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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nRy Sep 03. 2020

귀찮다, 고로 소비한다

귀차니즘을 정기적 소비로 치유한다

세상 편해졌다는 얘기 참 많이들 한다. (이 얘기를 자주 하는 순간부터 아재 인증하는 거다.)

다양한 서비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출시되고, 체험해보라는 손짓에 이끌려 이것저것 체험해보고 그리곤 또 결제하고, 그것을 반복하는 요즘이다.


시작할 때는 ‘잠깐만 써보고 말아야지’하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져 매월 정기결제를 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 기저에는 ‘귀찮음’이 깔려 있다.


학창 시절 기억을 먼저 떠올려본다. 때는 바야흐로 2000년대 초반, 서울엔 이미 초고속 인터넷(들어는 봤나 ADSL이라고)이 좌악 깔리기 시작했고, 우리 동네에는 이제야 영세업체에서 유선방송을 끼고 인터넷을 홍보하던 시절이다. 중학생이던 나는 컴퓨터도 너무 갖고 싶었고, 인터넷이라는 것도 맘껏 하고 싶었다. 모뎀으로 통신에 접속했다간 집에서 쫓겨날 게 분명했을 테니까.


갖고 싶던 컴퓨터와 인터넷을 손아귀에 쥔 나는 닥치는 대로 자료를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소리바다’에서 노래를, P2P를 통해 각종 영화와 게임을.

(이제서는 그때의 행동이 다 불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반성한다.)

그 많은 자료들은 하드디스크에, 그리고 당시 라이터기를 사용해서 CD에 차곡차곡 모아두곤 했었다. 그 시절에 모아둔 자료들을 오래도록 보관하며 잘 쓸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나이가 들어 대학생이 되고 군대를 다녀온 이후엔 그 자료들은 더 이상 내게 유의미한 것들이 아니었다. 귀찮음을 덜어보려고 차곡차곡 정리해두었던 것들이 무쓸모가 되었을 적의 허탈함이란.


시간이 흘러 스마트폰을 쓰면서, 음악 스트리밍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었다. 처음엔 공짜로 언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해서 선택했던 ‘ㅁㄹ’ 서비스. 출퇴근길에 이어폰만 있으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으니, 그간 노래를 찾기 위해 다운로드하고 기기에 집어넣고 할 ‘귀찮음’이 싹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이후로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중단해 본 일이 없다. 오히려 이것저것 체험해보며 다양한 서비스에서 노래를 들어보고 있다. (이래서 돈을 못 모으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나 미드를 종종 챙겨보던 내게 ‘ㄴㅍㄹㅅ’는 정말이지 구원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고, 출장 가서도 틈만 나면 챙겨볼 수 있었던 영상 스트리밍. 한 달에 나가는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지금도 잘 활용하고 있고, 어렸을 적부터 모아뒀던 CD에 있던 명화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어릴 적 내 수고를 더욱더 덧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노트북이나 PC에 CD-ROM이 안 달려 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참 오래되었다.


‘ㅇㅌㅂ’도 프리미엄 체험 때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보고 있다. 광고를 보기가 너무나 귀찮았던 내게, 차라리 돈을 내고 끊김 없이 보라는 은혜로운 손길을 어찌 마다할 소냐. 그렇게 알고리즘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며 오늘도 몇 번이고 켜고 끄고를 반복했더랬다. 얼마 뒤에 가격이 훅 오른다고 하니, 보실 분들은 차라리 이 기회에 결제하고 그나마 싼 가격으로 보는 것을 추천드리는 바이다.


단순히 음악/영상에만 그치진 않았다.


‘ㅋㅍ’의 로켓 와우, ‘ㄴㅇㅂ’의 플러스 멤버십 등 매월 결제를 하고 일부 혜택을 받는 구독형 멤버십들이 있다. 이것도 체험부터 시작이었다. 특히 이런 서비스들은 가입 후 쇼핑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금방 끊게 될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이 그리 쉽게 흘러가진 않기에. 아이가 있는 집에선 로켓 배송이 최고라는 것을 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래저래 갑자기 필요한 물건들이 생기고는 하는데, 그걸 매번 여기저기서 구하기도 어렵고, 싸게 구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를 해내는 갓팡, 정말이지 감사할 따름이다. ‘ㄴㅇㅂ’는 내가 열렬한 쿠키 베이커이기 때문에 그냥 가입했다. 어차피 주어지는 쿠키와 이것저것 쌓이는 포인트 덕에 충분히 이득을 보고 있다.


나의 ‘귀찮음’을 꿰뚫어 본 이 많은 업체들 덕분에, 나는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심리적으로 많은 귀찮음을 덜어내었다. 그렇게 덜어낸 귀찮음은 나에게 약간의 잉여시간을 벌어주었고, 이를 나는 다시 의미 있게 써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사람들 중에 이 돈 아까워서 못 쓴다고 하시는 분들도 분명 많을 테지만, 다시 한번 잘 생각해보라. 그깟 영상광고 15초라고 생각할지라도 15초가 쌓이면 나중에 1시간도 될 수 있는 거다. (얼마나 ㅇㅌㅂ를 봐야 쌓일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배송비, 배송시간도 아낄 수 있다. 부가적으로 주어지는 혜택들도 쏠쏠하다.


이렇게 쓰고 나니, 내가 ‘귀찮음’을 핑계 삼아 나의 소비욕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지만, 아무렴 어떻겠나. 내가 번 자그마한 돈의 일부를 나를 위해 사용하는 거니까.

지금 이 글을 쓰는 도구도, 나의 ‘귀찮음’을 핑계로 장착한 물건이다. (다음에 소개할 일이 있기를)


오늘도 귀찮음을 한 숟갈 덜어내며, 또 그렇게 소비할 핑곗거리를 찾아 나서 본다. 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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