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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Oct 25. 2019

[독서후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언제쯤 올 것인가

    우리는 현재, 좋든 싫든 신자유주의의 흐름 안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고등학교 경제 수업 시간에서 언급하듯, 70년대 오일쇼크 이후로(벌써 50년 가까이 되어간다. 시간은 정말 빠르다.) 수정주의 경제가 실패를 겪으면서 등장한 것이 '레이거노믹스'나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라는 내용이 여전히 기억이 남는다. 이 책은 그 신자유주의를 겨냥한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현재 세계 경제는 미국이 주도하는 부자나라 협력체가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급격히 경제지형이 흔들렸고, G2의 다른 한 축인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미국의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한 것도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앞서 언급한 협력체란 IBM(국제통화기금), IBRD(국제부흥 개발은행, 세계은행), WTO(세계 무역기구)를 일컫는다. (본 책에서는 이들을 사악한 3 총사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룩해 놓은 경제적 성과를 가지고서 개도국에 신자유주의를 강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바라는 것은 바로 '자유무역'과 '자유시장'이다. 하지만, 이들의 소원이야말로 참으로 이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정작 선진국들 자신은 오래전에 보호관세와 각종 보조금, 그리고 외국인 투자자 차별을 통한 중상주의를 통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841년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영국이 보호관세와 보증금으로 패권을 장악해 놓고서 타국에는 자유무역을 권장하고 있다!'라고 질타하며,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는 표현으로 이를 압축하였다. 


    이 책은 바로 지난날의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역사와 함께 선진국들이 사다리를 '어떻게' 걷어찼는지,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석하고, 마지막 장에서 지금의 현실을 근거로 한 시나리오를 통해 신자유주의가 가져다 줄 암울한 역사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말미에 제시하고 있다.


    자유 무역을 촉진해 온 것은, 식민주의불평등 조약, 그리고 보호무역이라고 지적하면서, 이것이 가져다준 불평등과 불합리함은 빼놓은 채 단지 신자유주의의 견해에 부합하도록 표현되어 있다고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 현재도 소득의 불평등과 성장의 둔화(국가 주도 성장 시기와 비교해 볼 때), 경제적인 불안을 그저 풍요의 시대로 포장하고 있다고 전한다.


    저자는 선진국이 관세장벽을 통해 기술 우위를 획득한 이후, 모든 나라에게 자유무역을 강요하고 있다 말한다. 선진국은 유치산업을 보조금과 공기업 설립 등 제도적 장치로 보호하면서 말이다. 후진국은 유치산업이 그들에 의해 씨가 마르면서 자연히 불평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자본의 개방이라는 것도 결국 개도국의 경제상황을 그들이 쥐고 흔들겠다는 생각 다름 아니다. 공기업의 민영화도 무분별하게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실패를 낳을 것이라며 국영화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지적재산권 문제 또한 합리적인 듯 보이나 반쪽자리 진실이라면서, 선질 기술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는 후진국에게 기술 차단을 발생시켜 결국 자신들에게 막대한 특허비용을 지불하게 만든다. 어차피 불평등한 기술 차이에 쌍무적인 관계까지 요구하니 어찌 개도국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그 외에도 신자유주의에서 말한 경제의 탈정치화나 통화주의적 접근(개도국에 대한 통화량 규제), 문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국민성이나 민족적 습관에 따라 개도국은 게을러서 발전이 느리다는 식의 인식, 유교는 발전지체의 원인이라는 시각, 유교로 아시아적 자본주의가 가능했다는 식의 시선)을 언급하며, 이는 선진국의 일방적인 시각이며, 그들만을 위한 해석에 지나지 않음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신자유주의의 미래를 통해 앞으로 이러한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발전을 원한다면 무작정 시장을 따라가기보다,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 장기 발전을 위한 단기 희생도 무릅쓰라는 것이다. 우수한 제조업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함을 매우 힘주어 말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외치는 지금에서 봐도 분명 의미 있는 시각이다.) 1, 2차 산업이 없는 토대에서, 3, 4차 산업을 논의하는 것은 분명 무의미하다.


    기울어진 경기장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무조건적인 평등을 강요하는 것은 이미 사다리를 걷어차버린 선진국의 일방적인 횡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다 잘 살기 위해서는 개도국에 대한 핸디캡이 주어져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책을 통해 많은 부분이 공감 갔지만, 국가 주도의 산업을 옹호하거나, 개발주의 독재에 대한 지지가 분명 거부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이는 우리 한국사회가 겪어본 여정이 어땠음을 배우고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도 다른 차원의 희생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잘 살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 예전부터 모두가 꿈꿔오던 세상이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Utopia라 하지 않았던가. 이상향, 현실에는 존재하기 어려운 곳이겠지만, 저자인 장하준 교수는 그 이상향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하여 제언을 가득 담은 이 책을 썼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조금 더 나은 세상, 모두가 잘 사는 세상. 언제, 과연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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