나의 의지가 끊임없이 화살이 되어 돌아왔고, 일종의 번아웃 상태였던 아이 모습에 한없이 울어야 했다. 


히말라야 산꼭대기에 사는 그 어떤 아이보다도 진취적이고, 4차원에 재기 발랄하고, 밝고 호기심 많던 아이 모습은 온 데 간데없었다. 시들고, 지치고, 무기력하고, 수동적이고, 때론 반항적이고, 자신감과 자존감은 먼지처럼 흩날려 어디론가 사라진 듯했다. 친구들과 만날 기회를 만들어 보고자 여러 가지 제안들을 해보고, 신나게 배워볼 만한 것들을 권유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저 아이의 시간 밖, 거리를 두고 어딘가에 조용히 앉아 옆을 지켜주는 것 말고는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화도 나고, 학교에 대한 원망에서 나아가 이 나라에 태어났다는 것마저 저주스러운 날들도 많았다. 


10년째 육아를 핑계로 직장생활을 하지 않은 내 모습, 경단녀라는 꼬리표를 달고 어디서부터 어떤일을 시작해야하는지 모를 난감함으로 "나는 뭘 잘하는 것 같아?"를 남편과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면 항상 답은 같았다. "너는 뭘 해도 다 잘할 것 같아. 일단 시작을 해봐~"였다. 이렇게 묻기만 할뿐 어떤 일도 시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내 DNA가 아이에게 전가된 건 아닐까 자책하게 되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서 아이에게  뭐든 해보라고 입으로만 격려하는 엄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행복한 사람으로 컸으면 하는 내 바람이라면, 나 또한 그런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고 있어야 마땅했다. 그렇게 나는 무기력한 아이의 옆을 지켜봐야만 했던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준규네 홈스쿨' 책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던 적도 없었고, 건축과 출신에 결혼 전 건축 관련 일을 잠시간 했던 게 전부였던 나에게 글을 쓴다는 일은 생소했지만, 그간 내가 아이를 키우는 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들, 내가 공부했던 것들에 대해, 아이들과 부모들에 대한 내 시선에 대해 조금씩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조금씩 회복의 시간들을 거치고, 작지만 희망의 새순들이 아이 몸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아이는 조금씩 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나는 내 시간의 테두리를 만들고 그리로 들어가 아이 옆자리를 지키며 시간을 견뎠다. 어느덧 홈스쿨링을 하며 시행착오의 시간들을 보낸 지 2년이 다 되어가던 무렵, 우연찮게 SBS 영재 발굴단에서 연락이 와, 로봇영재로 소개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아이는 TV 출연에 신이 나 했지만, 나에게는 남들과 달라 한없이 불안했던 마음을 상쇄시킬 수 있는 감사한 기회이기도 했다. 나는 내 아이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던 것인데, 내가 그저 남들과 달랐던 거지 틀렸던 것은 아니구나, 그동안 잘하고 있었구나...라고 세상으로부터 토닥임을 받은 기분이었다. 자식을 낳고 옳다고 믿고, 지키려던 신념들은 다른 부모의 아이들 키우는 모습을 보며 한없이 흔들리기 마련이지만, 흔들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버티고 있던 나의 뿌리를 단단히 지탱해주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이후 초고는 용기의 날개를 달고,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도움, 지지 덕분에 <준규네 홈스쿨>이라는 책으로 2019년 6월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초고를 출판사마다 보내고 답조차 없는 거절을 당하기도 하고, 너무나 비주류인 이야기라 세상 잣대로 아이의 성장 결과가 더 그럴싸해야 책을 낼 수 있겠다며 거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의 소신 있는 이야기에 손뼉 쳐주며 내 이야기가 필요할 부모들을 위해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만나 출간 작가라는 타이틀과 책으로 인해 부모 강연을 조금씩 하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그동안의 나라는 사람은 절대 나의 부족함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고, 내 사적인 이야기조차 누군가에게 속시원히 털어놓은 적도 없었고, 더구나 그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아 작가가 되보겠다는 생각 한번 해본 적 없었다. 또한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다 옳거나 타인과 같을 수는 없기에 반대편에 서게 될 사람들로부터의 싫은 소리를 듣는 것조차 두려워 그 어떤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뭐든 시작해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나부터 시작하는 용기를 보여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더 멋진 엄마, 더 멋진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것만이, 내가 세상에서 지치고 멍든 이 아이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동안 내가 살았던 인생이 넉넉지 않았던 형편 덕에 조금은 삐딱한 시선도 많았고, 회의적이고 시니컬한 부분들로 가득한 나였지만, 내가 그간 그래 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수만은 없었다. 무엇보다 아이가 내 모습을 닮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고, 두려웠다. 달라져야 했고, 시작해야만 했다.


그렇게 내가 조금씩 달라지기 위해 애쓰며 용기 내어 쓰게 된  <준규네 홈스쿨>은 세상을 향해 감사한 가득한 사람으로 나를 바꿔놓을 때가 더 많았고, 세상에 내가 아주 작더라도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에 더없이 내 가슴은 풍성해졌다. 


힘든 시간, 수없이 접어내던 종이접기의 시간들이 쌓여 아이는 얼마 전 <게임 종이접기> 종이접기 책을 출간했다. 13살에 꼬마 작가라니! 너무 부러운 인생이다. 또한, 가고 싶은 학교가 있어서 중학교를 일단 가야겠다고 했다. 남들이 가니까 당연히 가는 학교가 아니라 자기 인생에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아이. 이미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 아이는 충분히 잘 크고 있다고 생각한다.  


4년 전 어둠 속의 터널에 있을 때는 이 시간을 어찌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나의 또다른 자아를 비추는 거울 속 아이가 원동력이 되어, 아이와 나는 숱한 시작들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 시작들이 트리거가 되어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인생의 주인으로 여기까지 걸어왔고, 앞으로도 계속 걸어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경단녀 탈출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