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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May 28. 2023

여행보다 '일'을 하고 싶다.


월급이 들어왔다. 팔십.구만.천.이백.사십원. 이 돈으로 뭘 할까? 배우고 싶었던 해금 수업도 신청하고, 몇 년 전 체육문화회관에서 배우다가 그만 둔 탁구도 다시 시작하고, 여행 경비로도 써야겠다. 다음 주에 친정에 가면 부모님 모시고 근사한 곳에 가서 저녁식사도 해야겠다. 입금 확인 문자를 보는데 마음이 들뜬다.



통장에 찍힌 '급여'라는 글자에 마음이 설렌다.



주부안식년 동안에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여행'이라고 답했었다. 나에게 여행의 의미는 '즐기는' 것보다 '벗어나는' 것의 이미가 더 컸다. 며칠만이라도 집안일에서 벗어나고 남편과 자식들에게서 벗어나서 아무 것도 신경쓸 일이 없는 곳에서, 나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안식년에는 여행을 다니며 놀기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작년에 잠깐 했었던 일을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일을 할 수 있는 기회 앞에, 아니 돈을 벌 수 있는 기회 앞에 여행은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지난달 말부터 파트타임이지만 다시 일을 하게 되었고, 오늘 그 첫 월급을 받은 것이다.



전업주부로 살면서 늘 워킹맘들이 부러웠다. 아침마다 후즐근한 티셔츠 차림으로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면 잘 차려입고 출근하는 아이 친구 엄마가 부러웠다. 동창회에서 잘 나가는 친구에게 명함을 건네 받을 때면 애써 밝게 웃어보였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또 어쩌다가 남편에게 직장 다니는 친구 와이프 얘기를 들을 때면 나와 비교해서 하는 말도 아닌데 괜시리 주눅이 들었다.



밥 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식구들 챙기고, 하루종일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요즘 뭐하냐는 질문에는 항상 "그냥 집에서 논다."고 대답했다. 나 스스로도 집안일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출퇴근을 하고 월급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일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집에서 쉬는 날도 없이 거의 매일을 새벽근무에 야근까지 하는데도 돈을 벌지 못하니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출근해서 월급을 받아오는 남편은 가족들을 위해 힘들게 일하는 사람이었고, 살림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나는 남편이 벌어오는 돈을 집에서 편하게 쓰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돈을 쓰는 우선순위에서도 나는 늘 뒤로 밀렸다. 알뜰함이 지나쳐 궁상맞다고 핀잔을 들었지만 가족들을 챙기기도 벅찼다. 비상금이라도 만들어볼까 해서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그 마저도 치솟는 전세값과 아이들의 학원비로 모두 날아가 버렸다.



결혼 후 처음 장만했던 집은 맞벌이를 하고 있을 때라서 부부공동명의로 하는 것에 대해 남편도 나도 아무런 이견이 없었는데, 20년만에 다시 마련한 집에 내 이름을 올리려고 했을 때는 남편과 약간의 신경전이 오고갔다. 단독명의와 공동명의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남편을 이해하면서도 내가 '밖'에 나가 일할 때와 '안'에서 일할 때, 정확히 말하자면 돈을 벌 때와 못 벌 때의 남편의 마음이 다른 것 같아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시간대에 할 수 있는 일을 주로 찾다보니 보수도 적었고 경력으로 인정받기도 어려운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전의 직장에서 나름 촉망받는 직원이었지만 육아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고나니, 그 경력은 혼자만의 추억거리일 뿐이고 다시 되살리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일거리를 찾았다. 구직 사이트를 뒤지고 이력서를 쓰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그냥 집에서 노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비록 직업이라고 내세울만한 일들도 아니었고 버는 돈도 얼마 안되었지만,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날들을 기다리며 세상과의 연결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몸은 집 안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밖을 향해 있었다.



월급을 받고보니 이제 알겠다. 안식년에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건 여행이 아니라 '일'이었다는 걸. 통장에 찍힌 '급여'라는 두 글자가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을 주는지를. 아이들 신경쓰지 않고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내가 번 돈을 내 마음대로 쓰고 싶다. 이제는 집 밖에서 내 일을 찾고 싶다.



자, 이제 내가 번 돈! 내 마음대로 한번 써볼까?



"뭐 먹고싶어? 오늘 저녁 엄마가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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