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편지
<프롤로그>
십일월에 대해 쓰자고 내던지고 두달을 까뭉개고 마지막 양심을 붙잡는 심정으로 올해의 마지막 날이 다 가기 전에 간신히 글쓰기를 시작하는 게으름을 혹독히 반성하면서, 글쓰기를 계속 독려해준, 그러나 질 나쁜 글쓰기 반려자를 만난 나의 글쓰기 선생님 은아씨에게 진심어린 사과의 말을 올리며.....
<본문>
십일월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짜고짜 그냥 싫다.
겨울로 가는 스산한 기분, 쉬는 날은 한개도 없는 빽빽한 달력, 한 살을 더 먹는구나 하는 나약해지고 연로해지는 마음, 무턱대로 쳐들어 오는 허망함과 후회와 질책....
대부분 나의 십일월은 이런 감정들의 합산이다.
하지만 십일월은 일년에 한 번 어김없이 들이 닥친다.
올해의 십일월은 더욱 스산했다. 언제나 허덕이는 나를 볼 때마다 열 일을 제치고 나를 도와주는 요한도 내 생일이 지난 시월의 마지막 날 한달 반 동안의 긴 출장을 떠났다.
나 혼자 헤치고 나가야 하는 가게 일들과, 어김없이 들이닥친 감정의 뭉탱이들을 감당하기가 힘들어 일단 몸뚱이를 더 바쁘게 해서 감정의 뭉탱이들이라도 나를 괴롭히지 않도록 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코로나가 시작되고, 또한 일이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안 가게 된 헬스장을 다시 등록하였다.
그리고 평소에 재미나게 보던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와 같은 사업을 하고 싶다고 머리 속에 굴리고 있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공간 크리에이터 교육과정을 등록했다.
한국시간 오전 10시에 시작하는 교육이라 새벽 4시에 일어나야했다. 살짝 고민이 스쳤으나 언제나 머리보다 빨리 움직이는 나의 손가락은 일단 수업료를 이체해 버렸다. 등록을 하고 수강 이틀 전에 다시 시간을 짚어 보니, 그 사이에 서머타임이 없어져서 새벽 3시에 수업을 들어야하는 상황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서진이 도시락을 싸고 아침을 먹이고, 바로 운동을 가야했다. 운동이 끝나면 바로 가게에 와서 영업을 준비해야 하는 말그대로 빡 쎈 스케줄...
그렇게 십일월을 시작했다.
강의가 지루하고 졸음이 쏟아지는 날엔 살짝 카메라를 꺼 놓고 이불 속에서 몰래 듣는 둥 마는 둥 한 시간도 있었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수업을 마쳤다. 매주마다 쏟아지는 과제도 꾸역꾸역 해나갔다.
운동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점점 강도를 높였다. 트레이너도 놀랄만큼 빠른 시간에 근육들이 붙기 시작했다.
새벽에 수업을 들은 날 쉬는 시간 없이 바로 저녁 준비를 해야할 때는 쇼파에서 쪽잠을 자는 나를 마르티가 깨우지 못하고 손님들이 들이 닥치는데 안절부절 한 적도 많았다. 눈을 반 쯤 감고 요리를 했다.
눈을 감고 요리를 하던 어느날 한 가족이 들어왔다. 내 나이 또래의 엄마와 아빠,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듯한 청년.. 눈을 반 쯤 감고 요리를 하는 나에게 그 아들이 다가왔다. 저널리즘과 영화를 공부한다는 젊은 아이는 스무대 여섯살 쯤 되었을까? 다짜고짜 내가 요리하는데 미나리를 쓰냐고 물었다. 아이고, 세상 쌩뚱맞고 귀찮은 질문이라니.... 아니, 미나리 같은건 쓰고 싶어도 어디서 구해야하는지 몰라서 안쓰는데.....본인이 사랑하는 영화 미나리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나를 인터뷰를 하고싶다고 한다. 아이고, 인터뷰를 할 사람이 따로 있지, 식당 아줌마에 대해 뭐가 알고 싶을까? 나는 마음 속으로 눈알을 굴렸다.
이 작은 마을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신기하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던 지라, 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사진작가친구도 있었던 지라, 그 신기한 마음은 이해하겠는데, 나는 그저 졸렵기만 한 식당 아줌마.... 평소같이 단칼에 거절을 하고 싶었지만, 공부를 하는 청년이 공부를 위해 몇가지 좀 물어보겠다는데, 바쁜척 하기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그래, 해라. 하고 대답해버렸다. 그리고는 속으로는 잠깐 호기심에 물어봤겠지, 금새 잊을꺼야 하고 믿었다.
그 청년은 나를 인터뷰하고 아름다운 미나리 잎파리를 표지에 인쇄하고 영어로 친절하게 번역을 하고, 종이에 향수까지 뿌리고 (미나리 향은 아닌 듯), 예쁜 리본으로 묶은 인터뷰 리포트를 예쁜 투명 폴더에 담아 나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지금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도와주고 있다.
그의 글에서 나는 향기롭다. (감미로운 향이라기 보다는 음식향과 사람의 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글에서 나는 미나리로 태어난다.(나는 그를 미나리 중독증으로 의사의 치료가 필요하다고 놀리고 있다.)
그의 글에서 나는 질기고도 연하다. (그 부분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 좋은 부분은 바로 받아들임)
새삼 남의 시선에 비친 나의 모습을 생각해 봤다.
천성이 남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아서인지 굉장히 생소한 관점의 이동이었다.
십일월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언제든지 다시 무장할 수 있다.
스산한 십일월을 의미있는 십일월로 탈바꿈 시킨 것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울다가 씩 웃어버릴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미나리처럼 시궁창에서도 살아남아서 그 독특한 향과 여린 잎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마치며>
일년 동안 글쓰기 동무를 해 준, 그리고 끊임없이 게으름을 부린 나와 비교되게도 그 사이 너무도 부지런히 두권이나 책을 출간한 은아씨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은아씨가 아니었다면, 내가 한 줄이나 궁뎅이를 붙이고 앉아 글쓰기를 할 수 있었을까?
이 게으르고도 미천한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눌러 주신 마음이 천사같이 따뜻하신 몇 안되는 독자 여러분께도 진심의 마음을 담아 고마움을 전합니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마치며, 민아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