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성장에 대한 소회
읽고 배워도 책 덮으면 잊는다.
깨닫고 무릎을 탁 쳤어도, 현실에서 사는 모습은 똑같다.
감정의 패턴도 늘 가던 길로 간다.
기분이 나빠지면 이면이고, 양극이고, 중용이고 나발이고 화살은 쉬이 남에게로 날아간다.
하루 쉬면 폭삭 잊는다. 하루 멀어지는 게 아니고 십리밖으로 나간다.
쉬지 말고 쏟아부어야 한다. 소낙비 때려 부을 때, 그 밑에 딱 서있어야 한다.
무엇을 배우고 싶었을까? 무엇이 나를 목마르게 했을까? 원하는 게 뭘까?
배부르고 등따셔도 졸졸 쫓아다니는 물음표가 있었다.
'이게 다는 아닌데....'
그래서 책에서 그 물음표의 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후련한 답은 없고 물음표만 더했다.
좋은 말 대잔치, 다 아는 소리, 내가 성인군자냐? 맨날 덕만 찾고 선만 쫓느라냐?
잘 살려면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했고, 게으름을 거스르려면 용을 써야 했다.
그런데, 또 애쓰지 말란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어쩌라는 건지 헷갈리기만 하니, 게으름의 아랫목으로 이불 쓰고 기어 들어가고 싶어진다.
따뜻하게 몸을 녹이면 노근노근 잠이 쏟아지겠지.
그렇게 조금 편하게, 조금 몽롱하게 눈감고, 귀 막고 한숨 푹 자고 나면 내 인생도 뉘엿뉘엿 갈 때가 오겠지.
그때가 되면 나는 생각할까?
"아.... 한숨 푹 잘 잤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이 세상에 와서 뭘 했다고, 벌써 가라는 거지요?
그냥 먹고, 자고, 좀 편하게 살려고 바삐 일했고, 그런 내 몸 위하려고 한숨 좀 푹 잤는데,
벌써 끝이라고요? 이제 그만 인생의 무대에서 꺼지라고요?
잠시만요!!! 저는 아직 안 해본 것이 너무 많은데요? 모르는 세상이 너무 많은데요?
아는 것이라고는 밥 해 먹고, 치우고, 돈 좀 벌고, 좋은 척, 싫은 척하면서 적당히 버무려서 사는 것인데....
잠깐요.... 근데, 저는 누구라고요? 저는 왜 태어났다고요??? "
죽기 전에 이렇게 당황한 목소리로 세상에 대고 읍소하기 싫었다.
그래서, 이미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이런 고민을 한 사람들의 생각을 따라가 보려 했다.
그런데, 내 안의 게으름의 소리는 속닥속닥 속삭이고, 주변에서는 왕왕 말을 보탠다.
"책은 읽어 뭐 해, 다 그 말이 그 말인데. 네가 박사가 될 거야, 뭐 교수가 될 거야.
여태껏 애쓰고 살았는데, 이제 좀 쉬엄쉬엄 살지 뭐 하겠다고 그렇게 용을 써?"
책 읽기는 불편하다. 잘 이해되지 않을 때도 그렇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도 그렇고, 이놈 말과 저놈 말이 다르게 해석되면 갈팡질팡하게 된다. 이분법적인 나누기에 익숙한 머릿속은 언제나 재게 묻는다.
"그래서 뭐? 좋다고 나쁘다고? 하라고? 말라고? 어쩌라고??"
이제 책을 안 읽어도 불편하다. 조금 편하게 쉬려고 따뜻한 난로 앞에 몸을 기대고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만 핸드폰에 대고 까딱까딱 움직여도 한 시간은 훅 지나간다. 마음이 개운치 않다.
게으름과 핑계와 변명은 어김없이 찾아와 내 독에 밑장을 깐다.
그리하여 밑 빠진 독이 된다.
"새벽독서 시간 지키다가 폭삭 늙고 병들겠어요.
저 혼자 읽고 공부해 볼게요."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선생님은 이미 내가 게으름으로 밑장 깔고 가겠다는 뜻을 간파하시고 말씀하셨다.
"밑 빠진 독에도 물 담을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밑 빠진 독을 테이프로 부쳐 써야 되나요?"
"아뇨, 밑 빠진 독에 물을 붓지 말고, 물 안에 밑 빠진 독을 넣으면 돼요."
그때 이미 선생님은 "밑 빠진 독"을 알아보셨다니 정말 대단하다.
그렇게 나는 이 개미지옥(새벽독서)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한 해가 갔다.
지나고 보니 읽고, 깨지고, 읽고 깨우치고, 잔소리 듣고, 꾸역꾸역 일어나서 책 읽는 그곳이
이 밑 빠진 독에 물 담을 수 있는 맑은 물 속이었다.
갑자기 책이 이해되고, 해석되고, 그 해석이 썩 훌륭해 보이고, 다른 책과 연결이 되어
책상 위에 네댓 권의 책이 수북이 쌓여서 연결점에 미친 방점을 찍을 때가 있다.
그 순간은 짜릿하지만, 짧다.
그리고 모닥불 앞에서 책을 무르팍 위에 놓고 "내야 할 돈을 잊었네, 아. 배고프다.. 살 것이 있었네" 하고 딴생각을 하다가 따뜻한 노곤함을 반기며 꼬박꼬박 잠이 들 때도 있다.
그 순간은 나른하고 허망하지만, 길다.
하루 멈추는 것은 너무 쉽다.
바쁜 일은 언제나 넘치고 쏟아지니까. 게으름은 언제든 쳐들어오려고 준비 중이니까.
그러니까 깨치고 나가려면, 성장하고 싶다면, 나아가는 느낌이 나를 살리는 느낌이라면,
나를 믿지 말자. 그냥 닥치고 오늘도 내일도 물속에 나를 처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