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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Sep 13. 2024

맛있는 것 좀 보내라

오랜만에 뵌 친정 아버지는 어깨가 안으로 많이 말려있었고, 목과 등이 연결되는 부분에 마치 혹이 생긴 것처럼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양쪽 눈꺼풀은 축 처져서 눈이 반쯤 덮혀 있었다. 몇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새 너무 많이 늙으신 것 같았다.


아버지는 듣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시고 있다. 보청기를 끼시면 듣고 싶지 않은 소음까지 들리는게 성가시다며 TV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도록만 맞춰놓고 쓰시니 우리와 대화를 할 때는 별 소용이 없다. 옆에 가까이 앉아 큰소리로 이야기를 해야 들으실 수 있는 아버지와는 길게 대화하는 것이 어려워 몇 마디 안부를 나누고는 금새 자리를 엄마쪽으로 옮겨 앉게 되었다.


엄마와 한참 얘기를 나누다가 아버지를 보니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고 계셨다. 고개는 숙여서 앞으로 쭉 빠져있고 어깨는 잔뜩 웅크린 자세였다. 하루종일 TV만 보시는 부모님께 무료함을 달래드릴 목적으로 깔아드린 게임에 두 분이 모두 너무 깊이 빠져버리셨다. 안부전화를 드릴 때마다 게임을 하고 있으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우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게임을 하실 줄을 몰랐다.


조폐공사의 소사로 시작해서 제지계열 그룹의 이사까지 하고 퇴직을 하신 아버지는 집에서나 밖에서나 그야말로 천하를 호령하시는 분이었다. 항상 자신감이 넘치셨고 자신이 하시는 일에 관해서는 모르는게 없는 전문가였다. 간혹 아버지에게서 듣는 젊은 시절의 이야기는 내노라 하는 CEO의 성공신화를 능가할 정도로 스펙타클하고 감동적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셨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하셨다.


그랬던 아버지에게서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맛있는 것 좀 보내라"이다. 아침마다 엄마에게 안부전화를 드리면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는 '맛있는 걸' 찾으신다. 매 끼니를 준비하시면서 힘들어 하시는 엄마의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가끔 배달앱으로 먹을 걸 주문해 드렸더니 하시는 말씀이다.


음식을 주문해 드리는 건 손가락만 몇번 움직이면 할 수 있는 전혀 귀찮거나 힘든 일이 아니지만, 아버지의 그 말을 듣는게 너무 싫다. 물론 아버지께는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전화를 끊고나서도 한참동안 마음이 좋지 않다. 그 말씀의 반쯤은 아버지 식의 농담이고 딸에 대한 친근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걸 알면서도 목에 가시가 걸리는 것처럼 불편하다.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 강하고 이성적이고 냉정한 이미지의 엄마이다. 큰 아이에게서 "어렸을 때는 엄마가 참 무서웠는데..."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어쩌면 내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마음과 비슷한 마음을 아이들이 나에게서 느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에는 나도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찾는 노인이 되는걸까.


늙어가는 부모님을 보면서 나도 늙는 연습을 하고 있다. 자식에게 하지말아야 할 말을 또 하나 새긴다. "맛있는 것 좀 보내라". 자식에게 그렇게 못 할 말도 아닌데... 우리 애들은 나보다 착한 자식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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