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니는 아이들을 보면 예뻐서 부들부들 떤다.
외출을 해서 옆에 앉아서 대화를 하다가 조용해서 쳐다보면 십중팔구 어떤 아가에게 정신이 홀려있다.
아니, 아가 정신 홀리기를 하고 있다.
아가의 엄마는 무심히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언니는 아가를 보고 (조용히) 까꿍도 하고, 자기 눈을 맹구처럼 껌뻑거리고 두 주먹을 쥐고 잼잼을 하거나 흔들며 아가에게 눈을 떼지 않는다.
남의 아이니까 잠깐 봐서 예뻐하는 것은 아니다.
언니는 내 아들이 태어났을 때도 그랬다.
타국에 있던 언니는 첫 조카가 태어났다는 말만 듣고도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때 내 조카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장난감, 책, 옷을 보냈고 전화에 대고 오로로 까꿍, 짝짜꿍을 했다.
아들이 만 4살 되었을 때 처음으로 언니가 사는 곳에 가서 둘은 첫 상봉을 했다.
언니는 그때 만삭이었는데, 커다란 헬륨 풍선 두 개를 들고 만삭의 배를 치켜들고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을 만난 언니는 처음으로 조카를 품에 안고 울었다.
아들은 한번 안기고는 잽싸게 어디론가 도망갔는데, 언니는 감격에 겨워 어깨까지 들썩이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배가 불뚝 나온 언니가 고래풍선을 들고 너무 질질 짜니까 사람들이 계속 쳐다보았다.
결국은 내가 창피하니까 이제 그만 좀 울라고 면박을 주었지만 언니는 징징 울며 풍선을 들고 아들의 뒤꽁무니를 쫓아가 숨바꼭질을 하자고 했다.
언니는 내 조카들이 태어났을 때는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들을 돌보았다.
언니의 벌이가 없으면 가족의 생계가 걱정되는 상황이었지만, 언니는 그렇게 했다.
지난번 언니가 사는 곳에서 언니의 가족과 함께 지내며 아름답게 성장한 조카들을 보고 나는 언니가 20년 전 내 아들을 보고 질질 짠 뜨거운 눈물을 안으로 삼켰다.
언니는 지금도 회사를 관두고 무료급식소를 찾아다니며 아이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제일 행복했다고 말한다.
요즘은, 언니가 하던 이해 못 할 주책 같은 짓을 내가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가게에 아기가 오면 가까이 가서 오르르 까꿍을 하고 잼잼을 하고 눈을 꿈뻑이느라 불에 올려놓은 음식을 태운다.
태어난 지 몇 주 안 된 아이, 몇 달 된 아이, 몇 년 된 그 경이로운 창조물들이 내 가게로 들어온다.
난 그 아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숙연해진다.
"까만 눈, 버둥거리는 손, 보드라운 날숨, 나를 보고 있는 걸까? 무엇이 그 아이의 머릿속에 들어왔을까? 음식 냄새를 맡은 걸까? 낯선 곳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나를 엄마와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할까? 물체라고 인식할까? 내가 덩어리처럼 보일까? 눈코입이 다 보일까? 내가 웃는 걸 빤히 보네!!! 아!!!! 아가도 웃는다!!!! 왜 웃을까? 자신이 웃는다는 것을 인지할까? 저 거짓 없는 웃음은 어떤 회로가 명령하는 걸까?"
나는 아이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아이는 내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운 관찰을 허락한다.
"관찰을 해보세요!"
"뭐를요?"
"눈앞에 있는 것 무엇이던 간에요"
"눈앞에 뭐 컵, 볼펜..."
"그럼 컵을 관찰하세요."
아니 뭐... 컵을 딱히.....
코칭을 받으며 언제나 권유받은 행동은 관찰이었다.
관찰은 딱히 중요치 않고, 또 시급하지도 않았으므로 아이젠하워의 시간관리 매트리스의 구탱이로 밀렸다.
하지만 난 아이는 하루 종일 관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딱 뒤통수를 친 생각이 있었다.
내 아이는, 왜 그렇게 관찰하지 못했을까?
관찰을 안 한 건 물론 아니다. 아주 면밀히 관찰을 한다.
그리고, 의심의 눈초리를 불러와서
그다음, 아주 깊숙이 개입한다.
그것이 문제였다.
관찰은 개입하지 않는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숨죽이고 기다린다.
경이롭게 바라보지, 함부로 참견하지 않는다.
나는 길 가다가 아이들에게 홀리는 언니의 모습에서 바로 그 관찰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언니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손짓이 발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맑은 눈빛은 어느 별을 통과한 것인지,
언니는 두 손을 자기 가슴팍에 움켜쥐고 궁금해 죽겠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관찰자 거리를 유지했다면, 어땟을까?
아이가 입에서 처음 낸 음소에 "엄마 했어!" "아니, 맘마! 했어" 하고 귀 기울이고 의미를 찾으려 애를 썼던 그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그 궁금증과 호기심과 경외심으로 ,
아이의 말을 듣고, 행동을 관찰했다면,
개입해서 내 식으로 해석하려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땠을까......
오래 들여다보면 본질이 보인다.
거리를 유지하면 그 영웅적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렇게 관찰하면 아이들은 모두 경이롭고 숭고하다.
간섭하느라 관찰하지 못했다.
관찰하느라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