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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May 19. 2023

가는 여행보다 보내는 여행이 좋구나


살짝 약 오르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  이 기분은 뭐지? 역시 개미 팔자와 베짱이 팔자는 따로 있는건가?



끼니 때가 되어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으니 아무리 안식년이라고 해도 여전히 밥도 내가 하고 빨래도 내가 하고 청소도 내가 한다. 식구들이 조금씩 거든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드는 것이지 결국 모두 다 내 몫이다.



내가 집을 떠나지 않는 이상은 벗어날 수 없는 일들이기에 안식년을 계획하면서부터 나는 혼자만의 여행을 가장 먼저 꿈꾸었더랬다. 하지만 아직 한번도 혼자서 여행을 가본적이 없어 용기가 나질 않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내 나름의 디데이를 잡았다. 지금 일주일에 이틀 하고 있는 일이 학교행사로 쉬는 날이 생겨 그날들 즈음으로 내 첫번째 여행을 계획했다. 2박3일 정도의 일정으로 5월 18일과 30일 두 날짜를 잡았다.



© luolei, 출처 Unsplash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가족을 떠나 혼자 지내며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고 싶었고, 내가 없는 동안 가족들도 나의 빈자리를 느껴보게 하고 싶었다. 솔직히 후자의 목적이 훨씬 더 컸다. 매일 해도 표나지 않는 일들이 내가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려주고 싶었고, 이 참에 식구들도 집안일을 스스로 해결하며 얼마나 귀찮고 힘든지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어쩌면 한달도 아니고 꼴랑 2박3일에 식구들이 얼마나 달라질까마는 그렇게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그거 봐. 내가 얼마나 힘든지 이제 알겠냐!'



그런데 남편이 18일과 29일에 친구들과 1박2일 골프여행을 잡아버렸다. 나보다 먼저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물론 내가 먼저 여행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고, 날짜가 겹치는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는데도 약이 오르고 화가 났다. 나도 그때 여행을 가려고 한다고 말했어도 남편은 그것과 상관없이 자기의 여행을 추진했을 것이다.



나는 며칠간 집을 비우려면 내가 없는 동안 식구들 밥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시라도 빨래가 밀려 아이들이 신고 나갈 양말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아침 저녁으로 창문을 열어 환기는 꼬박꼬박 잘 시킬지... 별의별 걱정이 한가득인데, 남편은 이런 모든 일들이 머리속에 하나도 없으니까 아무 때나 여행을 떠나는 것이 너무나도 쉽다.



그래서 억울하다.... 약이 오른다.... 아무래도 나는 전생에 개미였고, 남편은 베짱이였나보다. 아니면 내 여행에 숨겨진 의도가 순수하지 못해 하늘에 있는 누군가에게 괴씸죄라도 걸린 것인지...



날씨도 화창하고 바람까지 적당히 시원한 날, 남편은 골프가방을 들고 신나게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가는 친구들과의 여행에 한껏 들떠있는 남편의 뒷통수가 몹시 얄미웠지만, 따지고 보면 남편이 딱히 잘못한 일도 아니니 대놓고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인생사 세옹지마라고, 남편의 부재는 나에게 생각지도 않았던 자유와 평화를 안겨주었다. 남편이 없는 동안 저녁 밥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늘 식사준비로 분주하던 저녁시간에 뭘 해먹어야할지를 고민하는 대신에 넷플릭스에서 어떤 영화를 볼 지를 느긋하게 고를 수 있는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라면 하나 끓여 쟁반에 받쳐 들고 TV앞에 앉아 영화를 보며 먹는 저녁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익숙한 공간에서 누리는 자유로움!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여유로운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니 남편의 여행이 곧 나의 여행이고 진정한 해방인 것이다. 이쯤되니 누가 개미이고 누가 베짱이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앞으로도 내 여행을 계획할 것이 아니라 남편의 여행을 적극적으로 밀어줘야 할까보다.



나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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