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디 Apr 23. 2023

죽는 건 두렵지 않아, 혼자 남겨지는 게 무섭지

평생 웬수 같았던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는 친구 어머니와의 대화

여유로운 주말 오후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친구 아버님의 부고장이 날아왔다. 친구 아버님은 허리 수술을 위해 입원이 예정되어 있던 어느날, 욕실에서 넘어지시면서 대퇴골을 다쳐 7년동안 병상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연로하신 탓으로 수술 후에는 각종 후유증과 치매 증상까지 나타나면서 몇번의 고비를 맞이하며 가족들의 애를 태우셨었다. 외국으로 이민 간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의 몫까지 혼자서 아버님을 보살피고 있던 친구는 아버님의 입원으로 집에 혼자 남겨지신 어머니를 살피는 일도 고스란히 혼자서 떠맡고 있어 늘 힘겨워 보였다.

친구의 남편도 몇 년 전 퇴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와 함께 살고있는 형편이라서 문상객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소식을 받자마자 서둘러 갔다.


역시나 빈소는 마련된 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썰렁했는데, 그래도 친구의 대학동기들이 일찌감치 와서 한쪽 자리를 채워주고 있어 덜 쓸쓸해보였다. 역시나 좋은 일에는 신경을 안 쓰더라도 굳은 일에는 함께 해주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문을 마치고, 새벽부터 그제껏 식사도 제대로 못하신 친구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했다. 장례식장에서 먹는 육개장이 언젠가부터 맛이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맛있게 먹어지는 걸 보면, 나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건가 싶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장교로 근무하셨고, 잠깐 교사로도 근무하셨던, 그 시대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남편의 반대와 식모(가사도우미)의 아동학대에 가까운 만행으로 자신의 일을 접고 전업주부로 사셔야 했다. 친구의 아버지는 지극히 평범한 남성이었지만, 그 시대에 보기 드물게 꿈 많고 능력도 출중하셨던 어머니는 일을 못하게 했던 남편을 평생 원망하며 사셨다. 그리고 그 원망이 너무 깊어 병상에 누워계시는 아버님을 잘 찾지도 않으셨고, 마지막 인사에도 원망의 말을 쏟아내셨단다.


상심이 크실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의 인생에 아쉬움이 크신 어머니의 주된 얘깃거리는 역시나 당신이 잘나가셨던 옛날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비슷비슷한 이야기가 슬슬 지루해질 때 쯤, 어머니는 가슴을 울리는 말씀을 한마디 꺼내 놓으셨다.


"내가 죽는 건 하나도 안무서웠는데 남편이 죽을까봐 그게 너무 무서웠어. 혼자가 되니까."


평생을 원망하고 그 마음이 너무 커서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원망을 쏟아내셨던 분이 자신의 죽음보다 남편의 죽음을 더 두려워 했다니 의아했다. 하지만 끝에 "혼자가 되니까"라는 말에는 알 듯 모를 듯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노인들에게는 혼자 남겨진다는 게 그런거구나...



내 남편은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젊어서야 사람으로보다 남자로 먼저 보이니 가끔 이쁜 구석도 있었다지만, 나이들어 가면서는 못마땅하고 이해가 안되는 것 투성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가끔은 나에게 일거리만 안겨주는 성가신 존재로 느껴지기도 해서 어쩌다 출장이나 여행으로 집을 비우게 되면 홀가분하기까지 한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그래서 내가 혼자 남겨진다면... 


스물여덟에 결혼을 해서 올해로 결혼 27년차이니 내년이면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 남편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친구의 어머님이 느끼시는 그 두려움에는 훨씬 못미치겠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 해서 아이 낳고 키우고, 인생의 우여곡절을 함께 겪으며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남편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나에게 어떤 존재이고, 내 인생의 어떤 의미인지.


문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남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한 개 샀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님의 두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