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뜨지 못하기 때문

채우면 비워야 하고, 비워야 살아갑니다.

by Mina

꺽꺽 토해냈다.

토하기 전에는 체한 줄 몰랐다.

배가 아니고 가슴이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띵하기도 하고, 몸이 쑤셔 몸살 같기도 했다.

큰 숨을 쉬어 숨을 고르고 나면 되려 멀쩡한 것 같기도 했고,

그것도 아니면, 게워낼 때의 거북살스러운 고역을 외면하고 싶어서

소화도 못할 것들을 들입다 쳐 넣은 미련스러움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아니,

처음부터 나는 체한 줄 모르기로 작정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우리가 도착하는 날부터 우리가 떠날 날을 걱정하셨다.

크게 애정표현을 하지 않으시고 늘 아빠 멋대로 화를 내거나 변덕을 부리는 아빠였건만,

언제부터인가 전화를 드리면 부쩍 '보고 싶다'거나, '고맙다'라고 하셨다.


한동안 아빠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전화만 하면 다짜고짜 아빠에게 욕을 먹던 시절이었다.

큰 애가 고물고물 귀엽고, 회사일은 반 미쳐 돌아가던 때다.

아이를 봐주시던 친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오며 아이는 근처 종일반에 맡겨졌다.

종일반이 끝나는 시간에 아이를 찾기 위해 방광염에 걸려가면서 소변을 참으며 일을 했다.

'걷는다'는 단어가 내게서 지워진 시간들이었다.

언제나 뛰었다. 노트북을 들쳐 매고 하이힐을 신고, 심지어 애를 업고도 뛰었다.

유치원으로, 직장으로, 회의실로, 집으로...


딱 그 시점에,

아빠에게 욕을 들입다 먹었다.

이유인 즉,

'아이가 정말 보고 싶은데, 전화를 하지 않았다. 데리고 오지 않았다'였다.

그 형식도 아주 화끈했다.

전화를 하거나 받는 순간, 다짜고짜 욕을 들입다 퍼붓고 끊으셨다.

잘해보기 위해서 자주 전화를 드려보았지만, 반응은 같았다.

결국에는 아빠가 언제, 얼마나 자주 아이가 보고 싶은지, 언제 화가 치밀어 오를 예정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포기했다. 욕먹기는 매한가지였으므로.

아빠 기분이 괜찮을 때, 아빠에게 욕먹기 싫다고 정색을 하고 말한 적이 있다.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무슨 욕이냐? 사랑표현이다!"

맞다. 손주가 보고 싶다는 욕구가,

눈알이 뺑글뺑글 돌아가게 바쁘게 사는 딸에게 욕바가지를 퍼부리 만한 서운함이 사랑이라면.




돌이켜보면, 아빠의 사랑표현은 (아빠가 주장하시는) 욕 이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다.

어릴 때 기억은 늘 한 손이 아빠에게 잡혀있었다는 것이다.

아빠가 늦게 귀가해서 혼자 늦은 밥상을 받은 시간에도 나는 내복 바람에 아빠 밥상 옆에 앉아있었다.

때로는 아빠 무릎 위에, 때로는 옆자리에서 한 손을 잡힌 채로 말이다.

우리는 이미 밥을 다 먹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건만,

아빠는 굴비 살을 발라서 무릎에 앉힌 내 입에 넣어주셨다. 통통한 게장 집게다리 살을 발라서도 넣어주셨다.

혼자서 드실 때도 그러셨기에, 함께 밥을 먹는 시간에 내 밥 위에는 끊임없이 반찬이 올라와 있었다.

엄마가 노릇한 갈치를 구운 날은 아빠가 가시를 입으로 다 발라낸 뽀얀 갈치 속살이,

달큼한 포항초 시금치를 고추장에 무쳐주신 날은 밥 위는 시금치로 덮여있었다.


드라이어가 없던 시절, 아침에 후다닥 머리를 감고 학교에 나서면 어김없이 아빠한테 잡혔다.

전직이 이발사였나? 의심될 정도로 아빠는 젖은 머리를 털어주는 기술이 좋으셨다.

아빠가 머리를 숙이라고 하고 수건 양 끝을 길게 잡고 재빠르게 머리털을 털면,

젖은 머리끄트머리로 정신없이 싸다구를 맞게 된다.

정신이 번쩍 들다 못해, 얼굴이 얼얼해진다.

지각이니 이제 그만하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소용없다.

등굣길에 운동이 끝나고 돌아오시는 아빠에게 붙잡히면 언제나 그렇게 젖은 머리 싸다구를 맞아야 했다.


크면서 체하거나 배가 아프면 엄마는 언제나 따뜻한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있으라고 하셨다.

내가 아랫목에서 얼굴이 노랗게 떠서 엎드려 있으면 아빠가 퇴근해서 오시거나,

아침운동을 마치고 오셔서 여지없이 하는 치료행위가 있다.

엎드려 누운 나에게 제쳐 누으라는 명이 떨어지면 올 것이 온 것이다.

발 뒤꿈치로 가장 아픈 부분을 체크하시고 딱 그 부분에 중심을 두고 뺑 그르르 발뒤꿈치 회전을 하신다.

아빠 몸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서인지, 어떤 기술을 쓰셨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산고를 미리 치렀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별이 보인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정말 신기하게 배가 꾸륵꾸륵 소리를 내고 체기가 쑥 내려가곤 했다.


조금 커서는 버스를 타고 언니와 아빠 사무실이 있던 광화문에 가곤 했다.

세종문화회관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부터 콧구멍이 흥분되기 시작한다.

그 길에서 한 골목 뒤로 들어가면 우리가 좋아하는 중국집이 있다. 우리는 거기에서 탕수육과 짜장면을 먹을 것이고 나는 등받이가 높은 아빠 의자에 앉아서 사장님 코스프레를 하며 의자를 빙글빙글 돌릴 것이다.

그리고 광화문 나들이의 하이라이트!!! 교보문고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새로 생긴 교보문고에는 동네 문구점에서는 볼 수 없는 진귀한 문구류가 많았다.

손에 묻지 않는 알록달록한 수입 찰흙을 아빠가 사주신 날을 기억한다.

아빠는 감히 사달라 하지 못하고 만지작거리는 문구류를 모두 사주시고는 짙은 감청색 양복단을 휘날리며 다음 약속 장소로 황급히 떠나시곤 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만나고 헤어지던 활기찬 아빠의 모습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간 것일까....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영하 10도로 날씨가 곤두박질 쳤다.

아빠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따뜻한 코트를 사주시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아빠와 쇼핑을 나섰다. 행선지는 남대문 시장이다.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옷을 사본 적이 없거니와, 가본 적도 별로 없지만, 아빠가 봐 둔 것이 있다고 하셨기에 무작정 아빠를 따라나섰다.


지난번 갔던 막내횟집에서 우선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다.

회덮밥을 시키면 커다란 대접에 서더리탕이 서비스로 나온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온 보람이 밀려오는 순간이다.


아빠가 은행에서 돈을 찾으셨다.

아빠만의 코스가 있다는 듯, 천 원을 내고 가판대에서 한겨레 신문을 사서 호주머니에 꽂으시고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상가로 나를 이끄셨다.

상가 안은 작은 상점이 어깨를 스치듯 이웃해 있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 또한 어깨를 스치지 않고는 통과할 수 없는 구조였다.

구십삼 세의 아빠와 남대문시장에서 코트쇼핑을 했다.

내가 맘에 들던 캐시미어 코트는 이태리제품이라는 이유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라서 이곳이 남대문 지하상가인가, 백화점 명품관인가 나를 어리둥절하게 몰고 갔다.

어리둥절한 것은 아빠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다음에 입어본 코트는 나쁘지도 않았지만, 그리 따뜻하지도 않았다.

솔직히 나는 코트보다는 아빠가 언제 소변이 급해지실까, 피곤해지지 않으셨을까가 더 신경 쓰였다.

그래서 코트를 두 번 입어보고는 "아빠!!! 내가 이태리 가서 사는 게 싸고 빠를 것 같아!!!"로 결론을 지었다.


다음날 곤두박질치기로 한 날씨답게 동장군이 세차게 뺨을 때렸다.

아빠가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주던 때만큼이나 볼이 얼얼해졌다.

내 손은 어릴 적처럼 역시나 아빠에게 잡혀서 이미 아빠 점퍼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다.


아빠서진 한국2026.jpeg




'보고 싶다'는 아빠의 말씀에 응답한 여정이었으므로 최대한 아빠 옆에 머물기로 했다.

그것은 '아빠와 세끼를 먹어야 한다'를 함께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아침을 먹지 않지만, 아침부터 엄마가 차려주신 보글보글 찌개와, 노릇노릇 생선구이와, 아삭한 김치와 온갖 반찬이 가득한 밥상에 앉으면 오십 년 전 그때처럼 내 밥에는 아빠의 젓가락으로 반찬이 올려진다.

아빠가 아직까지 손수 식사를 잘하시는 것만도 감사한데, 아직도 생선을 발라 내 밥 위에 올려놓아 주시는 것은 은총이다.

그래서 나는 먹었다.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아빠와 밥도 먹고, 간식도 먹고, 과일도 먹고,

언제나처럼 욕도 먹고, 남대문 시장에서 회도 먹고, 매운탕도 먹고, 코트를 사주신다고 그 추운 겨울에 내 손을 잡고 시장을 간 아빠의 사랑도 먹었다.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꾸역꾸역 들어온 것들에 결국 체하고 만 내 배 위에 여지없이 아빠의 발 뒤꿈치가 올라왔다.


떠나는 날 아침에 짐을 싸지도 못하고 방에서 나오지 못하자 아빠가 문을 몇 번이나 여셨다.

"할아버지! 엄마 어릴 적에 엄마 배 아프면, 할아버지가 낫게 해 주셨다면서요? 그거 해줘요!!!"

딸이 철딱서니 없이 입을 놀렸다.

나는 그 시술만은 피해 가고 싶었다.

아빠의 발뒤꿈치가 내 배에 올라왔다.

아빠는 꾹꾹 발 뒤로 내 배를 눌렀다.

'아직도 진단 중이신가?'

눈에서 별이 보일 만큼 아픈 순간을 기다린 나에게 별은 오지 않았다.

한동안 아빠는 발 뒤꿈치로 내 배를 꾹꾹 누르셨고, 별이 보일 고통을 기다리던 내 눈에서는 서서히 눈물이 흘렀다.


어릴 적 시간을 보냈던 할머니 집이 너무도 작아 보인다는 딸아이 말처럼,

세월이 누군가를 키우는 동안 누군가를 작게했다.

별이 보이는 고통을 실어왔던 아빠의 기력은 거의 쇠하셨다.


쌓이고 흩어지는 것들...

채우고 비워지는 것들....


아빠는 왜 맨날 욕하냐고 원망했던 시간이, 엄마의 평생을 반복했던 억 겹의 밥상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삼 남매의 소란이, 식탁을 뺑뻉이 돌며 오빠에게 꿔준 삼백 원을 갚으라고 악을 썼던 시간이,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고 감정의 해소이다 분석했던 무모함이 세월의 품에서 눅진하게 내려앉은 집을 떠나며 마당 구석에서 나는 토해야 했다.


토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였나 보다.

그 많은 사랑을 다 지고서는 비행기는 뜨지 못했을 것이다.

체하고도 체한 줄 몰랐 듯,

사랑을 사랑인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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