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엄마는 작은 새가 되어 날아갔다(2)

2장 〈어머니의 긴 투병〉

by 슬기로운 겨미생활

<아버지의 부르심>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분명 ‘국민학교’였다. 졸업반이던 그해 겨울,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대부분의 수업은 형식적이었고, 우리는 교실에서 신나게 놀았다. 분필가루가 떠다니는 따뜻한 공기, 히터 위에서 바스락거리던 젖은 장갑, 해질녘이면 주황빛으로 물들던 오래된 창틀. 그 오후에도 나는 친구들과 지우개를 탁구공처럼 튕기며 떠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교실 앞문이 드르륵— 하고 미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익숙한 얼굴이 문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였다. 그 옆에는 아버지의 손을 꼭 잡은 여동생이 서 있었다. 선생님께서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와 몇 마디를 나누셨고, 이내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퇴해라.”

“어? 왜 갑자기요?”

내가 반문했을 때, 아버지가 선생님 옆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지금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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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교실의 소음이 한순간에 마른 나뭇잎처럼 바스라졌다. 친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멀어지고, 칠판의 글씨가 물속 글자처럼 흔들렸다. 코트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 가방을 들고 복도를 걸어 나왔다. 여동생의 손은 유난히 차가웠다. 드르륵 열렸던 그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내 등 뒤에서 길게 울렸다. 지금 생각하면, 내 어린 시절 한 장면의 문이 닫히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학교 앞 겨울 빛은 얇고 단단했다. 아버지는 말수가 없었다. 아버지 차를를 타고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창밖의 가로수들이 뒤로 밀려났다. 아버지는 아무말 없이 조용히 운전하셨고, 여동생은 조용히 내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대었다. 차 안에는 낯선 냄새가 났다. 차가운 시트와 오래된 방향제의 섞인 냄새. 그 냄새는 곧 병원 냄새로 교체될 터였다.


병원 현관을 들어서자 공기는 곧장 달라졌다. 소독약의 날카로운 향, 광택 나는 바닥, 바삐 오가는 발자국 소리. ‘중환자실’이라는 글자가 박힌 표지판이 시야에 걸렸다. 간호사는 우리에게 손 소독을 권했고, 얇은 가운을 걸치게 했다. 손목에 남은 젤의 차가움이 오래 갔다. 좁은 문 하나를 더 지나자, 기계음들이 겹겹이 포개진 공간이 열렸다. 삐—, 삐—. 규칙적인 소리와 간헐적인 경고음. 커튼 사이사이로 침상들이 보였고, 투명한 튜브들이 어둑한 빛을 빨아들였다.

어머니는 그곳에 누워 계셨다. 겨울 햇빛이 높은 창으로부터 비스듬히 스며들었고, 그 빛 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은 물 위에 뜬 종이처럼 가벼워 보였다. 입가에는 관이 있었고, 손등에는 주사바늘이 꽂혀 있었다. 나는 한 발짝, 또 한 발짝, 조심스레 다가갔다. 간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걸어 주세요. 다 들으세요.”

“엄마.”


내 입에서 나온 건 그 한 단어였다. 마치 오래 잠긴 문을 여는 비밀번호처럼, 가장 단순하고 오래된 단어. 어머니의 눈꺼풀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손등 위로 얇게 솟은 혈관들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나는 그 손을 감쌌다. 손은 따뜻했지만, 힘은 거의 없었다. 그때 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말은 없었지만, 그 손의 무게가 내 등을 곧게 세웠다. 여동생은 어머니의 반대편에서 조용히 울었다.

그날 밤을 우리는 병원에서 보냈다. 보호자 대기실의 의자는 생각보다 넓었지만 넓을수록 불편했다. 자판기 커피의 종이컵은 금세 미지근해졌다.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짧고 정확한 문장들로 전화를 걸었다. 현재 상황 설명, 장소, 가능한 시간.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마다 아버지의 손등의 혈관이 또렷해졌다. 나는 졸음과 각성 사이를 오갔다. 여동생의 머리가 내 어깨에 닿을 때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몸 안 어딘가를 긁고 지나갔다.

다행인지 기적인지, 그 밤은 넘어갔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위기는 지났습니다. 장기전이 될 겁니다.” 그 말은 희망이자 판결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어머니의 시간은 거의 1년 동안 중환자실에 머무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그 공간에서 사계절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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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의 사계절>

봄, 창밖 화단의 철쭉이 멀찍이 분홍을 드러내면, 보호자 출입 시간에 맞춰 우리는 가운을 입고 손 소독을 했다. 어머니 곁에 서서 숫자를 셌다. 산소포화도 95, 96, 97. 오늘은 숫자가 올랐네—하고 아버지가 아주 작게 말했다. 나는 그 숫자를 일기장에 적었다. 여동생은 어머니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학교 소식, 동네 이야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간호사는 “들으세요. 마지막까지 청각은 남아 있어요”라고 거듭 말해주었다.

여름,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면 창유리에 물길이 생겼다. 습한 공기 때문에 마스크 속이 더워왔고, 기계음은 여전히 일정했다. 나는 숫자 대신 표정을 읽기 시작했다. 미간의 얇은 주름, 손가락 끝에 들어가는 아주 미세한 힘. 여동생은 손수건으로 어머니의 이마를 자주 닦아드렸다. 아버지는 말이 줄었다. 대신 더 자주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끄덕임에는 ‘듣는다’와 ‘버틴다’가 함께 들어 있었다.

가을, 낙엽이 쓸려 내려가는 소리가 병원 현관에서 들려왔다. 출입구의 손소독제 향은 어느새 익숙해졌고, 중환자실 입구의 작은 칠판에는 오늘 교대 간호사 이름이 적혔다. 우리는 교대의 리듬으로 하루를 어림했다. ‘오전 ○○ 간호사, 오후 △△ 간호사.’ 간호사들이 어머니의 자세를 바꿔드릴 때마다, 나는 숫자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았다. 95에서 97로, 다시 96으로. 우리는 그 오르내림 사이에서 작은 환호와 작은 한숨을 번갈아 내쉬었다.

겨울, 창밖에 다시 눈이 왔다. 한 해가 돌고 있었다.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의 대화에는 새로운 고유명사가 늘었다. 재활 가능성, 폐렴 예방, 욕창 관리, 흡인, 석션. 나와 내 여동생은 그 단어들을 기억하고, 아버지는 수납창구와 약국, 원무실과 병동을 오갔다. 우리가 잘하는 것을 조금 더 잘하게 되었고, 못하던 것도 조금씩 해냈다. 그게 가족이 단단해지는 방식이었다. 단단함은 강함과 달랐다. 금이 가도 깨지지 않는 성질, 울어도 무너지지 않는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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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의사는 말했다. “이제 퇴원 준비를 해 봅시다.” 그 말은 새로운 유형의 장기전 선포였다. 호흡기는 없었다. 어머니는 스스로 숨을 쉬고 계셨다. 다만 몸을 움직이는 일은 크게 힘들어 하셨다. 남아 있던 관들은 계획적으로 줄어들었고, 눈빛은 하루에도 몇 번씩 또렷해졌다. 우리는 집을 고쳤다. 며칠 전부터 아버지는 복도에 손잡이를 더 달고, 현관에는 미끄럼 방지 스티커를 촘촘히 붙였고, 욕실엔 의자를 들이며 문턱을 낮췄다. 낮은 쿠션과 가벼운 식기가 식탁 위에 자리를 잡았다.

퇴원 당일, 어머니는 구급차 침대에 누워 구급대원들과 엘리베이터를 내려가 구급차에 오르셨다. 나는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다. 그때 나와 여동생은 각각 학교에 있었다. 아버지가 모든 수속을 도맡았고, 간호사와 구급대원들이 환자 이송 준비를 서둘렀다고 나중에 들었다.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그려왔던 그 구급차 흰색 차체에 주황색 라인이 감긴, 붉은 등이 반짝이는 차가 실제로 어머니를 싣고 우리 집 앞으로 왔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들쳐 메고 집으로 달려갔다. 현관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낯선 말투와 익숙한 목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하나, 둘, 셋—옮깁니다.” 구급대원 둘이 침대 옆으로 들것을 밀어 넣고, 아버지는 침대 시트를 잡아 정리하고 있었다. 방 안에는 소독약과 겨울 공기가 섞인 냄새가 났다. 들것 바퀴가 마룻바닥의 문지방을 지날 때 내는 낮은 진동, 스트랩 버클이 ‘딸깍’ 하고 채워졌다 풀리는 소리, 구두 밑창이 미끄러지지 않게 바닥을 고정하는 마찰음. 나는 문지방에서 잠깐 멈췄다. 가방 끈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오고, 손끝이 뜨거워졌다.


“학생, 잠깐만 이쪽으로 비켜줄래요?” 구급대원이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벽 쪽으로 붙었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고 내 눈을 아주 짧게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시선에는 ‘여기 있다’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들것의 스트랩이 풀리고, 호흡기 없이 조심스럽게 움직임을 최소화한 채 어머니의 몸이 아주 천천히 침대로 옮겨졌다. “좋습니다, 어르신. 여기 손 한 번만 더 받쳐 주세요.” 아버지는 양손으로 어머니의 어깨와 허리를 받쳤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송이 끝나자 구급대원은 호흡 보조 장치 없이도 호흡이 안정적인지, 맥박과 피부색을 살피고, 이불 모서리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서류 몇 장에 아버지가 서명을 했다. “불편하시면 바로 콜 하세요.” 문이 닫히고, 복도로 구급대원의 발걸음이 멀어졌다. 그제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소독약 냄새 대신, 집 냄새가 서서히 돌아왔다. 쌀 씻는 물, 다림질한 옷감, 햇볕에 데워진 장판. 나는 그제야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엄마, 집이야.” 그 말은 주문 같았다. 어머니의 입가에 아주 작은 곡선이 생겼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오랜만에 된장국을 끓였다. 여전히 조금 짰다. 하지만 그 짠맛은 더 이상 서툴지 않았다. 삶의 농도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네.” 그 말은 감사가 앞서는 문장, 미안함을 가리는 웃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준 허락이었다.


그날부터 ‘느림’은 우리 집의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 밥 한 숟가락을 들고, 물컵을 들어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온갖 동작 사이사이에 휴지 같은 정적이 끼웠다. 나는 그 느림 속에서만 보이는 것들을 배웠다. 손등을 흐르는 미세한 혈관, 수저를 쥘 때 엄지에 들어가는 힘, 미간에 잠깐 떠오르는 얇은 주름. 여동생은 머리를 말려드렸고, 아버지는 저녁마다 의자에 앉아 어머니와 텔레비전을 보았다. 우리는 말 대신 고개를 자주 끄덕였다. ‘듣는다’와 ‘버틴다’가 우리의 문장 부호가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종종 빵집에 들렀다. 부스러기가 적은 크림빵을 골라 집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빵을 반으로 잘라 내게 먼저 건넸다. “너 먼저.” 나는 내 몫을 조금만 베어 물고, 나머지를 어머니 쪽으로 밀었다. 서로의 몫을 미루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살아냈다. 명절이 오면 우리는 ‘집 냄새’를 복원하려 애썼다. 쌀 씻는 물, 다림질한 옷감, 햇볕에 데워진 장판. 어머니는 한 숟갈 드시고 조용히 말했다. “집이네.”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사춘기가 오자 나는 모순덩어리였다. 학교에서는 장난이 늘었고, 집에서는 말수가 줄었다. 문을 쾅 닫고 들어간 날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내 손목을 살짝 잡았다. “괜찮다.” 그 말은 놀랍도록 가벼웠다. 가벼워서 오히려 무거웠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괜찮다고 한 건,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옆에 있겠다는 약속이었다는 것을.

대학에 가고, 군대를 다녀오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했다. 나는 부모님과 따로 살았다.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마음의 거리는 줄지 않았다. 주말이면 부모님 집을 찾았다. 평일 저녁에도 틈틈이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의 호흡이 가끔 거칠게 느껴지면 대화는 짧아졌다. 짧은 통화가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몸이 허락한 시간만큼만 말을 나눴기 때문이다. 아내는 우리 집의 느린 언어를 곧잘 배웠고, 아이들이 태어나자 그들은 신기하게도 아주 빨리 익혔다. 큰딸은 물잔을 두 손으로 받쳐 드렸고, 작은딸은 무릎담요를 반듯하게 펴 드렸다. 막내 아들은 어머니의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고 “고무줄”이라며 장난을 쳤다. 그 장난에 어머니는 꼭꼭 씹은 웃음을 지으셨다.

물론 퇴원이 끝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외래 진료와 재활은 계속되었다. 어떤 날은 몸이 비교적 말 잘 듣는 것 같았고, 어떤 날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아는 리듬으로 하루를 살았다. 숫자를 적고, 약을 정리하고, 물을 데우고, 창문을 열어 햇빛을 들였다. 햇빛은 약이 되었다. 창틀 위에 온기가 고이면, 어머니의 어깨가 아주 조금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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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분노가 찾아왔다. 왜 하필 우리 가족인가, 왜 이렇게 오래, 왜 이렇게 힘들게. 그 질문들은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 질문 뒤에는 다른 문장이 기다렸다. ‘그래도 우리는…’ 그래도 우리는 매일같이 밥을 먹었다. 그래도 우리는 가끔 웃었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생일을 챙겼다. 그래도 우리는 봄이면 창문을 열고, 여름밤의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가을 낙엽을 밟으며 사진을 찍고, 겨울이면 뜨끈한 국물에 몸을 데웠다. ‘그래도’라는 말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문장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끝내 2025년 2월의 어느 일요일 낮, 작은 새가 되어 날아가셨다. 중환자실에서의 그 1년은, 먼 과거로 밀려났다가도 자주 현재형으로 되돌아온다. 그 시간은 우리 가족을 부서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닮게 만들었다. 내게 남긴 한 문장. “무너진 자리에는 사랑을, 천천히 쌓아라.”

그날의 드르륵 열리던 교실 문, 차가운 병원 공기, 숫자의 오르내림, 보호자 대기실의 밤, 병원 직원의 친절한 말투, 여동생의 차가운 손, 아버지의 굳은 등, 퇴원 날의 바깥 공기, 집 안에 단단히 박아 넣은 손잡이들. 그 모든 조각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나는 여전히 그때의 길을 걷고 있다. 다만 이제는 안다. 느리게 걷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본다는 것을. 어머니가 오래, 아주 오래 가르쳐준 방식으로.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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