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적인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모태신앙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극심한 고통과 좌절을 겪은 뒤 종교나 영성에 심취하게 된다. 고통스러운 이 현실 이상의 무엇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일 것이다. 나의 경우 영적 수행에 입문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였다. 20대 중반의 나는 가장 건강하고, 가장 예뻤으며, 가장 자유로웠고, 정말로 원하는 모든 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행복감과 동시에 허무함이 찾아왔다. 이 행복이 물질적인 것들에 의존하고 있었고, 평생 지속되길 바랐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게 인생의 전부일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정한 행복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하면서 성현 프라부파다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그가 남긴 이 말이 몹시 끌렸다. “(영적 수행을 통해)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충분히 황홀감을 느낄 수 있다.” 행복감을 유지하기 위해 카페인과 술, 초콜릿 등에 심하게 의존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내면에서 얻는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리하여 더 나은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경전 공부를 시작했는데, 새롭게 접하는 지식들은 점점 내 기대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곳 물질계는 나 자신에게서 오는 고통, 타 생명에게서 오는 고통, 자연재해에서 오는 고통 등 세 가지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곳이다.’,‘진정한 행복은 영계에서만 가능하다.’, ‘삶의 목표는 불행으로 가득한 이곳에서 벗어나 영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행복은 좇을수록 더 불행해진다.’등 행복을 포기해야 할 것 같은 메시지만 눈에 들어왔다. 진정한 자아인 영혼은 본질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행복은 영영 포기해야 하는 걸까? 이곳에서 행복은 정말 불가능할까?
베다는 놀랍게도 영적인 수행을 통해 속세를 벗어나는 수행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행복을 올바르게 추구하는 방법도 제공한다. 즉, 이 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을 성취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가면서도 영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지침이다. 이를 바르나와 아쉬람의 합성어인 ‘바르나아쉬람varnashrama’이라 한다. 바르나는 개인의 성향에 따른 사회적인 직업으로 MBTI와 비슷한 개념이다. 여기에는 지식인 계층(브라마), 지도자 계층(크샤트리아), 상공인 계층(바이샤), 예술인과 기술인 계층(수드라)이 있다. 모든 직업은 다 이 네 가지 분야에 속한다. 아쉬람은 나이와 인생 주기에 알맞은 의무로서 학생기(브라마차랴), 가족 생활기(그리하스타), 은퇴기(바나프라스타), 출가기(산야스)가 있다. 바르나아쉬람이라는 틀 안에서 개인은 자신의 인생 주기와 적성에 맞는 의무를 행하고 이를 통해 물질적인 행복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발전에 유리한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수행생활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은 스님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박티요가의 수행은 결혼 생활을 장려하고, 자녀도 가질 수 있으며,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살리는 전문직도 가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정신으로 그 의무에 임하는가’이다.
이에 대한 재미있는 농담이 있다. 사무직에 종사하는 한 수행가가 스승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저는 사원에 가면 사무실에 있는 생각을 하고, 사무실에 있으면 사원에 있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자 스승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사원에 가지 말고 사무실에 가라.” 조금 극단적인 예이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매일 사원에 간다 하더라도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사실상 나는 그곳에 있는 게 아니다. 차라리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하는 게 낫다.
박티 요가를 수행했다고 알려졌던 조지 해리슨(비틀즈)은 스승 프라부파다에게 삭발을 하고 출가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프라부파다는 그가 가진 영향력으로 세상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으니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라고 조언했다. 행위보다 행위에 임하는 의식을 더 중요하게 본 것이다.
이렇게 바르나쉬람을 따르는 것을 통해 영적인 수행을 하면서도 충분히 개인적인 꿈을 이룰 수 있고, 사회적인 성취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인생의 목표가 바르나아쉬람은 아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영적인 깨달음이며, 바르나아쉬람은 물질계를 살아가는 한 특정한 욕구와 필요가 있기 때문이 이를 충족하면서도 영적인 목표로 나아가기 위한 보조수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