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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Jun 19. 2023

따로 또 따로 부부안식년

내가 안식년을 시작하기 6개월 전부터 남편은 안식년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의 직장은 6년마다 1년씩 안식년을 주는데 남편은 올 8월까지가 안식년이다. 남들은 시간이 많아 함께 여행도 갈 수 있으니 좋겠다고 부러워 하지만 우리 부부는 좀 다르다. 같이 여행을 다닐만큼 친하지가 않다.



우리 부부는 성격과 취향이 너무나 다르다. 나는MBTI가 ISTJ로 무척 계획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다. 결혼 전에는 E였던 것이 속까지 I인 사람과 함께 살면서 I로 바뀌었지만, 내 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나를 드러내고 사람들과 어울려야 에너지가 쌓이는 E가 자리하고 있다. 반면, 남편은 계획 세우는 걸 싫어하고 규칙적인 걸 숨막혀 한다. 술을 좋아해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지는 않는다.



연애기간이 짧아서였는지 그때는 남편이 나와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내 얘기도 잘 들어주었고,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해서 나와 잘 맞는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편의 몰랐던 모습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이제까지 내가 알던 사람과 너무 달라 당황스러웠었다.



남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말하는 법이 없는, 그래서 남의 의견을 늘 존중해주고 어떤 말이든 다 받아줄 것 같은 남편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사람좋은 사람'이다. 나 역시도 결혼 전에는 남편을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27년을 함께 살아오며 남편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남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말하지 않는 대신에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남편은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철저히 '너는 너, 나는 나'이다. 그리고 그건 부부관계에도 예외없이 적용되고 있어 '당신은 뭘 해도 좋아. 나만 안건드리면'과 '당신의 감정은 당신이 책임져'를 모토로 삼고 있다.



결혼전까지 'We are the World' 정신으로 살아온 내가 그런 남편과 함께 사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시로 자신만의 동굴을 파고 들어가는 남편과 처음과 끝이 분명해야 하고 원인과 결과가 명쾌해야 하는, 밤을 새워서라도 끝장을 보고야마는 나와의 사이는 27년동안에도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이렇듯 너무나도 다른 우리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불편해하고 버거워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물론 내가 남편과 무언가를 같이 하고자 하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야말로 남편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지금 함께가 아닌 각자의 안식년을 보내고 있다.


© eri_panci, 출처 Unsplash



나는 원래 혼자놀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딱히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좋아하는 게 있는 것도 아니고, 학창시절에도 집과 학교만 왔다갔다 하는 모범생이었으니 집에서 혼자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 말고는 혼자서 놀아본 적도 거의 없다.



결혼을 하고나면 황금연휴나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 누구를 만나서 무얼 해야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옆에 사람은 있지만 뭘 해야하나 고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자신에게 기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늘 가만히 내버려두기를 바라니 나는 어떻게든 혼자 노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혼자서 영화를 보러 다니기 시작했고, 혼자 걷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커서 둘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남편에게 기대하는 마음을 접기 위해 어색함을 무릅쓰고 혼자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시작한 혼자놀기가 이제 점점 익숙하고 편안해져 가고 있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기대도 점차 줄여가고 있다.



남편은 예전부터 입버릇처럼 나이들면 시골에 내려가 살겠다고 말하곤 한다. 물론 혼자서 살겠단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뼈속까지 도시사람이라서 시골에서는 살 수 없을 거라는 이유에서다. 끝까지 혼자의 삶을 꿈꾸는 남편이 그동안은 서운하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안식년을 계획하고,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찾아서 해보고, 내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과 방법을 만들고,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의 동굴안에서 가장 안락함을 느끼는 남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는 너무나 다른 남편! 우리 부부는 지금 각자의 안식년을 따로 보내며 서로에게 기대가 지나쳐 원망만 남는 노년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는 노년이 되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다. 부디 서로에게 좋은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전 10화 남편에게 밥하는 법을 가르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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