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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 Jul 05. 2022

#1 샤워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편지

-라 가리가

2022년 새해 첫날, 12시 카운트다운까지 미뤘던 샤워를 시작한다.

옷을 벗고, 물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서늘함이 달갑지 않아 벽난로 장작 앞에서 온갖 이유를 갖다 대고 미루고 미룬 샤워가 한 해를 넘기고 말았네.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물줄기 아래 선다. ''아.....''하고 짧은 탄성이 나온다.

따끈한 물에 차가워진 벗은 몸이 닿고 그 온도의 편안함을 느낄 때의 짧은 신음...


-홍지동

단독주택에 살았던 나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샤워를 하는 것은 미국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여기면서 컸다.

언니와 나는 엄마와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에 있는 목욕탕에 갔다. 우리는 늘 들어가면서 소품들을 먼저 챙겼다. 큰 바가지, 작은 바가지와 앉을 의자.  

특히 우리는 새해를 하루 이틀 앞둔 날 묵은 때를 벗기러 꼭 목욕탕에 갔었는데, 그때는 묵은 때를 벗기고자 하는 의욕이 동네 사람들 모두 한마음인 지라,  바가지를 챙길 때부터 시작되는 분주한 경쟁이 엉덩이를 붙이고 편안히 앉을 때까지 지속된다. 개인 수도가 있는 한적한 자리가 언감생심이기에 우리는 대충 출입문 앞이나 대중 욕탕 앞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이밀고 가져온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앉았다가 개인 수도꼭지 앞자리가 비면 잽싸게 한 사람이 그 앞으로 가고, 그 옆자리가 비면 다시 가족들을 불러 모으는 순서로 터 잡기를 하곤 했다. 터를 잡으면 우린 집기들을 모든 바가지에 나눠 담고 수도꼭지 주변으로 그 개인 집기가 있는 바가지들로 영역 표시를 확실히 하고 나서야, 따끈한 욕탕에 들어가곤 했다. 

더운물 열기에 금세 얼굴이 벌게지고 숨이 차서 내가 밖으로 서둘러 나가려고 하면, 엄마는 늘 나를 안아 주시면서 '열만 더 세고 나가자'라고 하셨다. 어렵게 맡은 자리에서 확실하게 때밀이를 하고 나가려면 몸이 푹 불어야 했기 때문이었겠지만, 엄마는 정말 너무 얄밉게 열을 천천히 샜고, 중간중간 노래를 불렀고, 온갖 시간 끌기 작전으로 나를 못 나가게 붙드셨다. 나는 그래도 보드랍고 몽글몽글한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가 열을 셀 때까지 기다리는 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서대문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할 때 든 생각이 있는데, 세상에 있는 온갖 고문 중에 새로 추가해도 될 법한 고문은 '샤워 못하게 하기'가 아닐까였다. 

엄마와 시어머니는 아이를 낳고 3.7일 (21일)을 꼼짝없이 샤워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무식하게 그 말을 지켰다. 몸조리를 한다고 잔뜩 껴입은 내복과 이불과 난방에 몸은 늘 찐득찐득 땀이 배어있었고, 수시로 젖을 꺼내 아이에게 물리느라  땀 냄새 기본에 젖비린내 추가였다. 샤워를 하지 못하고 이 주일 정도를 버틴 후 나는 살짝 샤워를 시도한 적이 있는데, 이건 샤워를 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였는지, 엄마 말을 듣지 않은 벌이었는지, 나는 머리 감기를 시도하다 어지럼증에 기절을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우직하게 샤워를 않고 끈적한 땀과 젖비린내를 풍기는 시간 동안,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며 나에게 스친 생각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했다.

남편이 퇴근해서 잘 있었어? 하고 빼꼼 방문을 열고 인사만 하고 내 곁에 오지 않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의 후각은 살아있으니까. 그런데,  이런 땀내 전 나에게 시나브로 와서  고개를 파묻고 젖을 빨아먹는 이 어린것은 비위가 상당히 좋은 것이냐,  생쪽 의욕이 강한 것이냐. 


-몰타

몰타의 여름은 40도가 너끈히 넘는 날이 많다. 그날은 버스의 에어컨이 고장 나서 퇴근하는 길의 불쾌지수는 가히 최고치를 넘보고 있었다.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기에. 에어컨이 있는 버스를 타는 시간이 열기를 식히는 위로의 시간이었는데, 에어컨이 고장 난 버스를 한 시간 넘게 타고 나무 그늘 하나 없는 땡볕 길을 걸어 집에 돌아오던 그날 내 머릿속에서는, '집에 가면 차가운 물로 샤워할 수 있어. 찬물 바가지, 찬물 바가지..'생각뿐이었다.

집에 와서 야심 차게 찬물 샤워꼭지를 틀었는데, 왜, 왜 이렇게 뜨거운 거냐. 정말 '앗 뜨거워!' 하고 화들짝 놀랄 만한 온도. 분명 가득 찬물 쪽으로 수도꼭지가 향해있는데, 계속되는 이 뜨거운 물... 이건 인생에서 처음 겪는 황당함이다. 

물을 잠그고 아래층 욕실로 가본다. 뜨겁다. 부엌 수도꼭지를 틀어본다. 끓는다. 할 수 없이 다시 이층으로 올라와 다시 욕실의 찬물 샤워꼭지를 튼다. 앗. 뜨. 거.

베란다로 나간다. 베란다 수돗물은 그나마 앗 뜨거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거기서 샤워를 한다. 베란다 pvc 호스에서 나오는 뜨뜻한 물에 하루 종이 달궈진 몸을 더 달구며 나는 생각한다. 이 뜨거운 나라. 빌어먹게 뜨거운 나라. 맘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는 이놈의 펄펄 끓는 나라. 떠날 거야. 쌍.


-라 가리가

나는 입으로는 환경을 생각해 뭐든지 아끼고 안 써야 한다고  떠들면서도 샤워할 때는 늘 물 낭비를 하고야 만다. 오래 질질 끌다 들어와 하는 샤워라서 그런지, 몸이 냉하기에 따끈한 물이 착 감기는 맛이 황홀해 그런지, 늘 샤워꼭지를 끄는 일이 어렵다. 멍을 때리고 샤워꼭지 밑에 서 있는 게 좋다. 등짝이 벌게질 때까지 따끈한 물이 쉼 없이 내 등에 쏟아지는 게 좋다.  혼자인 순간.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는 순간.....에 번쩍 드는 생각이 있었다.

아! 오늘이 1월 1일이잖아. 나의 옛 이웃 은아와 새해부터 서로 같은 주제로 한 달에 두 번씩 글쓰기를 결심했잖아. 그런데 은아가 덜컥 그날을 딱 떨어진다나 뭐라나 하며 1일과 15일로 못 박아버렸잖아. 더군다나 미리 생각한 주제가 있다길래 말해보라고 하니까 뭐 ''샤워''라나? 누가 샤워에 대해 할 말이 많겠어? 황당하게 첫 주제가 샤워라니? 내가 정해버릴걸. 

물줄기가 계속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샤워꼭지 아래에서 ''샤워에 대해 오늘 당장 글을 써야 한다고?''하고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서진이가 부른다. ''엄마! 줌콜 준비됐어!!!''

엄마 아빠께 새해 인사를 드리자고 하품을 쩍쩍하며 참아온 시간. 

수도꼭지를 과감히 잠그고 서둘러 나간다. 

따뜻한 물에서 나를 꼭 안아 내 몸을 불려 때를 벗겨 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바나나 우유를 사줘서 기쁘게 만들어 주며 나를 키워 주신 엄마가 줌콜에서 웃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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