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싫어하는 남편과 살면

by 하이디

내 남편은 운전을 싫어한다. 그래서 자기가 꼭 필요할 때만 운전을 한다. 그런 남편이 요즘은 매일 차를 가지고 출근한다. 이유는 차가 좋아서. 이제까지 계속 중고차만 탔었던 우리는 얼마전 처음으로 새차를 샀다. 그것도 남편이 마음에 들어하는 제법 고급스러운 차로. 원래 운전을 좋아하지 않으니 차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새 차를 사고나서부터는 차를 어찌나 애지중지 하는지 내가 쓰는게 엄청 눈치보인다.


운전이 능숙하지 못한 나는 남편의 애마(?)에 흠집이라도 내면 그 뒷감당을 어찌해야할까 싶어서 운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가끔 운전을 해야할 일이 생긴다는 것. 나에게 운전대를 넘기지 않는 대신에 내가 필요할 때 군말없이 운전기사 노릇을 해주면 좋으련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나는 남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걸 몹시 싫어한다. 그게 아무리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이더라도 눈치를 보게 되는게 더럽고 치사해서 어지간하면 남에게 부탁하지 않고 그냥 내가 해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남'에는 남편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래서 남편에게 운전을 부탁하는게 무척 어렵다.



1.

지난 주 언니가 사과를 한박스 주겠다고 해서 가져와야 할 일이 있었다. 5kg짜리 작은 상자지만, 들고오기에는 무거웠다. 형부가 퇴근하는 길에 우리 집에 들러서 주고 가겠다고 했지만, 얻어 먹는 주제에 길이 막히는 퇴근시간에 우리집까지 배달을 시키는 건 너무나 염치없는 일이었다. 나는 남이 싫어하는 일만큼이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도 절대 하고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운전을 싫어하는 남편에게 사과를 가지러 가자고 하면 마지못해 가겠지만, 난 그 '마지못해'를 견디는 것이 너무나 불편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가 차를 쓰는 건 남편이 못마땅해 할 것 같아서 다른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생각해낸 방법이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가 캐리어에 사과를 담아서 지하철로 가져오는 방법이었다. 쇼핑카트를 끌고 갈까도 생각했지만, 쇼핑카트를 끌고 지하철을 타는 건 너무 폼(누가 본다고?)이 안날 거 같아서 캐리어를 가져가기로 했다.


역시 여행용 캐리어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행용 캐리어 안에 사과가 들어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집은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 노선이 지나는 곳이니 누가 봐도 여행을 가거나 다녀오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파 끄트머리가 밖으로 삐져나온 쇼핑카트를 끌고 지하철에서 내리는 할머니를 보니 내 번뜩이는 잔머리에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2.

이번 주 주말에 처음으로 김장을 한다. 배추는 절임배추를 주문해서 집 현관앞까지 무사히 배달이 되었지만, 무는 내가 직접 가서 사야했다.우리 동네 농수산물 시장은 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다발무 한단에 커다란 무가 대략 대여섯개가 달려있는데 석단은 사야하니 도저히 나 혼자서 들고 올 수 있는 양과 무게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다.


2주 전에 무김치를 담그느라고 한번 남편 찬스를 썼던 적이 있어서 또 부탁을 하자니 남편의 그 '마지못한' 표정이 또 마음에 걸렸다. 남편에게 며칠 전부터 시장에 같이 가야함을 인지시켰지만, 역시나 마음이 불편했디. 그래서 우선 집 앞의 마트에 가보기로 했다. 김장철이라서 그런지 요즘 마트에서도 종종 김장재료들이 보여서 혹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어지간하면 그냥 마트에서 살 작정이었다.


다행히 마트에서도 김장무를 팔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석단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무 다발이 너무 무거워서 쇼핑카트에까지 옮기는 것도 엄청나게 힘들었다. 장바구니에 무 석단을 꾸역꾸역 밀어넣고 배달접수를 하러 접수대로 갔는데, 그런 상태로는 배달이 불가하다고 거절당했다. 무청이 안보이도록 박스에 포장을 다시 해와야 한단다. 게다가 박스를 테이프로 단단히 붙여야만 배달이 가능하단다.


결국 무거운 무다발을 박스 두개에 다시 옮겨담고 테이프까지 사서 붙인 후 배달접수를 마쳤다. 무다발을 옮기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등줄기에서는 땀이 흐르고 마음속으로는 남편을 향한 원망(욕)이 바가지로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남편에게 운전을 부탁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도대체 나는 왜 이러고 살까. 사과도 김치도 남편이 제일 좋아하고 제일 많이 먹을텐데 왜 나만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지 억울하다. 귀찮아하는 남편의 표정을 그냥 못본 척 넘겨버리면 그만인데, 나는 왜 그게 안될까. 사람의 관계는 서로 길들여지는 거라는데, 나는 처음부터 남편을 잘못 길들인 것 같다. 아니 내가 남편에게 잘못 길들여진 것 같다.


이런 여자와 저런 남자가 만나면 결국 이 모양으로 살게 되나 보다. 그러게 남편을 잘 골랐어야지! 내가 선택했으니 누굴 탓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30년이나 살았는데 이제와서 무를 수도 없고...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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