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예측한 죄

할슈타트에서의 소회

by Mina

잘츠부르크.

몰타에 살면서 이곳에 왔었다.

산이 그리웠고, 숲의 초록 내음이 그리웠었다.


잘츠부르크에 들어서자 사방이 알프스였다.

그 산세의 숭고함과 웅장함에 짐짓 놀란 폐가 큰 숨으로 요란하게 산소를 계속 날라야 했다.

머물렀던 동안 거의 매일 산에 올랐다. 푸른 들판에 그저 누웠다. 음메 소가 지나가면 자는 척을 했다.


부활절 방학이 되어서 서진이와 잘츠부르크 주변을 다시 찾기로 했다.

짐을 싸는 날, 날씨를 확인하는데, 아주 낯선 날씨 기호가 있었다.

"서진아!!! 이게 뭐라는 소리야?"

"어? 엄마!!! 이거 눈? 진눈깨비? 뭐 비랑 눈이랑 섞여서 온다는 것 같기도 하고?"

긴 겨울을 지나 다시 겨울로 들어갔다.

절기는 4월인데, 그곳 기온은 영하 3도, 일주일 내내 눈, 진눈깨비 혹은 비......




하루 종일 집에 있을 수 없다며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장갑에 목도리를 두르고 밖에 나갔다.

함박눈이 펑펑 오더니, 이내 우박으로 변했고, 질고도 굵은 진눈깨비로 변해 어깨를 툭툭 치는데, 어찌나 묵직한지, 어깨에 떨어지는 진눈깨비 소리에 귓전이 시끄러웠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간신히 하늘에서 무엇인가 내리지 않는 날을 맞이했다.

여전히 먹구름이 잔뜩 껴서 보이는 것이 없으니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하늘에서 뭔가가 내리지 않는다니 그게 어디냐며 벼르던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서진아, 너는 정말 아름다운 알프스를 보려고 벼르고 별러서 왔는데, 앞에 아무것도 뵈는 게 없어. 그러면 산을 오르겠니? 안 오르겠니?"

"어. 안 오른다에 한표."

"근데 우린 왜 오르는 거냐? 깔깔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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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등산로 입구까지 가는데,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산의 위용을 그려보며 부분으로 전체를 상상해야 했다.


"우리 이번 여행의 테마는 안 보이는 것을 보기로 하자!!!"

서진이는 하나도 관심 없다는 듯 뵈는 것도 별로 없는 창밖만 내다보았다.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있는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을 거의 지나 언덕을 오르니 본격적인 오르막과 숲길이 시작되었다.

마을을 지나 출입구까지 오는데도 꽤 걸었지만, 그때부터는 아주 가파른 비탈이 시작되었다.


나는 등산을 할 때 언제나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쉽다고 빨리 걷고, 어렵다고 쉬려고 하지 않고, 가능한 같은 페이스로 계속 걸음을 걸어 나간다. 속도와 호흡과 보폭을 거의 균일하게 유지한다.

같은 페이스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말도 삼가게 된다.

그저 조금 전에 떼었던 한 발을 앞으로 내딛는 것에만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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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어 올라왔을까? 작은 오두막 같은 것이 보였다.

대피소인가? 하고 지나치려고 하다가 호기심이 생겨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지역에서 내려오는 신화가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그림만 보면서 맘대로 내용을 상상하고 있는데, 서진이가 소리쳤다.

"엄마! 저기 좀 봐!!!!"

구름 틈을 잠시 헤집고 나온 태양이 비춘 곳에 장엄한 산세가 보였다.

하얀 설산도, 호수도, 그 희끄무리한 구름조차 선명하게 비추었다.

감질나게 맛본 그 황홀한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어느덧, 태양은 구름 사이로 가끔 얼굴을 보여주었다.

마치 무대 위에 조명이 비추듯이 태양은 보여주고 싶은 산의 일부분에 스폿라이트를 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맛이 너무도 신비로워서 되려 구름이 가리면 다음엔 무엇을 보여줄지 두근거렸다.

구름이 온통 덮이면 마음으로 보고, 한 구석을 비추면 걸음을 멈추고 넋 놓고 시선을 주었다.


그렇게 보고, 말고를 반복하며 묵묵히 걸음을 이어갔다.

그저 뒷발을 떼서 앞으로 내딛기만을 반복했을 뿐인데, 어느덧 산 정상이다.

정상에서 드디어 태양이 비추고 산 전체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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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며 마음으로 또렷하게 본 것이 있었다.

나의 한걸음 한걸음이 바로 내가 사는 '하루'라는 것이다.

하루하루 그저 묵묵히 할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만들어낸 결과를 오늘 내가 디딘 걸음이 전부 보여주었다.


등산을 하면서 무엇을 볼 수 있는지는 나의 영역이 아니다.

나의 영역은 가야 할 목적지를 알고,

넘어야 할 산이 있고, 길이 있다는 것을 믿고,

뒷발을 떼어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을 나아가는 것뿐이다.

그 여정에 비바람이 치건, 찬란한 태양이 온 세상을 보여주건, 찔끔거리며 부분만 보여주건, 아예 뵈는 게 없게 만들 건, 그것은 내가 정할 일이 아니다.

무엇을 볼 수 있을지를 감히 예측하여할지 말 지를 결정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건방이다.

신의 영역에 대한 월권이다.


오늘도 일기예보에는 비소식이 있고, 하루 종일 구름이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해서 등반이 가능한지 웹캠으로 구름을 살폈을 때도, 찬란한 태양을 보장받은 적은 없다.

하늘은 왜 언제나 파래야만 하는가?

여행 가서 날씨는 왜 좋아야만 하는가?

사물을 모두 비춰주는 태양 아래에서도 볼 수 있는 눈이 없고,

먹구름과 안갯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감히 내가 예측을 하고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은 시건방을 넘어 죄이다.

발걸음을 떼었으니 무어라도 보았다. 무어라도 느꼈다. 그리고 정상을 넘었다.


이제 나는 감히 예측하며 '하네, 안 하네, 못하네'를 판단하는 죄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

앗, 비장하여라. 오래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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