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판매자를 만났을 때
쓰던 에어팟을 잃어버린 지 4개월이 지나고서야 새 에어팟을 샀다. 내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 3개를 꼽으라면 단연 스마트폰, 노트북, 에어팟이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은 일상생활과 일, 취미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필수품이고, 이동 시간에 항상 노래를 듣는 걸 좋아했기에 에어팟을 굉장히 소중히 여겼다. 에어팟이 있을 때는 편하다기보다 내 몸에 붙어있는 것 마냥 너무나 당연한 건데, 없으면 바로 허전해지는 신기한 물건이다.
에어팟을 잃어버린 건 작년 겨울 어느 주말 오후, 분명 가방에 에어팟과 카드 지갑을 넣고 외출을 했다. 가장 먼저 서점에 들렀다가 샐러드를 포장하고 빵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에어팟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어디 갔지?!' 몇 번이나 가방을 뒤졌다. 에어팟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내가 들른 매장에 두고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게에 연락을 해보았으나 두고 간 물건은 없었다고 했다. 도무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착잡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 일에 후회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에 '이미 지나버려 되돌릴 수 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지 말자'라고 생각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에어팟을 잃어버린 그날 하루 몹시 개운치 않아 하다가 다음날부턴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는 빠르게 차선책을 찾아보았다. 새 에어팟을 살까? 당분간 유선 이어폰을 쓸까? 고민하다가 후자를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 이사 준비로 지출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새 에어팟을 사는 건 좀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다이소에 파는 아이폰전용 8핀 유선이어폰을 샀다. 가격은 5,000원. 생각보다 너무 저렴해서 놀랐다. 이어폰을 아이폰 단자에 꽂고 블루투스 기능을 켜고 페어링을 했다. 유선이어폰임에도 블루투스로 연결해야 한다는 게 신기했다. 노래를 들어보니 소리가 엄청 큰 편이었다. 가장 작은 볼륨으로 해도 충분히 크게 들리는 느낌? 음질은 꽤 좋았다. 착용감도 괜찮아서 급할 때 사용하기 딱 좋은 이어폰이었다.
몇 년 만에 유선이어폰을 써보니 선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인데 며칠은 정말 불편했다. 왠지 선이 걸리적거리는 것 같고 가방을 메고 이어폰을 사용할 때 가방 끈과 같이 꼬이는 것도 별로였다. 게다가 에어팟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유선이어폰을 쓰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왠지 나를 시대적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볼 것 같고 막 그랬다. 정작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이럴 때만 자의식 과잉 상태가 된다.
그런데 딱 일주일이 지나니 금세 유선이어폰에 적응이 되어 큰 불편함을 못 느꼈다. 에어팟이 없었을 때처럼 이어폰을 사용했고 오히려 영상을 시청하거나 노래를 듣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기도 했다. 대중교통을 탈 때나 길을 걸을 때면 꼭 뭔가를 들었었는데, 이어폰을 쓰고부터는 버스에서도 그냥 창밖을 내다보거나 일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냥 걸을 때도 많았다. 유선이어폰 사용의 순기능이었다.
그렇게 지내기를 4개월. 이제 버틸 만큼 버텼다! 이렇게나 오래 에어팟 없이 지낼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새 에어팟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에어팟 프로3을 사기로 했다. 지금까지 에어팟 2세대와 3세대를 써보았는데 둘 다 만족스러웠지만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없어서 주변 소음이 차단되지 않는 게 아쉬웠다. 애플 매장에서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체험해 봤을 때 신세계임을 느꼈기에 고민 없이 내 픽은 에어팟 프로3이었다. 그리고 네이버에 가격을 검색해 보았다. 엄청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었지만 좀 더 저렴하게 사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출 습관도 변하게 되는 건지, 돈을 번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더 느끼게 되어선지 같은 물건이면 더 적은 물건값을 지불하고 싶었다.
당근마켓에 들어가서 '에어팟 프로3 미개봉'을 검색했다. 전자제품인 데다 몸에 직접 닿는 물건이라 새 제품을 사기로 했다. 생각보다 판매자가 많았다. 인터넷에서 사는 것보다 많게는 4만 원 정도 더 저렴했다. 나는 당근마켓에서 새 에어팟을 사기로 결심하고 키워드 알림을 해두었다. 3, 4일 정도가 지났을까. 어플 알림이 떠서 확인해 보니 원하는 모델의 미개봉 제품을 판매한다는 글이었다. 주저 없이 판매자에게 채팅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 구매하고 싶어요!'
판매자와 나는 흔한 중고거래 채팅방에서 하는 말들을 주고받았고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판매자 프로필을 보니 판매물품이 조금 전에 올린 에어팟이 다였고 매너온도는 36.5℃였다. 당근마켓을 처음 이용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다음날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새 에어팟의 판매자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만나기로 한 곳은 세븐일레븐 앞. 편의점이 보이자 나는 도착했다고 채팅을 보냈다. 편의점 앞에 판매자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는 작은 종이가방이 놓여있었고 그 옆에 오렌지처럼 보이는 과일 하나가 포장재에 쌓여있었다. 나는 다가가 인사를 했다. 판매자는 남색 코트를 입은 채 정갈한 자세로 서 있었다. 옷매무새나 제안한 약속 시간으로 보아 사회초년생으로 보였다. 게다가 판매 물품 사진이 모 회사의 복지몰의 주문내역이었다. 짐작컨대 연말에 복지 포인트를 다 사용하지 못해 급하게 구매한 물건 중 하나가 에어팟인 것 같았다.
판매자는 종이가방에 든 박스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거 동생이 보고 싶다고 해서 비닐만 뗐는데 새 상품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아, 네네. 확인했어요, 감사합니다."
"제가 중고 거래가 처음이라 많이 걱정했는데, 좋은 분께 판매해서 다행이에요. 이거 드세요."
"네? 아.. 감사합니다!"
판매자는 예상대로 중고 거래를 처음 하는 사람이었고, '혹시나 이상한 사람이 나오지 않을까?', '사기는 아니겠지?' 등등의 걱정을 했던 것도 같았다. 나도 처음 이 어플을 사용했을 때는 똑같은 생각을 가졌으니까. 지금이야 당근마켓이 대중적인 하나의 구매 루트가 되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중고 거래에 대한 걱정이나 편견이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인사를 건네고, 물건을 잘 건네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걱정이 사라지면서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나는 갑작스런 판매자의 선물에 처음엔 조금 당황했다. 가끔 중고거래를 하면서 택배 상자에 과자를 보내주신 판매자님을 만난 적은 있었는데, 직접 대면한 거래에서 뭔가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과일을.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감사히 잘 쓰겠다고 말하고 걸음을 돌렸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흰 종이 가방을 다시 열어보았다. 영롱한 새 에어팟이 고이 담겨있었다. 4개월 만에 만난 에어팟은 보기만 해도 배불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절대 안 잃어버려야지, 소중히 다뤄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건네받은 과일을 다시 봤다. 귤도 오렌지도 아닌 것이 포장재에 쌓인 주황색 과일은 천혜향이었다.
'와, 이거 맛있는 건데!'
친절한 판매자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내 마음에도 온기가 전해졌다. 나는 거래 후기를 남기기 위해 당근마켓에 다시 들어갔다. 판매자로부터 벌써 거래후기가 와 있었다.
'너무 친절하십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ㅎㅎ'
그 후기를 보니 또 한 번 따뜻해졌다. 내가 친절하게 한 것도 없는데..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단출한 인사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잠깐의 중고 거래로 만난 사람에게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었다. 나도 바로 후기를 보냈다.
'좋은 제품 잘 쓰겠습니다~
천혜향도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
좋은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마음이 한껏 충만해지는 기분이 너무 좋다. 기분 좋은 여운이 그날 잠들기 전까지는 지속된다. 원하는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어서 감사하고, 따뜻한 판매자가 건넨 예상치 못한 선물에 또 한 번 감사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선뜻 마음이 담긴 선물을 건네며 그의 행운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에어팟은 지금까지 흠집 한 번 내지 않고 잘 쓰고 있다. 앞으로도 잃어버리지 않고 오래오래 쓸 것이다. 잃어버린 물건으로부터 생긴 우연한 사건이 기분 좋은 경험을 선사한 것처럼 때로는 불행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 일이 뜻밖의 행운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