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슬픔은 어떻게 일상이 되는가
어머니가 떠나신 2월부터 9월까지, 시간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양으로 흘러갔다. 달력의 빨간 글씨는 단순한 휴일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모여야 할 ‘약속의 날’이 되어 또렷해졌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평범한 날들은 사소한 계기들로 인해 조용히 빛나기 시작했다. 사건이라 부르기엔 너무 작고, 그저 일상이라 하기엔 마음이 너무 크게 흔들리는 순간들.
이전의 시간은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입학, 졸업, 결혼, 명절. 하지만 이제 우리의 시간은 ‘순간’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창틀을 닦는 아버지의 마른 손, 물을 머금는 흙의 느린 속도, 아이의 서툰 연주에 맞춰진 한 번의 박수.
그 순간들이 모여 우리 가족의 새로운 문장을 만들었다. 그것은 상실로 시작했지만,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그리고 때로는 희미한 숨표로 이어지는 문장이었다. 우리는 슬픔이 어떻게 일상이 되는지, 그리고 그 일상 속에서 어떻게 서로를 다시 발견하게 되는지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배워가고 있었다.
4월의 마지막 주말, 우리는 어머니에게로 갔다. 겨울의 날카로움은 무뎌졌지만, 봄의 온기라기엔 아직 공기가 찼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창밖은 회색빛이었다. 라디오 소리 외에는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이들조차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치는 풍경을 보며 자신들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전 내내 잔비가 뿌려졌다 그치기를 반복했고, 숲으로 들어서는 길의 흙은 물기를 흠뻑 머금어 짙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주차장에서 차 문을 닫는 ‘쿵’ 하는 둔탁한 소리 뒤로, 숲이 내는 아주 얇은 숨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것은 도시의 소음 속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젖은 잎사귀와 이끼, 그리고 수만 그루 나무껍질이 함께 내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우리의 들뜬 숨을 가라앉히고, 숲의 리듬에 맞추도록 강제했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완만한 오르막을 천천히 올랐다. 발밑에서 축축한 낙엽과 작은 가지들이 부서지며 ‘바삭’이 아닌 ‘푹’ 하고 잠기는 소리를 냈다. 짙은 흙냄새와 젖은 나무의 비릿함, 그리고 우리들의 젖은 옷에서 올라오는 세탁 세제의 잔향이 한데 섞여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아이들은 이곳의 무게를 아는지 말수가 줄었고, 여동생은 자신의 아이들의 손을 평소보다 조금 더 꽉 잡았다. 그 손짓에서 ‘여기는 우리가 함부로 떠들면 안 되는 곳이란다’라는 무언의 가르침이 느껴졌다.
어머니의 이름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이미 익숙해진 침묵 속에 있었다. 아버지는 국화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더 이상 오열이나 탄식은 없었다. 그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깊은 고개 끄덕임. ‘왔다’는, 그리고 ‘보고 싶었다’는 모든 말을 담은 몸짓이었다. 나는 물병 뚜껑을 열어 흙 위에 반쯤 따랐다. 물이 흙 속으로 스며들면서 작은 소리를 냈다. ‘스르르, 스르르...’ 그것은 마치 흙이 숨을 쉬는 소리처럼, 혹은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쓸어주는 소리처럼 들렸다. 작은딸이 내 팔을 슬쩍 당기며 속삭였다. “아빠, 흙이 물 마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도.” 어쩌면 이 행위는 어머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겨진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의 마른 마음에 위로의 물을 적시는 시간.
여동생은 밤새 접었을 흰 종이학 한 마리를 표식 옆에 정갈하게 놓았다. 그 순간, 비가 그친 숲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접힌 날개를 한 번, 아주 조심스럽게 건드리고 지나갔다. 마치 어머니의 손길처럼, ‘잘 왔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2월에 처음 이곳에 섰을 때 마음속으로만 다짐했던 ‘나무 아래의 약속’을, 처음으로 문장으로 정리해 소리 내어 말했다. 그것은 우리의 슬픔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바꾸는 첫 번째 의식이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엄마 생각 날때마다 엄마가 보고싶을 때 마다 찾아올께요.”
“제주에 있는 여동생은 분기마다, 그리고 명절과 어머니 기일에는 반드시 함께하겠습니다. 오지 못하는 주에는 같은 시간, 제주 하늘 아래에서 짧은 음성 메시지나 사진으로 인사를 대신하겠습니다.”
추상적이었던 그리움을 ‘둘째, 넷째 주 토요일 오전 10시’라는 구체적인 시간의 좌표 위에 고정하자, 마음속을 떠돌던 어지러움이 아주 조금 가라앉았다. 말로 내뱉는 순간, 약속은 무게를 가졌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새로운 리듬이었고, 가족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중력이었다. “충분하다.” 아버지의 한 마디가 숲의 낮은 톤과 섞였다. 아이들은 우리의 진지한 모습을 흉내 내듯, 표식 옆에 떨어진 작은 가지들을 한쪽으로 모아 작은 탑을 쌓았다. 나는 나무 밑동의 흙을 손바닥으로 살짝 눌러 단단히 다져 주었다.
여동생이 나무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엄마, 우리 이렇게 할게요. 지켜봐 주세요.” 그 말이 공기 속으로 번지자, 숲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것 같았다. 내려오는 길, 젖은 흙이 신발에 잔뜩 묻어 발걸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 무게가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흙의 무게가 아니었다. 우리가 방금 한 약속의 무게였고, 우리를 땅에 단단히 붙들어 매주는 ‘삶의 무게’였다. 오늘 우리가 한 말을, 이 축축한 흙이 모두 듣고 기억해 줄 것만 같아서.
장마가 걷힌 7월의 오후는 모든 것을 축축하고 무겁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집은 문을 열자마자 눅눅한 곰팡내와 묵은 공기가 훅 끼쳐왔다.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제습기부터 돌리고 창문 열어라” 하셨을 날씨였다. 그날, 아버지와 나는 말없이 집안의 묵은 습기를 닦아내기로 했다. 그것은 청소가 아니라,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생긴 집안 곳곳의 작은 균열들을 우리의 손으로 함께 메워가는 ‘수리’에 가까웠다.
가장 먼저 창문을 닦았다. 아버지는 이럴 때면 장인의 풍모를 보였다. 늘 지키는 순서가 있었다. 첫째, 창틀. 손가락으로 레일의 먼지 라인을 확인하고, 마른 천으로 두 번, 젖은 천으로 한 번. 뭉쳐진 먼지를 걷어내는 아버지의 손은, 마치 마음속의 응어리를 걷어내는 듯했다. 둘째, 유리. 세제를 거의 쓰지 않고, 원을 그리지 않으며 위에서 아래로, 오직 직선으로만 움직인다. 셋째, 손잡이. 모든 것이 끝난 뒤 세제를 아주 조금만 묻혀 반짝이게 닦아낸다. 아버지의 그 동작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낭비도 없었다. 물기 위로 늦은 오후의 햇빛이 어른거리며 물결무늬를 만들자, 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깨끗하다.” 그것은 짧지만 충분한 진단이었고, 장마 뒤의 내 마음에도 선명하게 들렸다.
거실에는 여전히 어머니의 화분이 놓여 있었고, 그 밑에는 바래지 않은 글씨, ‘일요일—물’이 남아 있었다. 마침 일요일이었다. 우리는 라디오를 켜 두었다. 진행자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한 볼륨이었고, 오래된 트로트가 선곡되자 아버지는 고개를 아주 조금, 박자에 맞춰 움직였다. 나는 물을 천천히 따라서 흙 표면의 마른색이 짙은 색으로 바뀌는 속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 느린 속도가 어느새 내 마음의 속도가 되어 있었다. 새잎 끝에 앉은 작은 먼지가 눈에 띄었다. 나는 서랍에서 부드러운 붓을 꺼내 잎을 한 번 쓸어 주었다. 식물의 호흡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지극히 섬세한 동작. 아버지는 그 동작을 오래 보다가, 마치 혼잣말처럼 한마디 덧붙였다. “살아 있네.” 그 말은 화분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이렇게라도 살아가야 한다’는 우리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주방에선 작은 수리들이 이어졌다. 냉장고 문짝의 고무 패킹을 닦고, 칸마다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날짜가 지난 것들은 작은 통에 따로 옮겨 담았다. 선반 구석에 오래 있던 묵은 김치는 손바닥만 한 통에 나누어 담아 ‘볶음 전용’이라고 라벨을 붙였다. 어머니가 하시던 방식 그대로였다. 가스밸브를 잠갔다 열었다 다시 확인하고, 싱크대 하부에 새로 산 노란 고무장갑을 걸었다.
가장 큰일은 전등 두 개를 가는 것이었다. 천장을 향해 십자드라이버를 돌릴 때, 나무 손잡이에 힘이 들어가며 내는 ‘딸깍’ 소리가 방 안에 단단함을 남겼다. 전등 커버를 끼우다가 살짝 비뚤어졌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생각하며 손을 떼려는데, 아버지가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숨을 참고 커버를 다시 빼냈다. 정확히 홈에 맞추려 애썼다. “그래.” 그 한 글자가 칭찬의 전부였다. 하지만 내게는 충분했다. 그것은 ‘대충 넘어가지 말라’는, 삶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였고, 어머니가 떠난 집을 허투루 관리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다짐이었다.
8월, 아버지의 생신 저녁. 우리는 케이크 대신 미역국을 끓였다. 아내가 끓인 미역국은 어머니의 방식과 꼭 닮아 있었다. 미역을 너무 오래 불리지 않아 식감이 살아있게, 간은 심심할 정도로 덜하게. 그리고 국이 끓어오르기 직전에 불을 줄여, 뚜껑 사이로 김을 여유 있게 흘려보내는 방식. 한 숟가락 떠먹었다. 맛은 있었지만, 어머니의 그것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그리움이라는 조미료가 빠져서일까, 아니면 내 기억이 맛을 미화한 것일까.
나의 아내가 오이무침을 만들었다. 소금에 살짝 절여 물기를 꼭 짠 오이에, 고춧가루는 아끼고 마늘은 조금 더 넣고, 참기름은 무치기 직전 아주 마지막에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 어머니의 레시피였다. 아이들은 각자의 임무를 맡았다. 큰딸은 접시에 마른 김을 펼쳤고, 작은딸은 젓가락을 가지런히 맞췄다. 막내는 얼음을 유리컵에 나눠 담아 보리차를 채웠다. 유리벽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테이블 위에 작은 원을 남겼다.
여동생은 제주에서 영상통화로 합류했다. 흔들리는 스마트폰 화면에는 푸른 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그리고 조카들의 웃는 얼굴이 번갈아 나타났다. 화면이 픽셀로 깨지고 목소리가 가끔 끊겼지만, 그 불완전한 연결이 오히려 더 애틋했다. “외할아버지, 생신 축하해요!” 스피커폰 너머로 바람 소리가 스칠 때, 같은 여름이 다른 바람으로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었지만, 그 순간 한 식탁에 모여 있었다.
아버지는 선풍기 바람의 방향을 아이들 쪽으로 살짝 돌려주고는, 말없이 국을 떠 밥 위에 얹었다. “밥이… 좋다.” 고맙다는 말, 기쁘다는 말 대신, 그 한마디. 우리 모두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식사 중간에 큰딸이 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던 반찬이 뭐였어요?” 아버지는 국물을 삼키고 잠깐 생각하다가, 짧게 답했다. “김.” 그 한 글자에, 함께 김을 굽던 수십 년의 저녁과, 바삭한 소리를 좋아하시던 어머니의 웃음과, 그 모든 평범했던 날들의 기억이 달라붙어 있었다.
식사 뒤에는 수박을 잘랐다. 칼이 단단한 껍질에 들어갈 때 나는 ‘서걱’하는 소리, 씨를 젓가락으로 툭툭 떼어 빈 접시에 놓는 소리, 아이들이 “한 입만 더!”를 번갈아 외치는 소리. 그 소리들 사이로 아버지의 거의 들리지 않는 말. “달다.” 그 말이 그날의 생일 노래였다. 아이들은 서툰 글씨로 작은 카드를 썼다. “할아버지 생신 축하해요. 하늘에서 할머니가 보고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카드를 아주 오래 들여다보고는, 냉장고 문에 자석으로 붙였다. 붙이는 동작이 유난히 컸다. 마음이 크게 움직일 때, 손동작도 조금 커진다는 걸, 나는 그날 처음 알았다.
며칠 뒤, 학교 연주회에서 막내 아들이 ‘고향의 봄’을 쳤다. 강당의 의자는 딱딱했고, 무대 위 아이들의 긴장한 숨이 공중에 떠 있었다. 나는 내 아들의 차례를 기다리며, 나도 모르게 내 어린 시절의 학예회를 떠올렸다. 언제나 맨 앞줄에 앉아 가장 환하게 웃어주시던 어머니. 막내 아들의 손이 첫 음 “나의 살-던”을 치는 순간, 옆에 앉은 아버지의 어깨가 아주 조금 펴졌다. 곡이 끝나기도 전에, 아니, 마지막 코드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아버지가 박수를 ‘짝’ 하고 한 번 쳤다. 너무 빨라서 주변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였다. 어머니가 계셨다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쳐 주셨을 그 박수. 아버지가 대신 친 박수였다. “왜 먼저 쳐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들이 투덜거리자, 내가 말했다. “좋은 걸 가장 먼저 알아보는 사람이니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운전대를 잡은 손바닥이 아직 따뜻해 보였다. 어머니의 환한 웃음을 닮은 박수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그 성급한 한 번의 박수 속에 어머니의 몫까지 담겨 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아침 공기가 눈에 띄게 달라진 9월. 차창을 열자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이제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은 익숙한 순례길이 되었다. 라디오에선 뉴스가 지나가고, 우리는 대답하지 않는 말들을 귀로만 들었다. 둘째 주 토요일 오전 10시. 아버지와 나는 어김없이 어머니앞에 섰고, 늦봄에 했던 약속의 리듬을 다시 확인했다.
주차장 근처에서 들리던 새 울음소리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표식 옆 흙의 단단함, 여름내 무성했던 잡초가 조금 잦아든 모습, 나무 그늘의 길이가 한 뼘쯤 길어졌다는 사실. 우리는 그 미세한 변화들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늘 하던 일을 했다. 주변의 비닐과 종이 조각을 줍고, 흙을 손으로 한 번 고르고, 물을 부었다. 물줄기가 얇게 흩어졌다가 땅으로 사라졌다. 막내 아들이 말했다. “아빠, 오늘 흙이 덜 목말라해.” 나는 웃었다. “그렇네. 어제 비가 왔거든.”
바로 그 시간, 제주의 여동생은 약속대로 바닷가에 섰다. 모래 위에 ‘엄마, 다녀왔어요’를 썼다 지우고, 다시 쓰고. 그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가족방에 올렸다. 이어서 짧은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엄마, 여기 제주 하늘은 아주 맑아요. 우리도 여기 있어요.” 그 목소리에는 파도 소리가 섞여 있었다. 곧 아버지에게서 두 글자가 왔다. “잘했다.” 나는 핸들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조금 빠지는 걸 느꼈다.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이어지는 우리의 약속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게 우리를 묶어주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슬픔의 의식이 아니라, 삶의 일부가 된 자연스러운 리듬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며 우리는 낙엽의 초록빛이 얼마나 옅어졌는지 이야기했다. “다음에 오면 더 노랗겠지.” 아버지가 말했다. 그 말은 단순한 계절의 예보가 아니라, ‘우리는 다음에도 함께 올 것이다’라는 약속이자 위로였다. 계절은 변하고, 우리는 그 변화를 함께 볼 것이다. 그것이 남겨진 이들의 삶이니까.
돌아오는 길에 시장에 들러 사과를 샀다. 아버지는 가장 단단하고 붉은 것을 골랐다. 집에 와서 네 등분으로 잘라 각자 한 조각씩 먹는다. 과즙이 입안에서 터질 때, 아버지는 거의 들리지 않게 다시 말했다. “달다.” 우리는 웃었다. 그 달콤함은 단순히 과일의 당도가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 보낸 하루, 무사히 지켜낸 약속,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한 작은 기쁨의 맛이었다.
밤이면 서로에게 짧은 문자를 남겼다. ‘다녀오셨어요?’ ‘응.’ ‘드셨어요?’ ‘먹었다.’ 그 짧은 문장들이 하루의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었다. 짧은 말이 오히려 더 오래 서로를 붙들어 주는 밤들이 이어졌다.
돌아보면, 늦봄의 젖은 흙 위에 새긴 약속과 여름의 조용한 수리들, 8월의 서툰 생일 노래와 9월의 리듬 확인까지. 그 세 계절, 네 개의 장면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우리는 각자의 속도로 걸었고, 때로는 비틀거렸지만, 그 속도들이 모여 어느새 하나의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그 리듬 속에서 나는 안다. 어머니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나무 그늘의 떨림처럼, 김을 펼칠 때 나는 바삭한 소리처럼, 물이 흙으로 스며드는 시간처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우리의 슬픔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우리를 살게 하는 또 다른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