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생 2막. 나의 하루.
고요하다. 지난 밤에는 별 일이 없었다. 아침이 밝았다. 교대시간만 되면 긴장이 풀린다. 지난 밤 상황을 이야기하며 마음을 살짝 내려 놓는다. 동료가 오면 마음 한 켠이 든든하다. 바통터치를 하고 퇴근길에 오른다.
누군가는 출근하고 누군가는 퇴근하는 일. 처음에는 참 힘들었다. 밤낮이 바뀌고 나이를 먹고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잘할 수 있을까. 두렵고 무섭기만 했다. 그래도 가족을 위해, 나를 위해 다시 일해야만 했다. 귀여운 손자 손녀가 눈에 아른거린다. 60대. 마냥 놀기엔 어중간한 나이. 아직 나에게는 일이 필요하다.
집에 돌아와 쌓인 집안일을 하고 잠시 눈을 붙인다. 커튼을 치고 안대를 하고 귀마개를 해도 낮이라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간신히 잠들었다.
빠빠빠밤. 울리는 알람소리에 잠이 깼다. 눈만 잠깐 감은 것 같은데. 아직 온몸에는 피로가 묻어 있다. 일어나야지. 잠을 깨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린다. 커피를 타 놓고 씻는다. 너무 뜨거우면 먹기 힘드니까 나만의 출근 루틴이다. 씻고 나서 미지근해진 커피를 보약 먹듯 쭉 들이킨다.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다.
차에 올라 출근을 했다. 인생 2막. 일은 고되고 힘들지만 다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젊을 때 하던 일보다 힘들고 급여도 훨씬 적다. 하지만 소중하다. 이 일도 보람 있고 할만한 일이다. 어르신들은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어르신이 소중한 보호자에게도 일이 필요한 우리에게도 어르신들은 소중하다. 마음을 다지며 직장에 들어서니 동료들이 피곤해진 눈으로 반긴다.
“어 왔어요.”
“네. 별일 없죠?”
첫마디 인사가 무탈하기 바라는 소원을 비는 듯한 대사다. 분위기가 온화하면 별 일 없는 건데 어수선하다. 동료의 표정이 심상찮다. 신경이 쓰인다.
“00어르신. 낙상사고 났어요.”
“아니, 어쩌다가.”
어르신들의 식사 후 식판 뒷정리 시간에 선생님들이 식판을 정리하는 사이 휠체어에 앉은 어르신이 발로 테이블을 밀어내며 휠체어와 함께 뒤로 넘어지신 모양이었다. 동료 선생님의 표정이 어둡다.
“걱정말아요. 괜찮을 겁니다.”
나는 동료 선생님을 달랬다. 내가 일하는 시간에 일어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내가 근무할 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어르신들을 돌보는 사람은 항상 부족하고 어르신들은 여럿이다. 경제 논리의 문제다. 복지에 관련된 세금이 부족하다. 사람을 고용할 수가 없다. 나라가 어려우면 제일 먼저 복지예산부터 없앤다지. 며칠 전 본 뉴스가 눈에 아른거리고 아침에 마신 블랙커피의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내 자식보다 더 어린 사회복지사가 달려왔다. 직장 체계 상 사회복지사는 우리에게 지시를 내리는 입장이다. 지시를 받는 우리도 부담스럽고 지시를 내리는 그들도 부담스러울터다. 이해는 가면서도 가끔씩 화가 나기도 한다. 도와주는 일은 별로 없는데 귀찮은 일은 우리에게 다 미룬다. 그리고 책임 질 일이 생기면 얄밉게도 쏙 빠진다. 그래도 이런 일이 터지면 누군가는 수습해야 한다. 사태 파악과 뒷수습은 그들의 일이다.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들에게도 외면하고 싶고 무거운 일일텐데.
“선생님 언제 어떻게 된 일인가요?”
첫 질문부터가 야속하고 얄밉다. 아직도 나는 놀라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사태 파악에만 급급하다. 애써 목을 가다듬고 평소처럼 말한다. 나이 든 사람의 연륜을 보여줄 때다.
“식사시간 후 식판 정리 시간에 어르신이 넘어지셨어요. 식판 정리 하는데 꽝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어르신이 휠체어와 함께 넘어지졌습니다.”
나는 더듬거리지 않고 말했다. 사회복지사는 얼굴을 찌푸렸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최초 발견자는 000선생님이시고 어르신이 5호실이니까 5호실 담당 선생님은 000선생님이시네요. 5호실 000선생님은 어르신 낙상 때 무슨 일을 하고 계셨나요?”
내 대답보다는 담당 선생님의 대답이 더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공격적인 말투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데 원장님이 도착했다.
“잠깐만 어르신부터 살펴보고 여쭤봐요. 000선생님. 지금 어르신이 먼저에요. 사태파악은 조금 있다 합시다.”
원장님이 사회복지사에게 한마디 하고는 바람처럼 어르신께 달려갔다. 동료들이 어르신을 성벽처럼 둘러 쌓고 있었고 원장님이 다가오자 길을 텄다.
어르신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놀랐는지 가쁜 숨을 내쉬었고 원장님은 어르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져가며 어르신께 괜찮으신지 연방 물어보기에 바빴다. 한참을 대화 후 원장님은 불타는 집에서 아이를 구출하는 소방관처럼 돌아서서 우리에게 말했다.
“어르신 괜찮으신 것 같네요. 우리의 할 일을 합시다. 어르신은 한 분만 계신 게 아닙니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 없어요. 퇴근하실 분은 퇴근하시고 일하실 분은 일하셔야 합니다.”
“미안하지만 5호실 담당 선생님과 000선생님은 조금 늦게 가 주세요.”
원장님은 빠르게 일을 정리하고는 사람들을 흩어버렸다. 그렇게 사고는 해변의 모래성을 파도가 쓸어간 것처럼, 다시 평평한 해변처럼 되는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사고는 터졌고 모래성은 이미 사라졌다. 외면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한참 불 끄다가 불 타는 집에 동료를 두고 가는 소방관이 된 심정으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입맛이 썼다.
다시 집에서 눈 깜박하니 출근시간이 되었다. 하루가 1초처럼 빠르기만 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은 더욱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돌아가신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미 몇 년은 지났다. 이번에 사고 나신 어르신도 내 기억에 남게 될까.
“안녕하세요. 00어르신 괜찮으신가요?”
이번 출근의 인사는 여느 때와는 조금 달랐다. 뭐 다를 수 밖에. 어르신의 안위가 궁금했다.
“네. 다행히 어르신 괜찮네요. 병원에 다녀오셨는데 머리에 혹만 났다고 하네요.”
“보호자 분은 뭐라셔요?”
“그건 모르겠네요. 원장님이 잘 처리하시겠죠.”
우리도 집에 각자의 부모님을 모시는 입장으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아마 크게 난리 칠 것 같다. 잘 모시라고 어렵게 보냈는데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어르신을 모셔 본 우리도 이성을 잃을 것 같다. 보호자께 사고에 대해 말해야 할 원장님이 안쓰럽기만 하다. 그리고 참으로 미안하다. 우리가 좀 더 신경 썼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텐데. 물리적으로 사람이 부족하긴 해도 그래도 어쩌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자책감이 든다. 원장님께 미안하고 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어찌됐건 어르신을 다치게 한 입장으로 보호자를 대면하는 것은 참 힘들고 어려운 일일 것이다. 원장님은 아무런 내색 없이 우리들 앞에서 보호자들을 달래고 견뎌내며 있었다. 우리들보다 어린 사람인데도 한 집단의 장인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른 사람인 것이다. 마음이 든든했다. 사고가 터지지 않게 집중해서 일해야 한다. 일터의 분위기가 바짝 바뀌었다.
서로가 서로를 도와가며 격려해가며 그리고 서로에게 주의를 주고 어르신의 건강상태를 이야기하며 각자의 가정생활을 이야기하며 울며 웃으며 그렇게 나의 하루가 지나간다. 오늘 하루도 별 일 없기를. 나는 두 손 모아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