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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원 May 21. 2024

빗속에서 힙합 페스티벌을 즐기는 법

진정한 젊음의 의미

힙합은 요즘 세대의 가치와 꿈, 환상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거울 같은 예술이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일단 공감과 설득에 성공하면 대중의 관심을 끌기도 쉬운 것 같다. '원하는 삶'과 '주어진 삶' 사이에서 번뇌하는 모범생 같은 고민을 짜릿하게 파고든다. 적어도 보이는 걸로 봐선 '원하는 삶'을 사는 래퍼들의 메시지를 동경하는 '주어진 삶'을 사는 우리들의 불만은 힙합이라는 장르를 이렇게까지 끌고 온 하나의 동력이다. 세상의 모든 툴툴거림이 만든 예술적 장르가 힙합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NEVER DIE!


힙합은 죽지 않는다. 아니, 죽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거친 불만 속에서도 숨은 기회를 찾는 예술이 힙합이기 때문이다. '원하는 삶'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그리고 대부분 못 간다. 슬프다. 하지만 '주어진 삶'이나마 '원하는 삶'처럼 살 수 있는 희망과 교훈을 준다.


힙합의 역사를 논할 때 어떤 쪽에서는 힙합이 저항 음악이었다고 말하고, 다른 쪽에서는 파티 음악이었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둘 다였을 수도 있다. 설령 둘 중 어느 하나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저항 음악으로도 파티 음악으로도 감상용 음악으로도 쓰이기에 기원을 따져가며 이 장르는 어떠하고, 어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느 장르나 마찬가지로 힙합에도 좋은 면이 있고 나쁜 면이 있을 것이며 명작이 있는가 하면 쓰레기 같은 노래들도 있다.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결점까지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 어떤 진실성을 담아내는가 하면 자기 크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내는 일명 디스 문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나에게 힙합은 낯선 장르였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다. 나는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들을 때 습관적으로 언어를 해독하는데 영어와 욕설, 한글이 뒤섞인 랩은 의미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어떤 곡의 가사는 가사를 보고 읽으며 의미를 유추해보기도 했다. 가사의 숨은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곡을 쓴 사람의 참신함에 감탄하는 것 또한 나름 재미가 있었다. 몇몇 좋아하는 랩 곡은 비트가 좋거나 래퍼의 목소리가 나의 취향이거나 인생이 담긴 이야기를 쓴 가사에 공감이 가거나. 셋 중 하나다.


지금껏 힙합이라는 장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내가 왜 힙합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생각했다. 그 이유는 음악에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인디 음악, 발라드, 댄스곡에도 솔직한 이야기를 담을 수야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장르에서도 사랑, 나, 사회,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힙합만큼이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표현이 제한되지 않고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음악이라는 사실이 어떤 해방감과 쾌감을 주었다. 힙합은 자유롭고 솔직하게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장르로 여겨졌다.


유난히 힙합 장르에서 래퍼의 힘이 강한 이유도 말에 있을 것이다. 말은 그 사람을 닮을 수밖에 없으니 랩은 그 사람의 삶이 조각조각 담겨 있을 것이었다. 한동안 좋아하는 래퍼의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어떤 생각으로 이 멜로디와 가사를 썼을까 생각하며 한 사람의 삶에 이입해보는 것. 그러다 문득 음악으로 사람의 감정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렸을 적에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고 드라마를 봐도 가수가, 주인공이 왜 저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나였으면 저렇게 안 할 텐데'라고 생각하며 주인공의 감정에 잘 공감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앞뒤 맥락과 주인공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많은 부분에서 감정적 공감과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오며 나 또한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거나 어렴풋하게나마 비슷한 감정을 느껴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고 그만큼의 정신적 성숙을 한 것이겠지. 스스로의 성숙을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낯설지만 시시때때로 몰려오는 인생의 파도에 넘어지고 매번 다시 일어서 넘어왔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아 새삼 대견하기도 하다.






바야흐로 5, 6월은 뮤직 페스티벌의 계절이다. 좋아하는 한 가지에 빠지면 질릴 때까지 파고드는 타입인 나는 올해엔 힙합 공연을 가고 싶었다. 공연을 찾아보니 5월 초, 내가 사는 곳 근처 공연장에서 힙합 페스티벌이 예정되어 있었고 운이 좋게도 출연진 리스트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떡하니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새벽바람에 그 공연 티켓을 예매했다. 처음엔 같이 갈 사람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주변 사람 중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은 데다 그 공연을 당장 예매하고 싶은 마음에 바로 예매를 해버렸다. 혼자 가게 되더라도 뭐 괜찮았다. 점점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게 좋으면서도 한편 씁쓸했지만 혼자서 무언가를 즐길 수 있다면 누군가와 함께했을 때도 분명 즐거울 수 있을 것이라 위안 삼았다. 공연일을 기다리는 기간 동안 어린이날을 기다리는 어린아이가 된 것 마냥 설렘으로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공교롭게도 공연일은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공연 당일. 기대에 가득 찬 내 마음이 무색하게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힙합 페스티벌은 야외 공연장에서 열릴 예정이었기에 계속 비가 온다면 아마 우비를 쓰고 공연을 봐야 할 것이었다. 맑은 날씨에 공연장을 가득 메우는 스피커로 음악을 들으며 즐길 생각이었던 나는 애꿎은 날씨가 원망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해가 쨍쨍했는데 그날만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도 그치기는커녕 일정한 굵기와 속도로 계속 내렸다. 마치 오늘 하루종일 비가 올 것이라는 걸 암시하는 듯했다.


공연장과 가까워질수록 음악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쿵쿵대는 드럼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공연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때마침 공연장 입구에는 한 아저씨가 큰 소리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우비를 팔고 있었다. 나도 흰색 우비를 샀다. 잠깐 백팩을 내려놓고 야구모자를 다시 쓰고 그 위에 우비에 달린 모자를 썼다. 커다란 우비는 제법 빗속에서도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거의 하루종일하는 공연이었기에 소지품을 최소화하고 놀기 위해서 물품보관함에 백팩을 보관했다. 입장 시에 장우산은 반입 불가라고 해서 하늘색 땡땡이 비닐우산은 입장 전 우산이 모여져 있는 한쪽 구석에 버려두고(?) 들어갔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커다란 무대와 음향 장치, 무대 위의 가수, 스탠딩석에서 뛰는 사람들, 다양한 푸드트럭이 보였다. 야외 페스티벌에 혼자 왔다는 민망함도 잠시, 나는 고민 없이 스탠딩 구역으로 달려가 사람들 틈을 파고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 중 한 명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음원으로만 듣던 노래를 실제 무대에서 보니 신기했고 흥으로 충만해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음악에 따라 리듬을 타고 있었다. 음악을 즐기는 데 정해진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즐거운 대로, 느끼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같은 쓸데없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그들도 이 공연에 집중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처음 힙합 페스티벌을 본 건 대학교 2학년 때 캠퍼스 대공연장에서였다. 당시 학교 축제 기간이었는데 축제 프로그램 중 하나로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힙합 공연을 했다. 그때 나는 한창 대학생활을 즐길 때라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곧장 대공연장으로 달려가 마지막 공연까지 보고 막차를 타고 집에 갔었다. 그때 다이나믹 듀오가 마지막 공연이었나 그랬다. 다이나믹 듀오의 마지막 공연은 열기가 엄청났다. 어쩌면 지금보다 그때가 관객들의 호응이나 열정이 더 강렬했던 것 같기도 하다. 큰 야외공연장에는 늦은 시간까지 관객들로 가득했고 너나 할 것 없이 뛰고 소리 질렀다. 그때도 나는 힙합이라는 장르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저 음악에 몸을 맡기기엔 수줍음을 많이 탔지만 친구들과 공연장의 신나는 분위기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젊음'을 즐기고 있는 듯한 생각에 마음이 벅찼던 때였다.


알고 보니 최근에 간 힙합 페스티벌의 전신이 대학 때 본 그 힙합 페스티벌이었다. 벌써 10여 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마침 올해로 힙합 페스티벌이 10회를 맞았다고 했다. 플래카드에 적혀있는 낯익은 주최사의 이름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물론 지금도 페스티벌에 온 사람들은 힙합과 음악에 대한 애정으로 공연장을 찾았을 것이고 열정적이었지만 그때의 어떤 열기보다는 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를 지나면서 한동안 야외 공연이 중단되기도 했고, 대학축제 문화도 예전보다 활발하지 않다고 들었다. 축제 때 캠퍼스 내 술 반입이 금지된 지도 꽤 되었다. 어떻게 보면 성숙한 공연 문화와 깨끗한 캠퍼스 환경 조성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그때에만 할 수 있는 무모한 일들을 행하고, 어리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사소한 실수는 용인받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은 이제 점점 줄고 있는 것 같아 한편으론 아쉽다. '젊음'이라는 이름으로 뭐든 해보고 봤던 내 대학시절의 모습 대신 요즘엔 '현실'과 '취업' 같은 단어와 함께 대학가의 문화도 점점 바뀌고 있는 듯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태가 변화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일 테다.






시계를 보니 공연장에 입장하고 3시간 30분 정도가 지나있었다. 스탠딩석에서 이렇게 오래 서서 공연을 본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심지어 비를 맞으면서 보았는데도.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들은 전부 비를 맞으면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멘트를 할 때 '비가 정말 많이 오네요',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공연하는 거 처음이에요' 등의 말을 했다. 온몸이 비에 젖고 인이어를 뺐다 끼기도 하며 열악한 공연 환경 속에서도 몸을 던져 노래하고 최대한 관객석 가까이로 다가와 소통하고 사인해 주는 가수분들도 많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무대에 서는 것이 일이자 비즈니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래 한 곡 한 곡에 진심을 다해 부르는지, 얼마나 관객과 소통하려 애쓰는지는 조금만 보아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진정성 있는 모습에 팬들이 더 환호하는지도 모르겠다.


출연진이 많았던 만큼 래퍼들마다 라이브와 멘트, 무대 매너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맨스티어라는 힙합 크루는 처음 보았는데 첫 등장씬부터 시원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다른 곳이었다면 눈살을 찌푸릴만했지만 힙합 페스티벌에서는 여기저기서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오히려 그 모습이 당당하고 솔직해 보였다. 멤버 중 한 명이 말했다.


'우리 생각보다 공연 잘하지?'

'와아아~~ 네!!!'


알고 보니 개그유튜버가 본캐고 래퍼가 부캐인 아티스트였고 찌질한 행동거지를 묘사하여 각종 사회적 문제로 불거진 K-힙합씬과 힙찔이들을 풍자하는 캐릭터에 찰떡이었다. 개그맨들이 하는 풍자임에도 불구하고 음악 퀄리티가 나쁘지 않았다. 나도 이들을 찾아보지 않았다면 진짜 래퍼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등래퍼와 쇼미더머니, 지구오락실로 유명한 이영지의 무대는 TV에서 보던 대로 무대를 압도하는 힘 있는 목소리와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어린 나이지만 저런 퍼포먼스와 무대매너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앞쪽에 있는 관객들과 눈을 맞추려 하기도 하고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에 보는 사람이 에너지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도 여러 무대가 이어졌고 내가 기다려마지않았던 가수가 공연하는 동안 나는 초집중해서 무대를 봤다. 짧은 공연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아 최대한 노래를 많이 하고 가려는 듯했다. 무대 좌우, 앞뒤를 뛰어다니더니 관객석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고 앞 줄에 서있던 관객의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어주기도 했다. 어느새 음악과 무대에 빠져 리듬에 맞춰 둠칫둠칫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비가 오는 것이나 옆 사람이 누구인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 이 공연장에 퍼지는 음악과 분위기에 흠뻑 젖은 채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나는 마지막 바로 전 무대인 에픽하이의 공연까지 보고 공연장을 나왔다. 끝까지 다 보고 가면 사람들이 한 번에 이동해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20대도 아닌 내가 힙합 페스티벌에 혼자 가서 밤 10시에 나오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렴 어떠랴. 좋아하는 게 많다는 사실은 분명 좋은 일이다. 뚜렷한 취향과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건 그 사람을 더 개성 있게 만들어 주고 삶의 즐거움을 더 자주, 많이 느낄 수 있다는 말도 될 테니까 말이다.


내가 힙합이라는 장르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처럼 앞으로 어떤 것에 새롭게 관심이 생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나는 계속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좋아하는 가수를 덕질하고, 또 새로운 장르가 궁금할 때는 주저 없이 경험할 것이다. '젊음'은 신체적인 나이를 뜻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을 경험하며 사는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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