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상상프로젝트
그때 나는 ‘상상 내일 프로젝트’라는 이름 아래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학교와 지역을 잇는 기획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기회.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시뮬레이션하고
노트에는 빽빽하게 아이디어를 적어 내려갔다.
지금 돌아보면 그 열정이 꼭 시험 기간에 딴짓할 때 나오는 집중력과 비슷했다.
공부는 잘 안 되는데, 무언가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일은 어찌나 손이 잘 움직이던지.
아산이라는 지역에 ‘식품’이라는 콘텐츠를 넣으면 어떨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질문이었다.
무작정 찾아간 곳이 바로 아산의 ‘지중해마을’이었다.
이름 그대로 이국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공간.
흰색 벽과 파란색 창문이 늘어선 골목은 잠시 한국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그곳에 ‘식품’이라는 이야기를 더하면 어떨까?
단순한 먹거리 체험을 넘어, 지역만의 정체성과 결합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준비가 완벽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계획도 없이, ‘가보자!’라는 마음 하나로 움직였다.
하지만 바로 그 무모함이 나를 현장에 세워주었다.
책상 위에서만 굴리던 아이디어가 거리와 건물
그리고 아산 지중해마을의 첫 발걸음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순간으로 남아 있다.
그 무렵 역사문화콘텐츠학과에서는
‘지중해마을 부엉이 영화제’를 진행하고 있었다.
학과와 마을이 함께 기획한 작은 축제였다.
영화제가 열리는 공간에 발을 들이니
식품을 전공하는 내 입장에서는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과에서는 과연 어떤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교수님과 이야기하던 중, 아예 푸드트럭을 끌고
영화제가 열리는 현장에서 판매를 해보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지역과 학교를 연결한다는 취지에 딱 맞는 아이디어였다.
그때 나는 기획서에 ‘아산을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쓰며
‘부엉이 스테이크’ 같은 다소 엉뚱한 이름을 지었다.
길거리가 호박 장식으로 가득했다.
현수막에는 ‘할로윈 축제’라는 글씨가 선명했고
그 분위기만으로도 외국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마침 그 시기에는 해외로 떠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굳이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지중해마을에서는 한국 안에서 ‘외국에 놀러 온 느낌’을 충분히 맛볼 수 있었다.
특히 선문대학교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유학생들이 있었기에
이곳은 그들에게도 친숙하면서도 특별한 장소가 될 수 있었다.
‘SM HALLOWEEN DAY’. 글로벌지원팀, 외국어교육원
그리고 RC센터가 주최한 프로그램이었다.
처음에 ‘SM’이라는 단어를 보고는 순간 대형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와 연관 지어 생각하지만
사실 ‘SM’은 선문대학교(Sunmoon)의 약자였다
학생들이 기숙사 안에서도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공동체 속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외국인들에게 학교를 또 다른 집처럼 느끼게 해주려 했다.
아무튼 아이디어가 정리되자마자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담당자분들이 꽤 당황하셨을 텐데
부족한 부분도 꼼꼼히 검토해 주시고, 흔쾌히 허락까지 내려주셨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가장 큰 동력이었다. 누군가 내 상상을 ‘괜찮다’고 인정해 준 것,
그 한마디가 나를 끝까지 밀어붙이게 했다.
문제는 재료였다. 어렵게 구한 미니사과는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로윈 파티를 위해서라면 포기할 수 없었다.
무대가 크든 작든, 축제의 맛은 결국 ‘음식’에서 완성되니까.
화이트 초콜릿을 중탕기에 올렸다.
은근히 올라오는 달콤한 향기가 기숙사 복도까지 퍼졌다.
초콜릿이 매끄럽게 녹자, 미니사과를 하나씩 퐁당 담갔다.
유리처럼 반짝이는 하얀 코팅이 씌워지자 금세 다른 세계의 과일처럼 변했다.
가지런히 늘어놓기만 하면 마치 작은 공예품 같았다.
문제는 내 손이었다.
나는 늘 그렇듯 열정적으로 초콜릿을 푹푹 묻혀 올렸는데
그 결과 사과는 단단한 초콜릿 갑옷을 두른 듯 두꺼워졌다.
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너 이제 퇴출이야!”
결국 나는 ‘초콜릿 장인’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대신 경리가 설탕으로 빨간색 시럽을 끓이고 있었다.
방울방울 끓어오른 설탕물이 마치 피처럼 변해갔다.
그렇게 사과 위에 한 줄기씩 흘려내리자, 우리의 작품은 완성됐다.
그 이름하여 하얀 독사과.
눈처럼 새하얀 표면에 붉은 핏줄 같은 자국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동시에 섬뜩했다.
마치 동화 속 백설공주가 지금 당장 등장해, 이 사과를 한입 베어 물 것 같은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돼지 등갈비를 손질하며 양념장을 붓고 또 발랐다.
‘설정 샷’이라고, 블러드 앞치마 하나 걸치고 장난스럽게 포즈를 취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저 앞치마 하나 걸쳤을 뿐인데, 왜 다들 그렇게 놀라는 걸까?
얼떨결에 <범죄 도시> 코스튬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빡빡이 캐릭터들이 등갈비 뜯는 장면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으면서도 슬쩍 피했다.
“등갈비 먹었늬? 맛있늬?”
농담처럼 내뱉은 말과 함께, 해골 바베큐 폭립 완성됐다.
성륜이는 해골 분장을 하고, 다른 친구는 뱀파이어로 변신했다.
그런데 이 뱀파이어는 정작 잠을 안 잔다더니 지각을 하고 말았다.
모두들 서로의 분장을 보며 폭소를 터뜨렸다.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고, 선문대학교의 외국인 유학생들까지 합류했다.
다들 미남·미녀에다 유쾌한 리액션을 보여주니, 정말 ‘외국 여행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블러드 앞치마를 입고 해골 옆에서 등갈비를 나눠주었는데
사람들이 무서워하면서도 즐겁게 받아 갔다.
처음엔 농담처럼 시작된 아이디어였는데, 반응이 의외로 너무 좋았다.
사실, 선문대학교에 외국인 유학생이 많다는 말은 늘 들어왔지만
정작 교류를 해본 적은 없었다.
늘 막연하게 “우리 학교는 외국인이 많아”라는 생각에서 멈췄을 뿐이다.
그런데 이 축제에서 처음으로 직접 대화를 나누고, 함께 음식을 나누며 진짜 교류가 이루어졌다.
물론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맛있게 받아들였다.
각 나라별로 “맛있다”는 표현은 달랐지만, 그 의미만큼은 모두 같았다.
언어가 달라도 미소와 손짓만으로 충분히 통했으니
그 순간만큼은 음식이 가장 완벽한 번역기였다.
돌아보면, 그 무렵 나는 늘 ‘실적’을 쌓으려 했다.
공부 대신 다른 활동을 하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마치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금세 사라질 사람인 것처럼.
하지만 아산 YMCA 간사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네가 진짜 즐기면서 하는 활동이어야 의미가 있어.”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땀 흘리며 웃고
외국인 유학생들과 음식을 나누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보람’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내 전공인 ‘식품’을 매개로 문화를 교류한다는 것
이제야 알겠다. 나는 추억을 쌓지 않고, 스펙을 쌓는 데만 몰두하고 있었다는 걸.
내가 행복하다고 느낀, 소중한 순간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아산 온양온천은 원래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도시다.
따뜻한 물과 고기의 만남은 지역만의 특별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재료였다.
그 둘을 제대로 엮어 새로운 음식 문화를 만들 수 있었다면
아마 나는 지금쯤 또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상이 정말 현실이 되었다.
결국 나는 ‘온천수를 이용한 육류 조리방법’이라는 이름으로 발명자로 기록되었다.
단순한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실제 조리 과정으로, 또 하나의 기술로 남게 된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중해마을에서 푸드트럭을 이야기하던
그 순간, 그리고 교수님께 ‘부엉이 스테이크’를 농담처럼 말하던 장면이 씨앗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