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이야기로 사람과 이어졌다
2012년, 대학교 식품학과에 입학
솔직히 말하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천안권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가는 학교’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학에 간다는 선택 자체가 나에겐 작은 도전이었다.
군 복무 시절, 싸지방에서 페이스북을 보다 한 동기의 게시물을 보게 됐다.
대외활동을 하는 모습이었다. 평소 관심 있던 친구였다. 자연스럽게 궁금해졌다.
‘대외활동이 뭐지?’
2015년 전역 후,
글 쓰는 취미가 생겼고 작은 블로그를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롯데제과 ‘스위트 피플’ 대외활동에 지원했다.
운이 좋았다. 제과 자격증을 가진 남자 지원자가 나 하나였다고 했다.
그렇게 청일점으로 활동에 참여했다.
단체복, 영상 기록, 프로그램 구성까지...!
그땐 몰랐다. 모든 대외활동이 다 좋은 줄 알았던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목표는 단순했다. ‘이력서 한 줄’
남들보다 조금 앞서 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강원도 지역아동센터 ‘연당 별빛’을 찾았을 때,
아이들과 과자로 집을 만드는 시간을 있었다.
한 아이는 꼬깔콘으로 마녀 모자를 만들었다.
빼빼로로 뾰족하고 무서운 느낌을 표현했다.
작은 손끝에서 피어나는 상상력이 참 놀라웠다.
어쩜 그렇게 자신만의 생각을 또렷하게 담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아이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집도 생크림처럼 구멍 난 곳을 바로바로 메꿀 수 있으면 ...”
그 한마디에 마음이 잠시 울컥했다.
그 말을 그대로 옮겨
책 《세상을 구할 행복 레시피》에 썼다.
마음의 틈을 메우는 일,
그건 어쩌면 요리보다 더 섬세한 일이니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모든 것이 내게 작은 빛이 되었다.
작은 발자국 하나를 남기고 돌아왔다.
2016년도 대학교 2학년
블로그용 카메라를 구입해 사진을 찍고 다녔다.
알바비로 등록금을 내고 남은 돈 전부를
카메라에 썼다면, 말은 다 한 셈이다.
그 무렵 전공 동아리 ‘빵 굽고 사랑 나누기’에서 활동했다.
말 그대로 빵을 구워 사회에 나누는 동아리였다.
빵을 만들면 늘 부스러기가 남는다.
쉽게 떨어져 나가고, 가장 먼저 외면받는 것들.
하지만 빵 부스러기 역시 빵의 일부였다.
그 사실이 좋았다.
부스러기에도 시선을 두고,
관심과 마음을 더해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끈한 빵을 직접 전했다.
오뚜기 ‘진앤지니’
라면을 주제로 마케팅을 직접 기획하고 실행하는 프로젝트였다.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분식집 라면 취급 미션’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나는 소심함이 끝을 달리던 사람이었다.
분식집 섭외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음식점에서 주문을 못 해 친구가 대신해 주는 일이 많았고,
전화가 두려워 군대 첫 휴가 때 부대에 연락조차 하지 못해
중대장님에게 직접 전화가 온 적도 있었다.
그런 내가 분식집에 전화를 걸어야 했다.
팀원들과 함께 천안 지역 분식집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시기, 조금씩 ‘자신감’이라는 감각이 생겼다.
분식집 취급 미션은 단순했다.
대부분 N사 라면을 사용하던 분식집 사장님들께
“진라면으로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콘텐츠 진행과 함께 제안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지역이었다.
이런 활동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진행된다.
천안에서 시도하자니 쉽지 않았다.
전화는 대부분 거절로 끝났고, 기획안을 들고 직접 찾아가도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다 요령이 생겼다.
바쁜 시간은 피할 것
유동인구 많은 곳은 피할 것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식사를 할 것
음식을 주문하고 다 먹은 뒤에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리면
적어도 이야기는 들어주셨다.
“오뚜기 진앤지니 활동을 하고 있는 대학생인데요…”
‘라면 물 양을 정확히 맞출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라는
소소한 질문에서 시작했다. ‘냄비의 요정’이라는 콘셉트로
냄비 하나를 뽑아 물의 양을 맞히면 컵라면을 주는 방식이었다.
보통 분식집에서는 N사 라면을 사용했지만,
자연스럽게 진라면도 권했다.
가게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순간들.
그런데 생각보다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미션은 웃음 속에서 진행됐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물 양을 정확히 맞혔다.
거절을 반복하다 보니 내성도 생겼고, 요령도 늘었다.
결국 분식집 다섯 곳을 섭외했다.
라면 박스와 소품을 직접 들고 팀원들과 발로 뛰었다.
힘들었고, 울컥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따뜻한 조언을 건네주는 사장님들도 있었다.
충남권 팀들과 함께한 1박 2일 워크숍,
라면 공장을 견학하며 ‘나중에 식품회사에 들어가면
이런 풍경을 마주하게 될까’ 하고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활동은 라면보다도,
내 안의 두려움을 조금 덜어낸 시간으로 남아 있다.
아워홈 ‘판 아워홈’
HMR 제품을 지원받아
직접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어보는 활동을 했다.
태양의 후예 속 ‘젓가락 총’을 패러디한 영상도 만들었고,
그물로 물고기를 잡아 손질한 뒤
아워홈 만능 소스로 매운탕을 끓이기도 했다.
먹는 일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어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웃고 떠들며 즐기는 분위기였다.
담당자분이
“물고기까지 직접 잡을 줄은 몰랐어요”라며
놀라워하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중에서도
민물고기 매운탕 콘텐츠는 유독 인상 깊다.
단순히 제품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냇물에서 물고기를 직접 잡고 손질하는 과정을 그대로 담아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상황에서도 쓸 수 있다’는 방식으로
만능 소스를 자연스럽게 활용했다.
당시 ‘포켓몬 고’가 유행하던 시기에는
여행 형식의 기획을 진행했는데,
놀이와 제품을 결합한 콘텐츠라
생각보다 큰 관심을 받았다.
이 활동을 통해
‘제품을 어떻게 보여주느냐’보다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광고처럼 보이지 않게,
일상의 장면 속에 스며들게 하는 방식이었다.
취업 과정에서 꽤 의미 있는 경험으로 작용했다.
실제로 면접을 보러 간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당 활동을 경험한 지원자들이 유독 많았다고 한다.
‘이 회사라면 입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운 것이 많았고, 무엇보다 좋은 기억으로 남은 기업이다.
2017년 3학년
지역에서 활동한다는 건
확실히 서울권과는 조건이 달랐다.
중소기업 대외활동에도 몇 번 참여했지만,
교통비조차 지원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시간과 돈을 들여 움직인 끝에
손에 남는 건 수료증 한 장뿐인 날도 있었다.
서로의 성과를 나열하는 자리가 되기 일쑤였고,
성장보다는 자랑이 앞서는 분위기가 낯설었다.
지역에서 이뤄지는 활동은
대부분 이미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돌아갔다.
그 안으로 새롭게 들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이 기록했고, 직접 기획했다.
주어지는 기회보다 만들어가는 경험이 더 많았다.
푸드트럭 탈락!!
교내 푸드트럭 운영자를 뽑는다는 공지가 보였고,
이번에는 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면접 불합격이었다.
그 이후로 거의 한 학기를 멍한 상태로 보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이든 해내고,
실패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실패는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생활비라도 아껴보자는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창업동아리를 만들었다.
회의를 핑계 삼아 식비라도 줄여보자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대학생활, 창업동아리
‘창업’이라는 단어에 눈이 갔다.
사실 시작은 아주 가벼웠다.
회의비로 양꼬치를 먹자는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창업동아리 신청서를 냈다.
신규 창업동아리로 A등급을 받으며 활동을 시작했다.
양꼬치를 먹고 나서 지은 이름,
‘별이 뜨는 주막’
그렇게 우리의 첫 창업동아리가 시작됐다.
나는 식품·영양 관련 학과를 선택했다.
조리 실습은 없고,
실험과 이론 위주의 수업 속에서
한동안 방향을 잃고 있었다.
그래서 창업동아리를 만들며
다시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팀원을 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학점은 C였고,
“그 성적으로 무슨 창업 동아리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무시당하는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친구와
외국인 유학생 친구들이 끝까지 함께해 주었다.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던 나에게
‘대표’라는 직책을 맡겨주었다.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대표라는 자리는
잘난 사람이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해주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책임지는 자리일지도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 스스로를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복학하면 뭐든 잘 해낼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교수님 실험실에 들어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나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한 번 선택한 일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냐”는 말과 함께
상처가 되는 말도 들었다. 그 말들은 오래 남았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무엇을 붙잡아야 하는지
처음으로 고민하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다.
첫 장사 빛 너울 야시장
천안에서 처음 열리는 야시장이라는 말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한 번쯤은 꼭 해봐야 할 경험 같았다.
망설임보다는 호기심이 먼저였다.
지원했고, 선발됐다.
처음으로 ‘장사’라는 걸 시작했다.
앞치마를 매고 불 앞에 서는 일이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다.
주변 반응은 차가웠다.
“공부나 하지, 무슨 장사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 말들이 쌓일수록 괜히 더 고집이 생겼다.
이때 처음으로 삭발을 했다.
사람들에게는
“음식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게 하려고요”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하나에 집중하고 싶었다.
말이 아니라 태도로,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다행히 음식에 대한 반응은 좋았다.
“맛있다”는 말이 들릴 때마다 하루의 피로가 사라졌다.
친구들, 아는 분들이 찾아와 응원하듯 먹어주었고,
집에 있는 아내가 먹고 싶다며
매주 들러 구입해 주는 단골손님도 생겼다.
그분 덕분에 ‘장사’라는 일이
숫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
야시장은 금요일과 토요일에만 열렸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수업을 듣고,
금요일이 되면 다시 야시장으로 출근했다.
알바를 따로 하지 않고 야시장에서 일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때만큼은
내가 내 삶을 책임지고 있다는 감각이 분명했다.
불 앞에서 보낸 시간은 돈보다 더 많은 것을 남겼다.
버텨본 경험, 사람 앞에 서 본 용기,
그리고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확신이었다.
충청권 대학생 잡 페스티벌 푸드트럭
대학교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충청남도에서 푸드트럭을 지원해 준다는 이야기에
창업동아리 담당 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셨다.
혼자였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었지만,
그때는 이상하게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취사병 출신인 민섭이와 운식이가
조리부터 운영까지 큰 힘이 되어주었고,
우리는 푸드트럭 두 대를 운영하게 됐다.
이름도 지었다.
‘별이 뜨는 주막’, 그리고 ‘달이 뜨는 주막’.
행사는 낮부터 시작됐다.
스테이크와 불고기 볶음밥을 만들며
사람들을 맞이했다. 행사장은 분주했고,
손님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불 앞에서 땀을 흘리며 음식을 만들었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한 그릇씩 정성껏 내놓았다.
그날의 매출은 총 100만 원.
우리는 그 돈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정했다.
벌기 위해서만 하는 장사가 아니라,
돌려줄 수 있는 장사를 하고 싶었다.
돌아보니 과 선후배들, 창업동아리 선생님,
함께 밤을 새운 팀원들까지
내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걸.
창업동아리 ‘별이 뜨는 주막’은
내게 단순한 활동 이상의 의미였다.
사람을 만나게 해주었고,
함께 책임지는 방법을 알려주었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작은 행운들을 가져다주었다.
<흥청망청> 흥해도 청춘 망해도 청춘
(2017, 2018)
‘흥해도 청춘, 망해도 청춘’이라는 슬로건으로
흥청망청 단짠 요리교실을 시작했다.
창업동아리를 운영하며 만난 부원들 중에는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들도 많았다.
그래서 잘 가르쳐야겠다는 마음보다는,
함께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계기로
천안시 문화특화지역 조성 사업인
‘공유 스쿨’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수업은 볶음밥과 파스타를 중심으로
총 네 차례 진행했다.
메뉴는 일부러 어렵지 않게 정했다.
전문가처럼 완벽한 음식을 만드는 수업이 아니라,
동아리 활동처럼 편하게 참여해
직접 만들어 보고,
맛있게 먹고 돌아가는 시간이었으면 했다.
천안 중앙동 주민센터 남산별관에서 진행한
‘남산 클래스’ 공유 스쿨 요리 프로그램을 무사히 마쳤다.
수업을 하다 보면 맛있는 냄새 때문인지
지나가던 분들이 한 번씩 문을 열고 들어와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하고
물어보고 가시곤 했다.
이미 수강 모집은 끝났는데도
추가로 신청하고 싶다는 분들이 계셨고,
이 공간에서 사람들이
웃으며 요리하는 모습이 좋다며
칭찬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그 관심과 말 한마디가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내가 가진 ‘요리’라는 재능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젊은 직장인이나 학생들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직접 만든 따뜻한 저녁 한 끼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요리가 누군가의 하루를 정리해 주는
작은 이유가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상상 내일 프로젝트
청년들이 직접 하고 싶은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팀 단위로 선발해 교육을 진행하고
지원금까지 연계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대외활동을 팀으로 지원하는 건 처음이었다.
서류 작성부터 기획 정리까지
생각보다 어려운 점이 많았다.
창업동아리를 함께하던 친구,
교양수업에서 만난 친구,
그리고 과 후배까지
총 네 명이 한 팀이 되어 준비했다.
처음에는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외활동이라는 특성상
3~4학년이 되면
시간을 내기 어려운 현실도 분명했다.
결국 남은 사람들끼리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지원해 준다’는 말이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프로젝트를 해야 할까.
면접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실 건가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서류에 적어낸 내용들을 하나씩 설명했다.
우리가 꺼낸 키워드는
‘아산 지역 특산물’, ‘이주 여성’, ‘지역 아동’이었다.
이후 팀원들과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하며
우리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달았다.
조사해야 할 것도, 생각해 볼 것도 훨씬 많았다.
식품이라는 주제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다.
천안에는 호두과자가 있다면,
온천을 상징하는 ‘빵’은 어떨까.
아산을 대표하는 식품 브랜드를 만들어보자.
아침마다 어르신들이
전철을 타고 온양온천을 찾는 이유는 뭘까?
이번 프로젝트는 ‘결핍’에서 출발했다.
창업동아리 활동을 하며
조리를 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갈증이 컸다.
동아리방이 생겨도 취사는 할 수 없었고,
대학교 제빵실은 수업 외 개인 사용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에서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대외활동을 통해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고 있었을까?
중견기업과 대기업 대외활동을 하며
은근히 자랑하고 다니지는 않았을까?
야시장도 하고, 푸드트럭도 하면서
조금은 거만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내 태도를 돌아보게 만든
전환점으로 남았다.
(글은 자세히 적어놨습니다.)
상상 프로젝트 in 아산 지중해 마을 할로윈
상상 프로젝트 in 아산 외국 아시아X한식
2018년 4학년
아산 아가야센터
마침 사회봉사센터에서
봉사 동아리를 모집하고 있었고,
나와 현이, 하연이 세 명이 함께 신청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센터에 들어서면
아이들이 먼저 달려와 꼭 안아준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반겨주지 않으면
괜히 서운해질 정도다.
‘꿈이 선생님’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태은이가 지어준 이름이다.
“요리를 꿈꾸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꿈이’.
그 별명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만 생각하던 시기에
이 봉사는 다시 ‘꿈’이라는 단어를 꺼내 보게 만든 시간이었다.
책《세상을 구할 행복 레시피》에 썼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다시 믿게 되었다.
대학생활, 취업 걱정, 스펙 쌓기.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던 어느 날
태은이가 물었다. “선생님은 좋아하는 게 뭐예요?”
나는 잠시 멈췄다가 “글쎄… 선생님은 좋아하는 게 없어.”
라고 답했다.
좋아하는 게 뭔지
오래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조금 퉁명스러운 말이 나왔던 것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좋아하는 건
그렇게 어렵게 정의할 필요가 없었다.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
좋아하는 건 그저 솔직하게 말로 꺼내면 되는 것이었다.
킨포크 마을
비교과 프로그램에서 권유를 받아 지원하게 됐다.
기숙사를 단순히 잠만 자는 공간이 아니라
함께 먹고, 이야기하고, 관계를 만드는
생활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신입생들에게 음식을 알려주는 역할.
듣기만 해도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어깨가 무거워지는 자리였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어디선가 또 연락이 오고,
그동안 쌓아온 경험들이
다음 기회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처음에는 우연 같았지만, 돌이켜보면
계속 사람을 만나고, 기록하고,
직접 움직였기 때문에 열릴 수 있었던 문들이었다.
이번에는 수강과목이 아닌
비교과 과목으로 프로그램이 열렸다.
이제는 정말
‘요리 알려주는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
흥청망청 요리교실 경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요리하며 이야기하는 건
이제 낯설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다.
글로컬 시티즌십 프로그램 서류에 합격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PPT 면접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잘하고 있는 건지, 괜히 기대만 커진 건 아닌지
혼자서 불안을 키워가고 있을 때
곁에서 조용히 응원을 건네주던 사람이 있었다.
특별한 말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잘 될 거에요”라는 한마디,
면접 준비 끝나고 마신 커피,
같이 본 영화 한 편, 단대 호수를 천천히 걸었던 저녁
그 시간들이 생각보다 큰 힘이 됐다.
그 사람은 신입생이었고,
나는 곧 학교를 떠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보다 각자의 시간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을 더 키우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응원이 좋았지만
조용히 마음에 남겨두었다.
해외연수 프로그램
교내 해외연수 프로그램 ‘글로컬 시티즌십’에 선발되어
여름, 일본에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주제는 보편적 복지
그중에서도 어르신을 위한 맞춤형 식품이었다.
수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같은 학과 16학번 후배들과 팀을 꾸려 지원했다.
입학 초,
‘알약 하나로 모든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는 식품’을 만들겠다는
조금은 단순하고 효율적인 상상을 품고 들어왔던 내가
이제는 식이장애를 겪는 어르신을 위한 음식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심병원
병원에 들어서자
머리카락이 음식에 들어가지 않도록 모자를 착용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양사 면허를 따고 취업을 하면,
언젠가는 이런 가운을 입고 매일 이 공간을 오가게 되겠지.
이곳에서는
저작과 연하 작용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음식의 질감에 단계를 나눠 조리를 진행하고 있었다.
같은 재료라도 누군가에게는 ‘식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위험’이 될 수 있다
“일본은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요.
젊은 사람들도 바쁘게 일하다 보니
수면 시간이 줄고, 고혈압이나 영양 불균형으로
영양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지고 있죠
노인분들은 숫자가 너무 많아서
병원에서 모두를 계속 돌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정 수준의 의료·영양 지원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가
일상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입니다.
병원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자립을 돕는 것이 핵심이에요.”
‘돌봄’의 목적은
보호가 아니라 회복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했다.
요코하마, 바람소리 레스토랑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동네 식당 같았다.
전체 손님의 약 70%는 일반 손님,
30%는 노인이나 시설 이용자들이었다.
처음에는 노인 손님이 많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냥 보통 가게 아닌가?” 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아
초기에는 손님이 없어 한가했던 시간도 있었다고.
하지만 10년 넘게 운영을 이어오며 식당은 조금씩 변해갔다.
휠체어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 화장실을 넓게 만들고,
테이블도 앉은 자리에서 바로 식사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특별함을 강조하기보다
누구에게나 불편하지 않은 공간을 선택한 것이
오히려 사람들을 다시 불러왔다.
일본 시니어 라이프 크리에이트
"처음에는 기존 도시락을 그대로 배달했습니다.
하지만 어르신들이 한 끼 분량의 도시락을
이틀에 나눠 드신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위생 문제도, 영양 문제도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크기를 줄이고, 질감을 조절하고, 노인을 위한 식품과 식자재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하기로 했어요.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지금의 형태로 확장할 수 있었죠"
일본에서 본 것은
거창한 기술이나 화려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식사 속도를 이해하고, 몸의 변화를 존중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남겨두는 선택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선택들이
결국 음식을 통해 삶을 이어가게 하는 일이라는 걸
교내 창업경진대회
" 식품으로 창업경진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을까? " 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로봇, 드론, IT 기술, 앱 서비스 같은 아이템들이 쏟아지는 무대에서
식품 분야로 본선에만 올라가도
그 자체로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사실 이 관심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식이장애를 겪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 곁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식품과 영양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고,
‘알약 하나만 먹어도
모든 영양소를 충족할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막연하지만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어쩌면 이 길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도 있었다.
그때,
현재 재학 중인 대학교 교수님께서
뜻밖의 제안을 해주셨다.
노인들이 ‘씹는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육고기를 음료 형태로 구현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데,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였다.
그 제안은 내가 막연하게 상상하던
‘영양’이라는 개념을
현실로 끌어당기는 계기였다.
창업동아리를 운영하며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노인 맞춤형 식품을 주제로 연구와 실험을 이어갔고
그 결과,
식품 분야로는 어렵다고만 여겼던 창업경진대회에서
마침내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때 알게 되었다.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은
트렌드의 한가운데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더 먹기 쉽게 만드는 자리였다는 것을.
파일럿 프로젝트 '진수성찬'
‘별이 뜨는 주막’ 신입생들끼리 진행한
파일럿 프로젝트 진수성찬 팀.
지역사회의 문제를 찾아보고
같은 언어가 아니어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각 나라의 음식을 직접 배워보고
그 과정을 기록하는
영상 콘텐츠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팀장 이름이 이진수라서 팀 이름은 ‘진수성찬’.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농담처럼 ‘성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모집해 봤지만, 지원자는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아직 동아리에 남아 있는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작지만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별이 뜨는 주막’ 로고가 새겨진
앞치마를 건넸다.
요리를 시작하며 만난 인연들이다.
수많은 대외활동은
화려하지만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한 상의 한정식 같았다. 반찬은 많았지만
대표하는 요리는 없었다.
졸업식에는 가지 않았다.
기록하지 않은 대외활동 수료증들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내가 버텨온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대학교 대외활동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
같이 웃고 실패하던 그 시간들이
지금까지의 나를 버티게 했다.
그 인연들 덕분에 나는 여전히
대표 요리는 없지만, 그 대신 이야기와 온기를 담은 요리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