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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Dec 26. 2023

늦은 밤, 폐지 줍는 할아버지의 작은 즐거움

노인 빈곤 사회의 단면

늦은 밤, 퇴근 후 모처럼 친구와 저녁을 먹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내가 살았던 곳은 조금 언덕배기에 위치한 곳이어서 50m 정도는 완만하다가 가파른 경사를 지나야만 했다. 집에 가는 길목에는 가로 세로로 나 있는 골목길이 여러 군데 있다. 그곳을 지나가다 다가구주택 옆 높은 시멘트 계단에 앉아서 핸드폰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을 보게 되었다. 옆에는 폐지를 잔뜩 쌓아놓은 수레가 있었다. 폐지를 수거하러 다니다 잠시 쉬는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 저 많은 폐지를 모으느라 할아버지가 돌아다닌 거리는 얼마나 될까. 


나는 그 길을 지나는 몇 초간 그 할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는 노랫소리인지 사람의 음성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유튜브 영상을 보고 계신 것 같았다. 마치 생활의 루틴인 듯 평온한 모습으로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분들을 종종 봐왔기에 새삼스러운 광경은 아니었지만, 그날따라 왠지 마음 한 켠이 짠했다. 할아버지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 너무도 정적이고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일까. 밤늦은 시각, 조용한 주택 골목 사이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그가 더 외로워 보여서일까. 폐지 줍는 노인의 모습은 그렇게 내 뇌리에 박혔다. 






폐지 시장이 얼어붙어서 노인 생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가뜩이나 헐값인 폐지 가격이 더 떨어져 kg당 100원까지 했던 게 지금은 40원, 100kg를 실어야 4천 원이다. 경기 침체에 폐지의 수출길이 좁아지면서 가격이 내리는 것이고 고물상들이 폐지를 모아 압축장으로 보내는데 요즘은 물량 초과라 쌓아 둘 공간도 부족하다고 한다. 수거 자체가 안 되면 가격은 계속 내리고 그러면 폐지 줍는 노인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환경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 


노후의 가난은 정말 힘들다. 저렇게 한나절 꼬박 일해도 5천 원 벌기가 쉽지 않다. 꼬부랑 허리로 자신의 몸집보다 큰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먹먹해진다. 


늙고 돈 없고 아픈 것만큼 서러운 것이 있을까? 젊고 건강하다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든 단순 육체노동이든 하면 된다. 노동에 대한 대가가 얼마든 간에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생계를 꾸려가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성치 않은 몸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지? 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어른이 되었다고 할 만큼 많이 살지 않아서인지 잘 모르겠다. 최근에 읽은 이석원 님의 책 <나를 위한 노래>에서 작가님은 '왜' 사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은 해답을 찾기가 어려우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집중하는 편이라고 했다. 맞는 말도 같다. 누군가는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지, 뭐.'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어렵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개인마다 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할 것이다. 책에서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인생의 선택들을 하고 삶을 살아간다는 결론으로 맺음말을 한다. 






2016년 개봉한 독립영화, '죽여주는 여자'가 생각났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가난한 노인들을 상대하며 먹고사는, '죽여주게 잘하는' 여자 '소영'(윤여정)이 사는 게 힘들어 죽고 싶은 고객들을 진짜 죽여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에서 평생 동안 자기 몸을 움직여 돈을 벌고 생계를 꾸려야 한다고 말하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의 대사가 왠지 씁쓸해 보인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박카스를 팔아야 하는 그녀의 삶이 처량하면서도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녀라고 이러한 삶을 살고 싶었을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속에서 그녀는 오늘도 박카스를 팔 수밖에 없다. 


소영은 세 명의 노인을 죽여주고 결국 눈이 오는 겨울날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소영이 체포되어 가는 마지막 장면에 담배를 피우며 혼잣말로 읊조린다.


"혹시 봄 돼서 감방 가면 안 될까요?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 도망 안 갈게요. 거기 가면 세끼 밥은 주잖아요. 요즘은 반찬이 뭐가 나오나.. 올 겨울은 안 추웠으면 좋겠다." 


이 대사 속에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과 애처로운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무런 희망과 소망도 없이 생의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에서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보게 된다. 영화는 노인 빈곤 문제가 심각해지는 대한민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현실적이면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몇 개월 전, 추운 날씨에 주택가 계단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그 할아버지는 올 겨울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요즘도 폐지를 줍다 쉴 때마다 유튜브를 보고 계실까? 아직은 건강할까? 그 할아버지에게도 따뜻하게 꽃 피는 봄이 곧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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