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의 근본 원인

현대인의 고질병

by 줄란

세계 보건기구(WHO)는 미래에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게 될 질병으로 암이나 전염병이 아닌 정신 질환이라고 진단했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영역이기에 뚜렷한 진단을 내리기 어렵지만 사실 마음의 고통은 신체의 고통을 초월한다. 베다 문학에서는 중죄를 저지른 장수에게 사형 대신 신분을 상징하는 머리와 수염을 잘라버린 ‘모욕형’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들에게는 명예를 잃는 것이 몸을 잃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건강의 정의에서 마음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마음의 병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마음의 건강을 지킬 수 있을까?


베다 철학에서는 우울증의 원인을 ‘진정한 자아를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현대 사회는 몸, 즉 나이, 성별, 외모, 직업, 성취, 국적 등 외적인 정체성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규정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정체성은 일시적이며 죽음을 맞이하면 몸과 함께 사라진다. 반면 베다 경전 ⟪바가바드 기타⟫는 내 정체성이 이 몸이 아니라 영혼(아트마)라고 가르친다.

영혼의 정체성을 잊고 물질적 자아(거짓 자아, ahaṅkāra)에 집착할수록, 삶의 의미를 잃고 허무와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어 ‘젊고 아름다우며 유명한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매력적이고 집착하기 쉽지만 매우 일시적이다. 젊음과 아름다움은 10-20년을 넘기지 못하고, 유명세 또한 한 번의 스캔들로 사라질 수 있다. 이 정체성을 즐기고 누릴수록 이를 잃었을 때 상실감이 커지고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삶에 큰 변화가 왔을 때, 내가 오랫동안 믿어온 정체성이 박탈당했을 때 우울증이 찾아온다. 일평생 몸담았던 직장에서 은퇴했을 때 느끼는 허무함, 아이들을 모두 독립시키고 난 뒤 찾아오는 고독, 사춘기 때 생기는 정체성 혼란,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경기를 그만두게 된 운동선수, 이 모두가 자신이 믿었던 자아를 잃었기 때문에 겪는 우울함이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잃으면 삶의 방향도 잃게 된다. 이 존재론적 혼란은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사실 우울증은 나 자신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베다 경전은 이 세상을 본질적으로 고통으로 가득한 곳, 두칼라얌duḥkhālayam이라고 한다. 가장 완벽한 사람도,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 세상에서는 죽음, 질병, 노화, 이별, 실패,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 이 세상이 본래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집착이나,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때 좌절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전 글 참고-<왜 나에게만 나쁜 일이 생기는 걸까?>)


또 다른 우울의 원인은 행복의 정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행복의 정의는 개인마다 다양하지만 보편적으로는 신체와 정신체의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을 행복이라고 한다. 맛있는 음식, 비싼 차, 좋은 집, 아름다운 배우자, 안정된 직업, 유명세, 인정… 하지만 이런 종류의 만족은 일시적이며, 충족되자마자 더 큰 갈망이 생기기에 결국 공허함과 허무함이 남는다. 이 감정이 점점 깊어지면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피자를 매우 좋아해서 피자를 먹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이 사람이 피자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얼마나 지속될까? 15분, 길어도 한 시간 동안 이 행복을 누릴 것이다. 매일 하루 삼끼로 피자를 먹는다면? 첫 며칠간은 행복하겠지만 결국 질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육체적인 감각보다 더 높은 차원인 인정, 명예, 지위 등 정신적인 만족을 통해 얻는 행복은 어떨까? 한국의 한 유명한 댄서가 수년간의 피나는 노력 끝에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그런데 이 댄서는 수년간의 고생 끝에 얻은 행복이 딱 일주일이 지나자 끝났다고 한다. 육체든 정신체든 둘 다 물질적인 차원이며 이를 통해 얻는 행복도 제한적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물질계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사막에서 맛보는 물 한 방울’의 맛으로 비유한다.


또 다른 우울의 원인은 사랑의 부재이다. 영혼의 가장 본질적인 천성은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가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시대를 불문하고 영화, 드라마, 음악 등의 가장 인기 있는 주제는 로맨스다. 모두가 사랑을 주고받기 위한 소울메이트, 단짝, 동반자, 베스트 프렌드를 찾는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늘 어렵다. 믿고 사랑을 퍼주었던 상대는 내가 기대한 만큼 사랑을 주지 않는다. 심지어 배신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가 버린다. 의사소통에는 늘 오해의 여지를 품는다. 사람들은 내가 의도한 대로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설령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진짜 소울메이트를 찾았다 해도 죽음으로 찾아오는 이별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번거로운 인간관계 대신 강아지나 고양이를 기르며 사랑을 주고받고자 하는 욕망을 해소한다. 사실 이 모든 문제는 사랑의 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늘 불완전한 존재다. 그 어떤 인간도,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소울메이트도 내 사랑의 욕망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없다. 사랑이 신을 향할 때 비로소 우리의 깊은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 이는 마치 나무에 물을 줄 때 잎이나 가지가 아닌 뿌리에 물을 주어야 영양이 나무 전체로 공급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렇게 신과의 관계가 확고해지면, 즉 ‘세로의 관계’가 정립되면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 즉 ‘가로의 관계’ 또한 충족된다. 더 이상 상대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하거나, 인정받으려 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고 이기심 없이 사랑을 베풀게 된다. 본래의 관계 (크리슈나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면, 어떤 사랑도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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