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한 레스토랑에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창 밖으로는 불빛이 반짝이는 근사한 야경이 보이고, 내 앞에는 턱시도를 차려입은 잘생긴 점원이 가져다 준 스테이크와 와인이 놓여있는.....결혼기념일의 저녁을 기대해왔다.
살아보니 남편과의 결혼이 그리 기념해야 할만한 일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미와 낭만이라고는 1도 없는 남편과 살면서 일년에 하루, 결혼기념일만이라도 조금은 다르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취향은 소주에 삼겹살. 술을 좋아하는 남편 떄문에 운전을 해야만 갈 수 있는 근사한 곳은 애초에 갈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늘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서 한끼를 떼우고 오는 식이었다. 그나마도 내가 찾아서 예약하고 통보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남편이 먼저 저녁을 어디서 먹을까 하는 말을 꺼냈다. 물론 남편이 내민 곳은 집에서 몇발자국 나가지도 않아서 보이는 레스토랑. 잊어버리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데 심지어 레스토랑이라니... 왠일이래?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남편이 예약을 했는지 물어왔다.(예약은 내가 하는거 였어?) 나는 예약을 하지 말고 기다려 보라고 했다. 점심에 먹었던 쌀국수가 너무 짜더니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되질 않았다. 레스토랑의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떠올려보는데 입맛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내 입맛으로는... 그래 초밥이 낫겠다. (역시나) 집앞에 새로 생긴 회전초밥집에 초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남편은 바로 오케이 했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이 먼저 와 있었다. 빨간 장미꽃이 다섯송이나 섞여있는 예쁜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호들갑스럽게 좋아해주었다. 장미꽃 한송이면 충분한데... 나머지는 돈으로 줬더라면 더 좋아해주었을텐데... 그래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회전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천천히 돌아가는 초밥을 하나씩 집어다 먹었다. 남편은 소주, 나는 생맥주를 마셨다. 우리가 나눈 대화의 대부분은 "이번에는 뭘 먹어볼까?"였다. 역시나 그날의 내 입맛에는 스테이크보다는 초밥이었다. 두사람 모두 먹는 것에 충실했고, 도합 서른 두접시를 먹어치웠다. 식사비도 레스토랑보다 훨씬 저렴하게 나왔다. 꽃다발을 선물받았으니 식사비는 내가 계산했다.(그리고 남편에게 생색을 오지게 냈다)
그렇게 우리의 스물아홉번째 결혼기념일은 끝이 났다. 혼자 기대하고 설레다가 김이 빠져버렸던 이제까지의 결혼기념일과는 많이 달랐다. 낭만적이지도 않고 시시했지만...... 편안했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낭만은 개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