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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Jul 14. 2023

다음 생엔 기안 84로 태어나볼까

나이 50을 넘어서면서부터 크게 기쁜 일도 크게 화나는 일도 또 크게 욕심나는 일도 없다. 그저 별 탈 없이 하루하루 이만하면 됐다 싶으면서도 유독 한가지만은 여전히 욕심이 버려지지 않는다. 그건 바로 여행!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이 왜 좋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냥 좋다. 사람도 일도 진짜 좋으면 좋은 이유를 딱 꼬집어서 한마디로 말하기 힘든, 뭐 그런 느낌이랄까? 명품백을 가진 사람보다 강남의 고가 아파트에 사는 사람보다 당장 내일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나는 훨씬 더 부럽다. 특히나 혼자서 여행하는 사람은 부럽다 못해 존경심마저 든다.



'혼자 여행하기'는 나의 첫번째 버킷리스트이자 꼭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다. 그 꿈의 시작은 한비야씨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을 처음 읽었을 때부터 였다. 당시는 첫 아이를 낳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들어앉아 서투른 육아에 하루에도 몇번씩 눈물짖던 때 였다. 오지를 다니며 고생하고 전쟁지역에서 죽을 고비를 맞이했던 이야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지마을 사람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이야기이며 여행지에서 만난 남자와 로맨스를 나눈 이야기들에 가슴 설레였었다.



집 떠나 잠자리가 바뀌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아침 볼 일도 원활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나와는 태생부터가 다른 사람들 이야기인데도 책을 읽는내내 머리속으로는 수십번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고, 세상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해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하루종일 먹이고 재우고 놀아줘야 하는, 생존이 내 손에 달려있는 갓난아기의 엄마로서는 꿈꾸는 것 조차도 사치스런 일이었다. 그렇게 혼자 떠나는 여행을 가슴 속 깊이 꿈으로만 간직한 채 아이들을 키우느라 삼십대와 사십대를 보내고, 이제 홀가분한 오십 중반의 나이가 되어 드디어 펼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나의 주부안식년도 어쩌면 '혼자 여행'을 위해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떠나지 못하고 있다. 왜냐고? 나는 그 답을 기안 84가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보고나서야 알았다.


MBS 예능 프로그램 <태아닌 김에 세계일주>


기안84의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는 <바람의 딸(아들) 걸어서(는 아니자만) 지구 세바퀴반>의 2023년 TV버전이었다. 기안 84는 옷가지 몇 개만 챙긴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남미 아마존강을 여행하고, 인도 겐지즈강을 찾아간다. 그는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잔다.(분명 아무데서나 잘 쌀거다) 아주 쉬운 영어 단어 몇 개와 눈치만으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현지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그는 가리는 게 없다. 그 나라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쉽게 동화된다. 그야말로 여행에 특화되어 있는 사람인 듯 하다.



나는 25년간 그런 여행을 꿈꾸어왔던 것 같다. 20~30대의 건장한 젊은이들이나 할 수 있는 여행을. 54세의 아줌마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여행을. TV를 보는 내내 '아흐, 내가 20년만 젊었어도...'를 되뇌이지만 30대의 나였으면 과연 할 수 있었을까? 골목길에서 담배를 물고 삼삼오오 모여있는 청년들만 봐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내가, 25년이나 다닌 시댁 시골집에서도 불편한 잠자리에 밤새 뒤척이는 내가, 식사시간을 조금만 넘겨도 손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내가, 혼자서는 밖에서 밥 한끼도 제대로 사먹지 못하는 내가, 배속에서 내 집 화장실인지 아닌지를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내가, 가족들과 다녀온 시골 펜션에서 작은 벌레 한마리에도 기겁했던 내가 과연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기안 84로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은 안 될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에는 꼭 기안 84로 태어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가 가기 전 나는 반드시 혼자 여행을 해 볼 것이다. 깨끗한 잠자리를 고르고, 익숙한 음식을 먹고, 해가 지기전에 숙소에 들어가 TV 드라마를 보고 있을지언정 꼭 한번 혼자 여행을 해 볼 것이다. 그것이 나의 꿈이니까. (그런데 여행 한번 가는데 이렇게 비장한 각오가 필요할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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