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편지
라바는 정교한하고 화려한 문양이 가장자리를 뺑두른 커다란 은쟁반을 갖고 부엌에서 나왔다. 은쟁반의 바닥은 반짝거려서 마치 거울과 같이 올려놓은 찻잔과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전자를 반사시켰다.
사람은 둘인데, 라바는 네개의 찻잔을 은쟁반위에 올려놓았다. 본치이나와 같은 세라믹 찻잔이 아니고, 엄마가 안쓰고 한개씩 모아서 장식장에만 넣어두었던 크리스탈 같은 유리잔이었는데, 크리스탈처럼 선명하게 반짝거리지는 않는 것으로 봐서 유리에 굉장히 섬세한 조각을 새겨 넣은 유리 잔 같았다.
라바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전자를 높이 치켜올려 기다란 주전자 주둥이로 하여금 가늘고 섬세한 물줄기를 찻잔안에 정확히 떨어지도록 하였다. 그렇게 반쯤 받은 유리찻잔의 차를 다시 주전자 안에 붓고서는 다른 찻잔에 다시 아까와 같이 주전자를 높이 쳐들고 차를 따라 내 앞에 내어주었다.
그것의 일본의 다도 뺨치게 경건하고 의식에 따르는 것으로 보여 나도 모르게 두손을 공손히 붙잡고 그 모습을 바라보게되었다.
쌉쌀한 녹차에 향긋하고 강렬한 민트 향이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라바가 태어난 모로코에서는 이런 민트 향이 나는 걸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은 한국에서는 늘 마늘 냄새가 난다고 한 것 처럼....
라바의 집은 단촐했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 처음 마주하는 작은 공간은 방으로 쓰기엔 너무 작기에 라바는 그곳에 냉장고와 오븐과 같은 부엌집기의 일부를 갖다놓았다. 한 구석에 커다란 유리 잔에 잔뜩 꽂아 놓은 민트도 보였다. 그 옆은 라바의 방이다. 건물의 가운데에 환기를 위해 뚫어 놓은 환기창만 있기에 어두웠지만 라바의 침대는 보통침대 보다 높고 화려한 은색침대커버가 덮어져 있어 궁색해보이지 않았다. 그 옆은 작은 화장실이었고, 제대로 된 창이 있는 마지막 방은 라바의 아들 네지가 쓰고 있는 큼지막한 방이었다.
라바의 소파는 모로칸 장식의 천이 화려하게 덮여있는 기역자형 소파였다. 동그란 원탁이 그 기억자 소파 앞에 놓여있었다. 밥은 먹고 나자 차를 마시기 전에 라바는 하얀 탁자 커버를 접어 거두어 내고, 보드랍고 미끌거리는 생선비늘 색깔의 은색 커버를 탁자위에 둘렀다.
우리는 그렇게 찻물을 잘 섞어내기 위한 두개의 찻잔, 그리고 차를 마시기 위한 2개의 찻잔, 그렇게 총 네개의 찻잔과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전자와 은쟁반을 앞에 두고 각자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11월 가게의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하고난 이후 누군가와 그렇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별다른 목적 없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처음인 것 같았다. 가끔 아는 사람들과 서진이 친구 엄마들이 가게에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려고 하면 마음이 불안해져서 계속 시계를 쳐다보며, 정말 미안한데, 지금 할 일이 있다 하면서 늘 쫓아보내야만 했으니, 차 한잔 마시자는 초청에도 응대 할 수 없이 동동 거리며 산 나날이 벌써 4개월이 넘은 셈이다. 라바가 자기네 집에와서 간식을 먹자고 하더니, 밥을 하겠으니, 점심을 먹지 말고 오라고 말을 바꿨다. 물론 그날도 일이 늦게끝나서 제 시간에 갈 수 없게되자 라바는 가게로 후딱 뛰어와서 설겆이를 다 해주고는 다른 준비를 하는 나를 채근하며 그것만 끝내고 와야한다고 두번 세번 다짐을 받고서야 다시 집으로 사라졌다.
라바의 집은 우리 가게 바로 옆이다.
전화를 하면 라바는 1분도 되지 않아서, ''민아! 지금 갈께 걱정마!'' 하고 홍길동 처럼 나타난다.
라바가 나타나면 나는 그제서야 한숨을 길게쉰다. 라바는 일단 뒷주방에 가서 산더미 같은 설겆이를 순삭 헤치우고 얼굴을 빼꼼 내밀고 ''뭘 도와줄까?" 하고 묻는다. ''계란 후라이 해줘, 야끼소바 볶아줘. 당근 잘라주고, 고기 타지 않나 지켜봐줘, 밥도 좀 퍼주고, 프라이팬 다섯개 다 닦아야돼...''나는 빠르게 징징거린다. 라바는 빠르고 조용하게 일을 해치우고 다시 뒷주방으로 가서 뒷정리를 사부작사부작 하기 시작한다.
''라바, 고마워....''잠시 틈이 나면 라바의 등에 얼굴을 살짝 묻고 말한다.
민트향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앞에두고 라바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의 삶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찻잔의 김처럼 솓아오르다 사그라든다. 조용히 사라지고 또 조용히 이어진다. 차를 한번 꼴깍 삼킨다. 녹차의 쌉싸름함이 목구멍에 넘어가며 민트향이 다시 콧속을 찌른다. 라바가 녹차를 끓이면서 생 민트 두다발은 구겨서 찻주전자에 넣었기 때문이다. 라바의 삶은 지금 녹차 뒷맛보다 더 씁쓸하다. 그 맛이 다시 민트향처럼 향긋하고 상쾌해질 수 있을까? 찻잔을 내려놓으며 생각한다.
술잔을 부딪쳐 본지가 언제인가 싶다.
마셔라, 부어라, 비워라!!!
내 인생에서가장 많은 술잔을 부딪친 날 들은 빡쎄게 일을 하던 나날이었다.
빡쎈 일 뒤에는 늘 빡쎈 술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너무도 경제적인 술생활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한 모금 들어가면 바로 취기가 올라온다) 술자리가 제일 힘들었다. 신입회계사로 일을 할 때는, 술을 넙죽넙죽 잘 받아 마시는 일이 (비공식적으로 하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사고과 평가 항목 중 하나였다.
특히, 감사가 끝나는 날에는 의례 클라이언트와의 술자리가 이어졌고, 그것은 또 새로운 일거리 창출로 이어졌기에, 그 당시에 신입사원으로서, "저는 오늘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볼께요" 내지는, "저는 술을 잘 못마셔서 그만 마시겠습니다." 라는 대답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나는 늘 술잔을 돌리기 전에 냉면사발을 준비해서 상 밑에 가져놓았다.
''아이고! 박회계사 수고 많았어!" 소주를 찰랑찰랑 따라준다. 고맙게도.
"아이고, 팀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 술 한 잔 받으세요!!
나는 그 냉면 사발에 소주잔을 입에 대는 척하고 잽싸게 갖다 붓기를 반복해서 서 너개 넘는 냉면사발을 모은 기억이 난다.
상밑으로 누군가 발을 뻗어 쏟아질까봐 조마조마 하면서.....
다행히도 나는 술에 취하지 않고도, 술취한 사람 이상으로 농을 건네고 받고, 살짝 맛 간 짓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던 터라, 누구에게도 냉면 사발을 들킨 적은 없었다.
술잔을 수없이 부딪치고 비워라 마셔라, 술잔을 비웠나 확인해라 하며 왁작지껄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고 소리치던 나날들... 그 사람들... 그 기억들...
따뜻한 찻잔을 손에 꼭 쥐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서진이는 숙제가 많다고 밥숟가락 내려놓기 무섭게 쌩하니 방으로 들어가더니 30분이 넘게 전화통을 붙잡고 깔깔 꺅꺅 하고 있다. 술잔을 앞에 놓지 않고도, 궂이 차한잔 해, 하고 말꺼내지 않아도, 쏟아내고 털어낼 수 있는 그런 친구가 있나보다. 그런 시절인가 보다.
나는 술잔 앞에서는 좀처럼 나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나를 포장해왔던 것 같다. 업무의 연장으로 술을 배웠기에, 일단은 술이 쎈척을 해야되었고, 클라이언트 앞에서 헛소리를 할 수 없으니 술잔 앞에서 포장하는 체질이 된 듯 싶다. 아직까지 술을 배웠다고 할 수는 없으나, 나는 술먹고 취중진담을 하거나 술먹고 오버하는 스타인은 되지 못한다.
되려 나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향긋한 찻잔 앞에서는 한없이 말이하고 싶어진다. 한없이 늘어지고 싶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곳이면 더 좋겠다.
못알아 듣는 넘의 나라 말이 아니고, 내나라 말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더 좋겠다.
아니, 아무 말도 안 통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말 하지말고 멍하니 있어도 좋겠다.
그래도 누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네. 찻잔을 함께 나눌, 술잔을 함께 나눌 그 누군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