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신 친정 엄마를 돌보며 알게 된 노인의 마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께서 "내가 죽으면..."이라고 하면 아직 멀었는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냐며 펄쩍 뛰었다. 그때는 실제로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 생각했고, 그보다 부모님의 부재는 상상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엄청난 일이라 아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난해 연말에 엄마가 빙판길에 넘어지셔서 발목뼈가 부러지고 허리를 다치시면서 1월 내내 일주일에 사나흘씩 친정에서 지냈다. 결혼한 이후로 부모님과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 지내는 게 아마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늘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계셔서 크게 실감하지 못했는데 가까이에서 지켜본 부모님은 생각보다 훨씬 늙어 있으셨다. 초저녁에 드라마를 보면서 깜빡 졸고 나면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해 약의 도움을 받아 잠을 청하셨고, 그나마도 주무시다가 몇 번씩 깨어 화장실을 다녀오시느라 아침 컨디션이 늘 개운하지 않아 보였다.
어둑한 새벽에 시작되는 하루는 매일매일 별다른 변화도 없이 그날이 그날이었다. 그렇다보니 하루 세 번 시간 맞춰 차려지는 세 끼 식사에 더욱 집착하셨고, 하루종일 집안 가득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TV소리는 유일한 말동무이자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처음에는 갑갑했다. 세상에 재미난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밖에 나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취미생활도 하시지, 아니면 집에서 책이라도 읽고 하다못해 스마트폰 기능이라도 익히시면 좋을텐데 왜 그렇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실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메워보려고 부모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잔심부름을 하는 소사로 시작하여 회사의 임원 자리까지 오르셨던 파란만장한 직장생활 이야기를 주로 하셨다. 평소에도 당신의 전성기 이야기를 하실 때면 눈에 생기가 돌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같은 이야기를 매번 처음 하시는 것처럼 신나게 늘어놓으신다. 그래서 아버지의 직장생활은 늘 성공적이고 화려했던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좀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직장 내 세력다툼에 밀려 한직으로 밀려나 책상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시며 일년 반을 지내신 적도 있다고 하셨다. 살림만 하는 아내와 어린 네 명의 자식들에게 당신의 월급은 곧 생명줄이었기에 어떻게든 버텨야 했노라고 하시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도 부모로서 자식을 생각하는 그 당시의 아버지 마음이 너무도 이해되었고,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아버지에게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이야기가 끝나고 마음을 다해 아버지께 전한 감사와 존경의 인사가 조금이나마 보상이 되셨기를 바랐다.
외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되는 엄마의 인생 이야기는 전쟁통에 피난 내려와 고아가 되고, 산업화 시대의 여공생활을 거쳐 가난한 집안의 장남과 결혼 후 빠듯한 살림살이를 힘겹게 감당해 온,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근대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야기였다. 지금은 다 잊었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시지만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인생을 살아오신 엄마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 인생의 한계단 한계단을 천천히히 내려오고 계신다.
부모님의 파란만장한 인생사에 이어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현재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두 분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생을 마감할 것인가', 아니 '어떻게 죽게 될까' 하는 문제였다. 누구나 겪는 죽음이고 나이만큼 예상할 수 있는 죽음이기에, 여든 넷의 노인이라면 충분히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을 거라 생각했다.
점점 늙어가시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상상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던 부모님의 부재를 나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정작 당신들은 그렇지 못한 듯했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고, 먼저 경험한 사람들의 경험담은 당연히 들을 수도 없으니 머지않아 맞이할 죽음에 대해 얼마나 큰 두려움을 가지고 계시는지 대화를 하면서 조금 느낄 수 있었다.
하루 세 번 정확한 시각에 차려져야 하는 끼니에 대한 집착과 세상 떠난 후를 대비해 틈만 나면 주변을 정리하시는 모습에서 당신들 마음 안에 삶의 의지와 죽음에 대한 수용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매 순간 마지막을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과연 새로운 것을 찾아 삶의 변화를 주고 오늘을 즐기시라는 말이 얼마나 다가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위로하고 사후 세계에 대한 그럴싸한 판타지를 지어내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줄여드리는 게 훨씬 도움이 되지 않을까...
병수발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효도였지만 부모님과 함께 한 시간들이 꽤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지내면서 노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고, 더불어 나도 어떻게 노후를 준비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오십중반의 나이로 느낄 수 있는 수준일 뿐이고, 아마도 이 다음에 지금의 부모님 나이가 되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