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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Dec 11. 2023

충전된 에너지는 다시 가족에게로

어느새 올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해 한 해가 점점 더 짧게 느껴지지만, 올해는 유독 더 빨리 지나갔다. 2023년의 나의 테마는 ‘주부안식년’이었다. 막내의 대학합격을 확인하고 드디어 내 할 일이 끝났다는 홀가분함에 안식년을 갖겠노라 선언했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전히 가족에게 맞춰져 있었던 주부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딱 일 년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나만을 위해서 살아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내 인생의 거의 전부였던 아이들에게서 자유로워지고 나면 그다음에는 뭘 해야되나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주위에서 자녀를 대학에 보내고 나서 무기력해지거나 우울감을 느끼며 힘들어하는 주부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나의 다음 인생을 계획하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 될 주부안식년을 가지고 싶었다.

     

처음에는 다소 장난스럽게 식구들에게 안식년을 얘기했는데 남편과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고,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주부안식년에 대한 기사를 쓰고 연재까지 하게 되면서 주위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사실 안식년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진 게 없어서 주위의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차피 내가 시작한 일이니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주부안식년의 가장 큰 목표는 ‘안 해 본 일 하기’였다. 재미있을 것 같은 일들을 찾다 보니 라디오 만들기 수업에서 학창 시절부터 로망이었던 라디오 DJ가 되어보기도 했고, 비록 4주간의 체험 강습이었지만 꼭 배워보고 싶었던 해금도 배워봤고, 25년 전 한비야 작가의 여행기를 읽고 나서부터 내내 꿈꿔왔던 혼자만의 여행도 해봤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부안식년이라는 주제로 오마이뉴스에 꾸준히 기사를 써서 ‘시민기자’라는 과분한 타이틀도 얻었고, 평소 즐겨 보는 에세이 월간지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아 내 글을 싣는 뿌듯한 경험도 했다.     


이렇게 소소하게 재미난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안식년이라고 해서 내 생활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식구들 챙기고, 주부로서의 일은 거의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껏해야 매일 쓸고 닦던 집안 청소를 일주일 정도는 미뤄둘 수 있게 되었고, 매번 직접 담가 먹었던 김치를 가끔은 사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기사까지 쓰며 요란하게 안식년을 부르짖은 덕분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남편에게 저녁 설거지를 떠넘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간의 안식년은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는 행복하면서도 나만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 초조했고, 점점 나를 잃어가는 것 같아 불안했다. 워킹맘들에 대한 열등감만큼이나 전업주부로서도 완벽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는 마음도 컸다. 

    

하지만 안식년을 보내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많이 너그러워졌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최선을 다해서 한 가정을 꾸려왔고 두 아이를 건강한 젊은이로 키워낸 내 자신이 새삼 대견하게 느껴졌다. 또한 그동안에도 내 인생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해왔기 때문에 지금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 걷기 시작한 것이 혼자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동력이 되었고, 집안일에 지치고 힘들 때마다 블로그에 글을 쓰며 마음을 다독였던 것이 지금 이렇게 기사를 쓸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처럼 나는 그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휴일에 하루종일 쇼파에 누워있는 모습이 얄밉게만 보이던 남편이 언제부턴가 측은하게 느껴지고, 어느새 다 커버린 아이들을 보면서 뒤늦게 아쉬운 마음이 들고, 늙어가며 점점 자식들에게 의지하시는 부모님이 애처롭게 느껴져 진심으로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만 생각하며 지내려고 했던 안식년에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커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던가, 아마도 안식년을 가지며 내 안에 에너지가 충분히 채워지고 나니 가족들에게도 더 너그러워지게 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도 나를 위한 시간을 종종 가졌더라면 전업주부로서의 생활이 훨씬 덜 힘들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주부가 행복해야 가족이 행복한 것을 가족만 행복하게 만들려고 너무 애쓰며 살았던 것 같다.

     

이제 막 아이들에게 벗어나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려는 전업주부들에게 안식년을 꼭 가져보라고 말하고 싶다. 가족들 뒤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더불어 안식년을 원하는 주부들에게 가족들은 적극적인 협조와 응원을 보내주기를 바란다. 안식년으로 채워진 주부의 에너지는 결국 가족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되어있으니 말이다. 


잊지못할 나의 2023년이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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